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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가 언제라도(렘10:17-25) 본문

구약 QT

살다가 언제라도(렘10:17-25)

주하인 2009. 9. 25. 10:55

(예레미야 - 10)

 

 

세상을 살되

세상에 섞이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주님의 생기를 더하게 하소서

 

 

주님으로 인하여

  빛을 발하게 하소서 

 

주님

그냥

순례자처럼

살 수 있게 하소서

 


17 에워싸인 가운데에 앉은 자여 네 짐 꾸러미를 이 땅에서 꾸리라  
 세상의 무서운(!) 풍조에 둘러쌓여

이도저도 못하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기 어렵다.

 내 짐꾸러미를 이땅에서 꾸리라 하신다.

이 세상을 스쳐 지나가는 '순례자'처럼 살으라 신다.

 

 

18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땅에 사는 자를 이번에는 내던질 것이라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내 던지시단다.

이번에는 .. 이라신다.

괴롭게 하시는 것은 깨닫게 하심이라신다.

고통은 고통이지만

고통은 유익이기도 하다.

그것을 유익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이시다.

 

 

 

19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 슬프다 내 상처여'라 하신다.

'내가 중상을 당하였다' 신다.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하신다.

 

 절절히 가슴을 매이게 하는 표현 들이다.

얼마나 사랑하였기에 '중상'을 당할 정도고

얼마나 심한 배신을 당하였기에 '슬프다 내 상처여 ' 하는가?

아프다 내 상처여.. 면 덜 실감 날 것이다.

'슬프다 내 상처여'는 아픈 상처가 아프기 보다는

그 마음의 심상이 더욱 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참으로 고난'이기에 '내가 참아야 한다'고 고백하는

예레미야님의 심사가 참으로 아프다.

 그 분이 눈물의 선지자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저러한 여린 가슴을 눈물로 부여잡고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인내하기에 그러한 것이다.

 나에게도 주여..

'긍휼함'과 '인내'를 주소서.

 

 

 

 

20 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휘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  

 ' 내 장막이 무너지고내 모든 줄이 끊어졌다. '

세상에 마음을 둘 어떠한 인연의 끈도 끊어졌다.

 

 사랑할 사람이 많고 사랑 받은 경험이 많은 자는 사망률도 적다.

적은 상처에도 쉽게 죽는 자들은 세상에 인연이 끊어진 자들이다.

세상은 점점 더 살기 어려워져만 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은 자꾸만 끊어져 간다.

관계가 단절이 되어간다.

하나님을 옳게 믿고 순종하며 살아 가려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더욱 더 그 고립이 심화되어 가는 세상이다.

 세상의 악함은

우리의 판단을 훨씬 넘어 서 가고 있다.

지금 세상은 여유롭게 방랑하듯 여행하는 여행지가 아니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야생동물과 모기가 우굴대는 정글에서

길을 찾아가는 탐험가의 그것과 비슷하다.

 

 
23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

   하니이다 
  사람의 운명은

인생의 방향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

그것을 앎이 지혜이다.

그것을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자에게는

삶은 고난 투성이다.

삶은 의미가 없다 .

삶은 허무하고 무겁기만하다.

 그러나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 '주님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자에게는

더 이상 인생이 고난 만은 아니다.

무거움 만은 아니다.

그 길은 가볍다.

비록 오지의 정글 속이라해도

발걸음은 가볍고 힘이 있다.

 

 

 

 어제는 당직이었다.

아내가 몸이 안좋아 산부인과적 진찰과 더불어 위 내시경도 필요하여

동일한 시간에 '여성병원'에 입원시켰다.

저녁에 입원실에 같이 있다가 그 층 테라스에 만들어진

멋드러진 정자에 앉아 있으려니

이 사람 저사람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바람은 시원한 가을 바람이고

내려다 보이는 밤 건물들의 불빛으로 이루어진 전경은

기분을 참 좋게 만든다.

 어떤 환우 가족은 내일 퇴원한다면서 가족들이 '케익'을 들고와

파티를 하는 과정에 아들이 '노무사' 합격을 했다고

겸사겸사 같이 축하를 한다.

박수를 쳐주니 참 기뻐한다.

 환우 분이 왔다는 연락을 받고 아내만 남겨놓고 갔다가 오니

산모 보호자로 오신 할머님과 아내가 대화를 하고 있다.

몇 시간을 신나게 말씀하시는 그 분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참 희한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다양한 마음이 든다.

 시골 분.

연세 60대 중반.

홀로 되신 분.

그러나 돌아가신 부군께서생활 걱정 안하도록

노후 준비 다 해놓고 가신 , 그래서 경제적 여유는 약간은 있으신 분.

예수님 믿지 않으시는 분.

나름대로는 정절을 지켜가시며 살면서도

그 분이 오래 외로웠던 마음으로 내 뱉는 속사포 같은 말씀 속에는

세상은 너무나도 급히 변하고 있음을 절감할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시골 분... 연세드신 분이시다..

 그런데 그 분의 입에서 나오시는 이야기는

실로 우리 부부의 입을 쩍 벌리게 하기에 틀림이 없었다.

 자신의 마음과 자신 주위의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에 대하여

수많은 이야기를 하셨지만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것의 주제는

'노후에 자식은 의지처가 아니다. 

그러니 철저히 자신의 노후를 준비하라.' 는 것과

' 나이 들어도 섹스와 사랑 받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다'는 것이고

그 분의 세상적 간증의 이야기는

마치 '막장 드라마'와 하나도 차이가 없었다.

'사랑과 전쟁'에서 나오는 이혼부부의 이야기와도 하나도 다름없었다.

 수많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하셨지만

그들 대부분이 애인 - 그 연세에,  그 시골 분들께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왔다 ! ) -을 두고 있으시고

애인의 대상은 유부남이던 홀아비이던 구분을 짓지 않고 있었다.

아예 그 분 입을 통해서 나오는 애인의 개념에는

우리가 배우고 이해하고 있었던 도덕이란 선이 없었다.

그래서 놀랬다.

그게 '젊은이' 레벨에서는 그럼을 진즉부터 인정하고 있었고

우리 또래의 세상 사람 들에게도 위험한 모험을 즐기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러한 도덕 개념이 흔들리고

오히려 도덕이라는 생각을 한 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란 사실이

저 연세의 분들에게 까지 퍼져 있다는 사실이 정말 충격이었다.

 물론, 한분과 그 분의 주위의 분들의 사정을

그 세대 전체의 이야기로 확장시켜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안다.

그러나, 저 막장 드라마의 위력이 어느정도 까지 퍼져나가는 지는

그 입에서 나오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모습은

벌써 이 엉터리 같은 풍조가

세대를 불문하고 만연되어 있음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세상은 벌써

가족 간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었다.

율법(도덕) 개념은 아예 무너져 버려가고 있었다.

배려와 사랑, 거기에서 나오는 인내라는 덕목은

아예 '바보'나 하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잔인한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처럼 들리는 세태가 되었다.

그것이 우리보다 더 윗 세대까지 전파되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밖에 모르는 무서운 관계 단절의 세대가 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서 소름이 쭉... 끼쳐간다.

  종교 다원주의 뿐 아니라

세상은 오직 자기 위주의 상태다.

 물론, 다는 아닌 줄 알지만 벌써 많이 많이 그렇게 되어 간다는 얘기다.

postmodernism의 폐해.

사단의 작전은 성공하고 있다.

 

 다인실 밖에 없어서

아내를 데리고 내 당직실로 데려갔다.

아내는 내일이면 간단한 내시경 검사 등을 하고 퇴원하면 되는 지라

하루만 내 방에서 같이 고생하는 마음으로 데려갔다.ㅎ

 아내는 침대에 뉘이고

난 바닥에 누웠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을 자려 했지만 잠이 안온다.

딱딱한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도 그랬지만

생각이 복잡해서이다.

아내도 그런 모양이다.

 오랫동안 내려 놓았던 장래에 대한 걱정이 또 올라오려 하는 것 같다.

'노후 대책'

저 적은 몸의 허약한 아내를 두고 내가 간다면...

아까 하신 그 할머님의 말씀 탓이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알면서도

난 이렇듯 쉽게 흔들린다.

또 , 아이들의 앞길이 걱정이 된다.

그 아이들이 세상의 그 원리에서 혼란스러워하면서

하나님의 원리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혼돈이 걱정스러워 진다.

어느새 자식들과의 관계를

저들처럼 차거운 눈으로 바라보며

버림 받는 두려움으로 아이들의 아픔을 눈가리고 살 수 밖에 없어져 가는

이 차거운 현실,

이 지옥도의 세상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러다 그러다 풋잠이 들었다.

한차례 환우 때문에 불려간 것 이외에는

다른 때 보다는 덜 고생한 당직의 밤은 그리 저물어 갔다.

 

 아침에 일어나 묵상을 들여다 보니

'슬프다 내 상처여'하는 소리가 눈에 들어 온다.

'내가 중상을 당하였다' 하신다.

어찌 이리 정확히 내 맘을 읽으시누?

주님 뜻대로 살기에 세상은 너무 격변해 있다.

그래서 주님 뜻을 똑바로 따르기에는

이 육신의 세력이 큼이 그냥 두지 않는다.

나이든 나는 덜하지만 어린 내 아이들은 그 왕성한 육신을 어찌 감당하며

하나님의 그 말씀을 어찌 따르누?

그 상처가 얼마나 클지 이해가 간다.

중상도 그런 중상이 없을 것이다.

 

 에워싸인 가운데에 앉은 자여 네 짐 꾸러미를 이 땅에서 꾸리라 

결국, 우리들 주님을 사모하는 자들은

세상에 에워싸인 자들이다.

우리, 세상에 에워쌓인 자들이 선택할 길은 세 가지다.

'세상으로 더 열심히 가거나

 세상에서 피하여 산속으로 , 무인도로 도망하거나

 세상에 살되 세상과 섞이지 않는 방법.'

 위 두가지는 쉽되 파괴적이다.

마지막 방법이 가장 좋되

늘 깨어 있지 않으면 동화되어 버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에워싸인 가운데에 앉은 자여 네 짐 꾸러미를 이 땅에서 꾸리라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고 살라고..

세상은 우리가 정붙일 곳은 아니다.

한 순간에 털어버리고 갈 곳이다.

내 본향은 천국이다.

그러기에 세상의 미련 둘 것은 하나 둘 정리해야 한다.

자식에 대한 과도한 미련도 버려야 한다.

그들이 불쌍하면 더 기도하고

그들의 장래까지 전능자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래서 계속 어제에도 주님의 위대하심을 '예레미야'님이 찬양하였지 않는가?

짐꾸러미.

그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 것인가?

'성경'이 들었을 것이고

최소한의 내 삶의 방편이 들었을 것이다.

사랑이 들었을 것이고

동역자가 있을 것이다.

주님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믿음.

그 분이 주시는 평강의 기억 만이 그 짐꾸러미에 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걸어가야 한다.

주님이 내 길 인도하심을 믿고

주님 만이 내 앞길 다 아시는 분임을 믿고 가야 한다.

언제든지 '순례자'이고 '방랑자'로 살아야 한다.

 

걱정과 근심과 세상의 추악함에 대한 '토악'이여 멀리가라.

그들을 오히려 불쌍히, 긍휼히 여겨야 한다.

 

 

적용

 

1.  세상의 원리는 날 당혹시킨다.

   주님은 아침의 묵상을 통해 자연스러울 것을 위로하고

   우리의 나가는 방향을 쓰다듬으신다.

 

2. 세상을 불쌍히 여기자.

   주님의 원리,   사랑 긍휼 절제...는 세상사람들에게는 훨씬 먼 뜬구름의 이야기다.

  따라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이전보다 훨씬 어려운 말이 되어 버렸다.

  악은 훨씬 강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럴 수록 더욱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긍휼함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3. 금전이나 명예나 성공이나 축복이나..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욕심은 내려 놓는다.

 

4. 노후에 대한 걱정도 내려 놓자.

   짐꾸러미에 넣지 말자.

   언제나 떠날 사람이다.

   그것은 유치한 감상이 아니다.

   진실이다.

   유치하게 느끼도록 하는 것은 '사단'이다.

 

5. 아들 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 아이들은 우리보다 더욱 힘든 세상에 산다.

  아이들의 육신의 힘은 우리보다 더욱 강하다.

  아이들이 영적 싸움에서 이겨나갈 수 있도록 기도하자.

 

6.  주님 만이 나의 길이고 나를 인도하실 힘이시다.  

   믿음이 필요하다.

   주여 믿음 마져 주소서.

 

7. 성경 일곱장 읽자.

  말씀 만이 살 길이다.

 

 

기도

 

 주여.

너무 자연스럽게도 세상은 변해가고 있습니다.

주여.

그 속에서 살아가기가 너무도 두렵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다가는 어이없고 유치하고 희한한 고리타분한 사람들이라

손가락질 받을 것만 같습니다.

세상은 사랑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 , 자신 만이 신앙으로 되어 버려가고

자신의 감정 만이 유일하게 존중받아야 할 것처럼 되어 가고 있습니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은 무너지고

부모의 사랑이 가장 하나님의 사랑과 비슷하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게 지옥도입니다.

주여.

어쩌면 제가 세상을 너무 어둡게만 보는 지 몰라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주여.

하지만 말씀으로 늘 정확하게

하나하나 짜여진 듯 허락하시는 인도하심에

그 걱정이 헛된 우려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이겨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세상을 살되 언제라도 세상을 박차고 떠날 준비를 하고 살도록 하소서.

주님을 위해서라면 손해볼 각오를 하고 살게 하소서.

주님 말씀이면 일사각오의 마음으로 살도록 하소서.

그러기 위해 저에게 확신의 믿음을 주소서.

늘 흔들리는 갈대의 믿음은 이제는 허락지 마소서.

부족한 믿음 마져 채워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 자녀들.

그 연이 끊어지는 '우'가 우리 가족에게

내 아는 모든 사람들의 가족에게는 허락지 마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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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험한 이 세상 길) 

06.09.02   양문교회 연습곡 

 

 
 
  1.   멀고 험한 이 세상길 소망없는 나그네 길

    방황하고 헤매이며 정처없이 살아왔네
    의지할 것 없는 이몸 위로받고 살고파서
     세상 유혹 따라가다 모든 것을 다 잃었네


  2.   무거운 짐 등에지고 쉴곳 없어 애처로운 몸
      쓰러지고 넘어져도 위로할 자 내겐 없었네
    세상에서 버림받고 귀한 세월 방탕하다
    아버지를 만났을 때 죄인임을 깨달았네


  3.  눈물로써 회개하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어
    죄악으로 더럽힌 몸 십자가에 못박았네
    구원함을 얻은 기쁨 세상에서 제일이라
    영광의 길 허락하신 내주 예수 찬양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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