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살얼음 위 빈깡통(왕하21:1-9) 본문

구약 QT

살얼음 위 빈깡통(왕하21:1-9)

주하인 2006. 11. 18. 11:14

(열왕기하21:1-21:9)  
 

1 므낫세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오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헵시바더라

 헵시바는 내 기쁨이 이 딸에게 있음이라는 뜻이다.

그 헵시바라는 이름을 가진 분의 아들이다.

히스기야의 아들이다.

55년을 치리한 것은 대단한 땅의 축복이다.

 

9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 주님께 고정되지 않은 삶은 살얼음 판이다.  )

 

 열방보다 더욱 악한 자로서

눈 앞에 보이는 조건 만 가지고는 상상이 안간다.

 

 과연 그 대단한 영성의 아버지의 아들로

어찌 이게 가능한가...

아무리 변해도 그렇지 어찌 이게 가능한가?

 히스기야 왕의 치리를 거치면서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응답에 대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그를 증거하는 민초들의 입담과 이야기가 전설처럼 흘러 흘러 다녔을 것을 ...

어찌 전혀 다른 나라 사람처럼

일월 성신을 모시고

산당을 ....

그런 행동을 하면서 므낫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을까?

심지어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손'없는 날을 택할 정도로 사소한 귀신에게도 두려워 하는 민족인데..

 

 굳이 하나님을 전제로 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현상은 지금껏 살아온 삶의 습관과 관습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꾸며가는 일인데 그게 범인으로 가능한 일인가?

 여기에는 몇가지 추정이 있을 수 있다.

 

우선 , 가족적으로 상처있는 자.

특별히 히스기야에 의해 심한 정신적으로 타격 받은 자.

아버지가 하는 일을 모든 것을 싫어할 이유.

 

 태어나면서 난산을 겪으면서 지능에 문제가 생긴 경우.ㅎㅎ

그래서 남들의 말, 특별히 친분을 쌓은 자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를 수 밖에 없을 지적 능력의 소유자.

 

어머니의 교육적 문제.

그러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헵시바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그 이유를 들 수 없을 것 같다.

 

교육 환경 상 문제점.

12살에 왕위에 오르면서

교육을 담당한 자들 가운데 잘못된 이방 사상을 가진 자가 있었을 가능성.

상처라는 가정과 더불어 아주 농후한 이유가 될 개연성이 많다.

 

 그외 특별한 영적 세력의 공격.

 

 이러한 이유를 들어 가정을 전개해 나가는 이유는 그의 변화가 너무나 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극적인 변화가 이 사람에게만 있는가?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성경에 나온 수도없는 많은 예화가 모두 변화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는 그 대단한 다윗도..

바로 전의 히스기야 왕도..

그외의 셀 수 없이 많은 열왕 들도..

한결같다.

 

이 세상 삶에서는 안그런가?

난 천사같고 존경 그자체였던 귀한 분들이 사소한 Idea하나 차이로 담을 뛰어 넘고 멱살을 잡는 것을 보아왔다.

신문 지상에는 안그런가?

 내 주위에서도 그렇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보이던 열심이

몇가지 환경이 변하면서 확 달라지고 있다.

태도가 달라진다.

질타가 쏟아진다.

 확실히 주님의 일에는 '영적세력'이 임할 수 밖에 없어 이렇게 급변하는 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길이 없어 입이 씁스름하다.

 

 오늘 보이는 므낫세의 예에서 주님이 보이시려는 마음이 슬쩍 읽혀지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다 악의 희생자가 될수 있다.

조심해야 한다.

최근에 난 주님이 주신 평안을 이유로 열심이던 기도생활이 게을러 졌다.

실제다.

모습 만 갖추었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감동이 줄었다.

아침에 늦어진다.

그 아침의 감동을 느낀 지 오래다.

그 증거로 충만한 시상이 줄었다.

나름대로의 봉사가 짐으로 느껴진다.

또 옛사람이 내 안에서 스물거리는 증거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의 육신 만족적 생활이 지속이 되면 그건 므낫세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이야기도 된다.

지나친 이야기인가?

주위를 보아.. 지극히 타당하다.

 

그렇다면

어제 내 귀에 들렸던 악한 비평의 소리들은

오히려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늦추었던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주님께 고해야 한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을 확고 부동한 감동과 다짐으로 자리잡도록 해야한다.

자칫하면 지금의 내 모습이 최선인 줄 착각하며

감각적 편안함과 만족에서 머물다가

마치 므낫세의 55년의 삶이 마음대로 해도 되는 축복의 기간인 줄 착각하며

살며 주위의 칭찬과 합리적일 듯한 논리 속에서 살다가

주님이 보시기에 더없이 악할 모습으로 회개조차 불가능한 상황으로

빠져 들어갈 여지도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다.

 

이 삶은 위태위태한 살얼음 판이다.

항상 주님의 인도와 사단의 유혹의 경계선에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을 주님은 허락하셨다.

우리의 선택이 하루에도 수십번씩 이어지고 연결되면서

그때마다 우리 빈 깡통같은 우리들은

속이 빨개졌다 하애졌다 한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 예수님 십자가의 보혈로 씻김을 받았기에

 

 

백지같은 상황이다.

날마다 주님 성령님을 의지하여 십자가를 바라보는

코람데오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마지막 날 주님 앞에 갈 때는 십자가의 첫사랑을 경험한 그 상태대로

조금 더 성숙한 모습으로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이재와 유혹과 편견과 인간의 합리에 눈을 돌리고

그들의 칭찬과 헛된 교육과

정신없이 돌아가는 그들의 기준에 동의 하는 순간

우리는 점차로 므낫세와 같이 붉게 변한 종이같이 되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주님은 끊임없이 나를 권면하신다.

깨우치신다.

그 분과 함께하는 그 향기롭던 시간들을 회복하라고 하신다.

내 매너리즘의 통에 갇힐 위험이 있음을 므낫세의 예를 들어 경고하고 계신다. 

악함과 선함이 종이 한장 차이임을 경고하심으로

스스로 자고하고 있음을 알리시는 것이시다.

 

 

적용

 

1. 아침에 30분 더 일찍 일어나겠다.

 

2. 큐티에 좀더 충실 하겠다.

 

3.  선교 전초기지로서 직장을 위해 기도하겠다.

 

4. 전인치유 집회를 위해 기도한다.

 

 

기도

 

주님.

갑자기 원치 않는 악한 소리

그것도 주님의 일을 순전하게 기뻐하고 주님이 허락하신 일이라 생각하며

나름대로 부리던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가 어쩌면 그렇게 내 속에 있었던 소리처럼 들리는 지

잠시 멍해졌었습니다.

그래..

그럴지도 몰라.

그렇다면 앞으로 어쩌지?..

이런 식으로 ..

 

주님 그럼에도

그럴 때마다 말씀으로 많은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전 묵묵답답이던 모델을 보이시고

히스기야의 내탕고 사건을 통하여 저에게 특별히 지도하시더만

오늘은 므낫세의 예를 통하여

악과 선의 차이가 전혀 없고

늘 주님께 시선 집중하지 않으면 안될 것에 대하여 특별히 말씀하셨습니다 .

잊지 않도록 하소서.

남의 칭찬에 너무 기분이 들뜨지 않도록 하시고

남의 손가락질에 너무 좌절하지 않도록 하소서.

누구나 그렇고

또 누구나 그러한 반응을 보이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 때문에

성령님으로 인하여 인내하고 참게 하소서.

아니

오히려 이겨내고 기뻐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나의 감각적 혼란과 생각의 혼돈에도 상관없이

해결하실 줄 강하게 믿고 기대하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세속화란 하나님을 제외시킨 인간 위주의 사회 기준이요 가치 추구다.

- 어윈 루처 
 
 

'구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님 말씀하소서(수5:1~12)  (0) 2006.11.21
흐르는 것은 흘려 보내자(수 4:1~24)  (0) 2006.11.20
들켰지만 난 좋다(왕하20:12-21)  (0) 2006.11.17
온 생애를 다하여(왕하20:1-11)  (0) 2006.11.16
개 풀 (왕하19:24-37)  (0) 2006.11.15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