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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안에서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대하여[삼상25:23-44] 본문

구약 QT

주님 안에서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대하여[삼상25:23-44]

주하인 2022. 6. 17. 10:47

(펌) 아비가일로 검색한 그림

때로는 아름답고 유혹적이며

때로는 너무 옳은 듯 보여도

그 깊은 속에는 

자신 만의 숨겨진 어둠들이 있을 것인게

사람들의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반드시 그러할 숨은 악, 원죄로 부터

파생된 죄 탓일게다

 

 하지만

그 모든 인생들의

어찌할 수 없는 악 만을 보기 보다

때로는 그들, 그러함 조차

하나님의 뜻 가운데 쓰임을

알고 믿는 다면

 

내 

우리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좁은 길 행보에

크게 흔들림은 없으리라

 

심지어 그러함 조차도 

하나님 안에서 쓰여

우리를 

가장 선한 곳으로 인도하실 

우리 주님을 찬양할 뿐이다


 
26.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너무 가슴 떨리는 신앙적 멘트가 

아비가일, 자기 남편 알기를 우습게 아는 여인의 입에서

서슴없이 쏟아져 나옴이 놀랍다. 

보라. 

자기 남편을 '나발과 같이 되기를'이라는 

좀.. 배은 망덕한 표현을 쓰지 않던가?

다윗의 노를 누구리려는 이유로 그러한 목적이있다면 이해는 가지만

그의 다른 행보에서 보듯

나발의 죽음조차 별 슬픔을 주지 못하는 듯 나온다. 

서슴없이 다윗의 부인으로... .ㅠ.ㅠ;

 

이처럼

' 성경속 여인 이야기' 중 '아비가일은 행복했을까' (<-읽어보세요.. 아주 재밌습니다   아래에도 긁어다 놓습니다.)라는 글에서

이 여인의 마음에 들지 않았음을 자세히 써 놓은 것 처럼

난.. 아비가일이란 여인을 볼 때마다

솔직히 마음에 안들었다. 

 

 아.. 어쩌면 '나발' 같은 품성이 자주 드러나는 

나 스스로의 감정이 이입되어 

내가 그처럼 아끼었던 여인이( 마음대로 음식, 종.. 부리도록 허락 맡은게 사랑 받던 증거 아니던가?

단 한순간의 다른 멋진 남자 , 다윗 앞에서

저처럼 처절히 까내리는 장면에서 

아마도 속이 상해서 일지 모른다 생각해왔었는데

나처럼 생각하셔서 글을 써놓으신 것( -> 아비가일은 행복했을까 )을 읽으면서

실제로 아비가일이란 여인의 품성의 옳지 못했을 것임에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눈치챘었지만 이 글에서 이후로 아비가일이란 

이 대단하고 명석하며 

가슴 떨리는 신학적 위로를 

가장 적재적소의 시점에 

듣고 싶어하는 얘기를 하는 ( 솔직히 마음이 요동치지만  그 안에서 누군가 잡아 주었으면 할 때, 

가장 정확한 하나님의 논리를 저렇듯 감동적으로 이야기 해주는데 어찌 이 여인에게 감동하지 않을까? )

이 대단한 여인이 

아.. 길르압의 어미(삼하 3:3)로 나온 것 이외

더 이상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도 없음을 보아

아비가일의 '악한 부분'에 대하여 

어쩌면 성경에서도 인정하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듯하다. 

(펌) 다윗의 가계도

 아.. 반면

아비가일 처럼 유부녀의 몸으로 다윗의 다른 첩이 된 밧세바는

솔로몬 이하 총 네명의 아들을 낳았던 것에 반해 

너무도 대단한 총기와 자극적 등장에 비해 형편없이 된 것은

무엇인가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은 듯 느껴진다. 

 (자주 느끼지만 성경은 현대인의 눈, 인간의 도덕으로 판정하기에는 

 버거운 부분들, 허락되어진 죄들이 가끔 나오기도 한다. 

 그러함......또 다른 묵상거리지만.. ) 

 

28.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각설하고 

대단한 아비가일의 말을 들어본다. 

 

정말, 미사여구가 아니다. 

신학적 통찰에 대관계적 배려를 믹스한 

멋진 명연설,설교 내지 위로처럼 들린다. 

악녀 아비가일의 사람을 홀리는 말로 들리기에는

그 힘있음과

가슴뜨거워지는 느낌이 예사롭지 않다.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알면서도 자주, 순간 

마음의 장난, 관계의 부대낌으로 순간 오류에 빠져

하나님의 싸움대신 

내 싸움을 하려함은

자제 해야한다. 

 

 알지만 안된다. 

하지만... 

이제 안다. 

말씀으로 눌려질 때가 있다. 

오직 성령의 은혜로 순간 '차분'해질 때가 있다. 

순종하면 된다. 

 

 아비가일 같은 여인을 들어서도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있게 되면 

즉각 

순종해야한다. 

 


29.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그게

'여호와의 생명 싸개 (NIV: bundle of the living) '라는 표현이 좋다. 

 

 아마... 다윗의 마음의 요동은

사울로 인한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과 그로 인한 마음의 불편함이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 자신의 성품으로 인하여 눌리어 졌지만

이 미련한 나발이 촉발한 계기가 되어 

드디어 '폭팔'하려는 

마치 '댐'이 무너져 폭팔하려는 듯 

압력밥솥이 뜨거운 김을 분출해 내기 직전의 폭팔 압력이 최대화 되어서

마침 나발쪽으로 분출하려 하는 

그 상황이었던 것 같다. 

즉, 나발도 충분히 이겨낼 만한 자극이지만

그의 약함을 빌미로 약한 대상을 빌미로 터져나올 '두려움'의 실체를

'생명싸개'라는 

너무도 멋진 표현으로 

그를 감싸 안게 하여

그의 대의에 어긋나지 않을 방향으로 

살포시 돌려놓는

정말로 '위대한 '표현이 맞다. 

 

아.. 

일개 소시민인 우리의 매일 잦은 분노와

그 다윗의 그러함은

정치적으로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정말 '누'가 될 만한 일임에도

그 마음의 터질듯한 압력을 

누군가 잡아 주길 바라면서도 터져나가려던 

그 가려운 곳을

저 '악녀^^; 아비가일'의 입을 통해

너무도 절절하게 풀어 버려 주는 것이다. 

 

이.. .임재의 상황.

하나님이 절절히 하시는 상황,

정말 그 상황을 

다윗은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32.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그 마음이

이렇게 표현 되어지고 있다. 

 

' 오늘 너를 보내어.. 영접... 찬송할지로다'

 

 


36.아비가일이 나발에게로 돌아오니 그가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그의 집에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마음에 기뻐하므로 아비가일이 밝는 아침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다가
37.아침에 나발이 포도주에서 깬 후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말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이 미련한 나발.

그래도 살붙히고 먹고 살게 해주던 남편을 차갑게 바라보다가

마침내 '나발 남편'을 죽음에까지 이르게한 

차거운 여인 '아비가일'

 

 아름답고 지혜로우나

차갑기가 '뱀'같은 여인 

 

 

42.아비가일이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그를 뒤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전령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그 여인의 행보가 놀랍다. 

한치의 망설임없이 

죽은 남편을 애도함도 없이

남의 남자, 다윗을 따라가 많은 첩 중의 하나로 변신한다 

그리고 

그게 '끝'이다. ㅠ.ㅠ;

그 때 고대 근동의 풍습이라고 치부하긴 

아비가일의 놀라운 하나님 이해도에 반비례한

남편에 대한 차가움과 냉정함이 너무도 가슴시리다. 

 

 그리고 

그러한 여인을 통해

그러한 여인을 매개로 

다윗이 실수를 막아서게 하시며

놀라우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아차리게 하시며

'원수를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임'을 

우리들,

이 부족한 자들에게도 다시한번 깨닫게 하시며

비록 이 자리에 서 있지만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는' 영적 전사로서의 매일을 살고 

'하나님의 생명싸게'에 우리 역시 쌓여

더 이상의 위험으로 부터 우릴 안전히 감싸 안으실 것임을 말씀하시니

마음이 평안해짐이 놀랍다. 

이 .. 악녀의 입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은 이렇게 임하신다. 

그게 .. 놀랍다. 

 

 

 주님.

아비가일의 엎드려 조근조근 외치는 이 언어가

말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을 격동시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세상에 그리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괜히 그러지 못하게 했던 자들을 분노하고 

또 내 힘으로 어쩌려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여호와의 싸움에 ' 내가 싸우려 하던 것이었음을

정확히 깨닫게 하시며

어쩌면 그러한 모든 내 안절부절 못함의 바탕이 

내가 '하나님의 생명싸게에 쌓여 있음'을 

자꾸만 잊고 

괜한 두려움과 그로 파생되는 불안과 분노에 의하여

오버하며 튀쳐나오는 제 자아의 발로라 

너무도 정확히 읽어주고 있습니다. 

그 말의 정확함이 힘이 있어 

아... 저 아비가일 같은 악녀의 입에서 나온 소리만 아니었더면... 하며

저도 모르게 힘없이 스쳐 지나가던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다시 묵상을 하며 깨닫게 하시는 바는

그러함 조차

하나님께서 베푸신 일이고

어느 하나 , 심지어는 날아가는 참새 떨어지는 것 조차 

주님의 허락하심이 없으시면 가능치 않음을 인식하니

아비가일 조차 

하나님의 뜻에 

선한 도구로 

그 당시 , 그렇게 쓰임 받았을 뿐이니

흔들릴 일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올곳이 바라보기만 하면 됨을 깨닫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한번 더 성장할 기회를 주십니다. 

너무 희 고 너무 검어서 

이리저리 분류하고 분별하려는 어리석음을 

이제 주님 안에서 내려 놓습니다. 

그 어떤 것도 주님이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고 

그 어떤 것도 주님의 도구로 선하게 쓰임을

다시한번 봅니다. 

그래서... 

생명싸게 에 쌓인 저... 

여호와의 싸움을 오늘도 싸우는 나.. 에만 집중하려 합니다. 

 

함부로 판단치 아니하고 

허락하시면 취하겠습니다. 

주여

거룩하시고 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 (펌)

 

 

아비가일은 행복했을까?

 

byLogos BrunchJan 22. 2020
 

아비가일은 지혜롭고 인자하며 믿음이 좋은 여자였다. 그러나 남편 나발의 처지에서 볼 때 아비가일은 결코 현숙한 여자는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구약학자로서 Bar-Ilan University 명예교수인 M. Garsiel(1936~)은 아비가일은 남자를 잘 아는 여자로서 남자를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하였다. 그녀는 남편 나발과 다윗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Rhodes 대학의 구약학 교수인 Steven L. McKenzie(1953~)는 아비가일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통치자 다윗의 품 아래 들어가려고 기회를 엿보는 여자로 평가하였다. 이스라엘의 많은 처녀가 다윗을 흠모했듯이 아비가일도 다윗을 사모하였다. 그녀는 현재의 남편 나발보다 훨씬 뛰어난 남자 다윗을 사모하였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모험보다는 안정을 추구한다. 따라서 능력과 실력을 겸비한 남자를 선호하고, 장래성 있는 남자를 선호한다. 결혼 전이라면 문제가 안 되겠지만, 결혼한 여인의 이런 태도는 부정함으로 나가기 매우 쉽다.

 

조지아 대학의 구약학 교수인 B. Halpem은 나발의 죽음에 주요 용의자로 아비가일을 지목하였다. 그녀는 다윗에게 자기 남편 나발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하였다.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삼상 25:26). 그녀가 실제로 자기 남편의 죽음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핼펀 교수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Law and Narrative in the Bible” 저자인 C.M.Carmichael(1938~)은 아비가일은 남자를 조종하는 정도가 아니라 악녀라고 하였다. 그녀는 남편 나발을 살해한 주요 용의자로서 다른 남자 다윗을 사모하였고, 남편의 죽음에 어떤 애도 기간도 갖지 않고 바로 다윗에게 시집 갔다는 점에 주목하였다(유연희, 109).

 

아비가일을 향한 구약학자들의 입장이 크게 엇갈리는 상황에서 아비가일의 결혼 생활을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아비가일과 나발의 결혼 생활은 어떠했을까?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과 함께 할 때는 매우 활발하였다. 그녀는 하인들을 잘 다루었고, 궁핍한 사람을 도왔으며, 남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였다. 그녀가 남편과 몇 년을 같이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남편을 잘 알고 있었으며, 어떤 면에서는 남편을 잘 보좌하였다. 그녀가 나발과 함께 있을 때는 자기 생각과 주관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비록 정치적 성향이 다르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럭저럭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남편 나발은 그런 아비가일을 암묵적으로 인정하였다. 집안의 종과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하여도 모른척 눈감아 주었다. 그녀가 남편 몰래 다윗에게 가져다준 음식의 양은 엄청났다. 그 정도 양을 가져갈려면 여러명의 종이 동원되어야 했다. 그건 몰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가져다가 나귀들에게 싣고 소년들에게 이르되 나를 앞서 가라 나는 너희 뒤에 가리라 하고 그의 남편 나발에게는 말하지 아니하니라”(삼상 25:18-19).

 

나발은 부인 아비가일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용하였고, 아비가일은 그걸 적극 활용하였다. 그런 면에서 나발과 결혼 생활이 불행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말이 통하지 않고, 상황 판단이 느린 나발을 어리석게 평가하며 장차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우뚝 설 다윗을 흠모하였다. 그녀는 자기 남편에게 무릎 꿇지 않았지만, 다윗 앞에서는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주인님”이라고 불렀다.

 

다윗은 아비가일을 어떻게 보았을까? 물론 아비가일은 지혜로운 여자였다. 그리고 그녀가 자기를 사모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럼 다윗은 아비가일을 사랑하였을까? 나는 다윗의 여성 편력을 살펴보면서 그녀가 여자의 사랑에 연연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윗은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략결혼을 하였다. 아히노암을 통해서는 이스르엘 지방과 결합하였고, 아비가일을 통해서는 유다의 갈렙 족속과 연대하였다. 다윗은 헤브론을 통치하는 기간 동안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근거를 확보하고 싶어서 아비가일과 결혼하였다(Brueggemann, 275). 그런 면에서 다윗은 아비가일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정략적으로 이용했다 할 수 있다. 

 

그토록 사모했던 다윗과 결혼하였지만, 아비가일은 그 이후 성경에서 사라졌다. 나발과 함께 있을 때는 그토록 활발하고, 지혜롭게 말하던 여인이었는데, 다윗의 앞날을 예언할 만큼 영성 있는 여자였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다윗과 결혼한 이후 침묵하였다. 아비가일의 지혜로 보아 다윗이 늘 곁에 두고 조언을 구할 만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윗이 침묵을 강요했는지(아니면 그녀의 이야기를 가치 있게 듣지 않았는지), 혹은 성경 저자가 일부러 그녀의 말을 없애버렸는지 몰라도 더는 그녀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다. 

 

유연희 교수는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진정 속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성경은 아비가일이 길르압(삼하 3:3)을 낳았다고만 기록하였지, 길르압이 다윗의 왕위 계승 경쟁에 참여하는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이는 참으로 놀랄만한 이야기다. 첫째 아들 암몬과 셋째 아들 압살롬의 죽음으로 자연스레 둘째 아들 길르압이 되어야 하는 데 성경 어디에도 그에 대한 언급이 없고 넷째 아들 아도니야만 언급하고 있다. 그만큼 아비가일의 영향력은 미미하였고, 다윗도 아비가일을 귀히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다. 어쩌면 다윗이 아비가일의 지혜는 높이 샀지만, 현숙하지 않음 때문에 멀리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다윗이 유부녀를 아내로 맞이한 경우는 아비가일과 밧세바가 있는데 이 둘을 대하는 다윗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능력 있고 비전 있는 남자를 사모하여 마침내 그 남자와 결혼하였지만, 아비가일과 다윗의 결혼 생활은 나발과 비교하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 같다.  Alice Bach 교수(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는 ‘다윗에게 아비가일은 단지 재산 많은 과부, 갈렙 족속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정략적 가치만 가진 여자였던 것 같다’고 평가하였다(유성희, 43). 아비가일은 현명하긴 하였지만 현숙하지 않았고, 꿈과 비전을 추구했지만 행복하진 못하였다.

 

(다음 편은 밧세바와 다윗 이야기를 써볼까 합니다) 


유연희, ‘아비가일의 남자들 : 삼상 25장 다시 읽기’, 구약 논단 제16권 1호 (통권 35집) 98-118, 2010년

Brueggemann Walter, ’ 사무엘 상하’, 한미 공동 주석 편집 번역위원회 편, 서울 : 한국장로교출판사, 2000년

유성희, ‘다윗 주변의 여성들을 통해 본 신명기 역사가의 여성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기독교 학과 석사 논문,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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