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그분은 내 아버지고 난 그분의 자식이다.( 렘 11:1-8 ) 본문

구약 QT

그분은 내 아버지고 난 그분의 자식이다.( 렘 11:1-8 )

주하인 2009. 9. 26. 11:22

제 11 장 ( Chapter 11, Jeremiah )

 

 

뱀딸기 보다

더 추악한 나를

이리

사랑하신다네요 ^^ ;;

 

 

 


  
2.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고하라  
3.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4.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

    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5.  내가 또 너희 열조에게 한 맹세 곧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

    인데 오늘날이 그것을 증거하느니라 하라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  
6.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말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준행하라 
8.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하였어도 그들이 행치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말로 그들에게 응하게

    하였니라 하라
 '언약'이란 단어가 여섯 번이나 나온다.

언약의 내용은 이것이다.

' 너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고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러면 너는 내 백성이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어찌 보면 인간의 사랑처럼 조건적 사랑인 듯하지만

이것은 계속되풀이 되는 권면과 안타까운 되풀이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또한 청종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해야할 일이지만

8절에서 보듯이 '행치 아니하였어도 이 언약으로 그들에게 응하게 하였다' 나온다.

 

 언약.

주님의 약속.

이것은 어떠한 의미로 나에게 다가오는가?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믿음'이다.

언약을 믿을 수 있는가 아닌가가 중요하다.

그 분의 언약을 믿을 수 있다면 당연하지만

우리의 삶은 훨씬 자연스럽고 당당하고 힘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어떤가?

조금은 덜하지만 아직도 불안한 면이 없지 않고

삶에 힘이 있지를 못하다.

아직도 갈바를 몰라 당황하는 마음이 들때가 없지 않고

아직도 세상의 격변에 , 나도 그래야 하는 가 아닌가.. 하다가 머리를 털 때가 종종있다.

아직도 내 속의 터부는 날 가로막는다.

마치 어제 목사님 설교에서 나오는 스가랴 서 내의 '큰 산'처럼..

만일 ,

오늘 언약의 말씀처럼 ,

진짜로 그렇지만,

'내가 그 분의 백성이고 그 분은 내 하나님'이심을

즉,  먼 ..하나님이 아니시고

내 하나님, 내가 그분의 아들임을 '확실히 ' 믿는다면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결론적으로 난, 믿음이 부족하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많다.

머리로 보다 가슴으로 이해가 되어야 한다.

가슴근처까지는 내려왔지만 영혼으로 깊숙이 믿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도 믿음이 부족한가?

난 어려서 부터 의심이 많은 편이다.

지금도 돌아보면 그런 경향이 많다.

나 자신을 깊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같고

남에게도 그런 것만 같다.

그들이 날 사랑할 것이란 것을 깊이 믿지 못함은 아니던가 싶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의심이 날 사로 잡고 있던가?

성장 과정과 내 성향의 탓이 있다.

조건적 사랑.

'잘해야 칭찬 받는다.'

'내가 잘하기 때문에 칭찬 받는 것이고 잘못하면 사랑받을리 없다..'라는 생각이

깊이 뿌리 박혀 있는 듯하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 중에

'너희가 순종하고 모두 준행하면... '이라는 이러한 조건에 민감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에 분명코 우리가 행동하지 않았어도

이 언약을 응하게 한다는 말씀이 나온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되풀이 되는 주님의 안타까움은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알게 된다.

 주님의 사랑은 믿을 만 한 것이 틀림없다.

 

 

 아침에 나오기 전에 아들에게 축복기도를 해주고 나온다.

아버지 학교 수료후에도 쑥스러워 잘 못하던 것을

둘째 아들과 성경 읽기 시작한 올 초 부터

둘째 아들에게는 열심히 해주니

아들도 나도 쑥스러움은 없어지고

아들은 20살의 나이임에도 자연스레이 아침에 머리를 드리민다.

그러면 나는 아이에게 허깅하자고 한다.

아들은 눈이 뜨이지 않는 눈으로 날 마중나온다.

언젠가 부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자리잡았지만

자주 잔소리하던 상처덩어리 아빠였던 나는

늘 마음 속에 그러한 분위기의 아빠로서 바램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미안함, 죄책감으로 그러하지 못하고 있었었고

또한 아들의 부족한 면이

나로 하여금 속상할 때는 그러지  못하게 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다 보면 허깅, 축복기도는 가뭄의 콩 나듯이 하였었다.

 아들에게 스킨 십을 자주하다보니 장점이 있다.

아들이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것이다.

아직 부족한 면이 많아서 걱정, 근심, ..으로 호통칠 , 과거의 것들도

이제는 덜하게 되고

아들 역시 혼나고 나서도 그리 날 경원하는 눈치가 없고

쉽게 '하하'하고 다가 오게 되고

훨씬 말투나 자신에 대한 이해도 가 폭이 넓어 지는 듯 싶다.

모두 ,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준행하고 나니 펼쳐지는 부수현상이다.

 큰아들.

지난 밤 'PC방'아르바이트로 새벽에야 잠이 들었다.

방에 들어가니 아이가 정말 많이 말라 있다.

근무하느라 배어 있는 담배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 아들.

참 착한 아이지만 이 어리석은 주하인 아빠와 조금은 버겁다.

너무 영리하고 착하고 빈틈이 없어 어려서 부터

과도한 기대를 가지고 혼을 많이 내고 기른 터,

상처가 많다. ^^;;

그런 아이를 조금 더 여유로운 주님의 눈으로 보았더라면 ... 하는 후회가 많지만

주님 안에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아이는 '성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토록 내가 내려 주기 싫었던 '상처'를 고스란이 가지고 있는 아이.

 둘째는 아무래도 막내라서 막내 특유의 처세술이 있어

무서운 아버지의 밑에 순종하는 태도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사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을 같이 하며 녹아가게 되어

이제는 훨씬 여유롭게 되었으나

큰 아이와의 사이는 아직은 좀 그렇다.

 난, 그 아이들을 철저히 내 눈으로 분석하고 바라보았었던 것이다.

' 저러저러하니 너희 들은 이러이러한 대접을 받아야 하고

   이렇게 이렇게 해야 너희들은 그렇게 그렇게 사랑 받을 수 있어.'

철저한 조건적 사랑을 난, 배운 그대로 아이들에게 내려 주었던 것이다.

아이의 가슴은 얼마나 타 들어 갔었을까?

자는 아이를 내려다 보니 가슴이 찡하다.

그래도 아이가 외지에 나가 있는 동안 둘째를 데리고 열심히 연습해 놓은

표현 방식을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자는 아이의 머리를 괴어 안고 축복기도 했다.

자다말고 '아멘'한다.

그래서 아이에게 '허깅해라..'했더니 눈도 못뜨면서 끌어 안는다.

아이가 픽하고 웃는다.

나도 웃었다.

그리고는 문을 닫아주고 나왔다.

 

 솔직히 걱정이 지금도 많이 된다.

아이들.

장래를 생각하면 그들의 현재의 모습은 실망이다.

 지나왔던 시절동안은 그들을 바라볼 때

내 일방적으로 생각해왔던 '자식으로 지켜야 할 약속' 같은 것을 준행치 못하는

부족한 아들들이었고

그래서 난 그들을 냉철하게 혼내서라도 잘길러 보려 했었고

그것은 아이들에게 철저한 '조건적 사랑'으로 인식이 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아이들은 피동적으로나마 반항하는 아들로써 비뚤어져 갔던 것이다.

 조금씩 주님 안에서 생각이 바뀌어 가면서

나는 아버지로서 아들을 쳐다볼 때

내 스스로 나도 굉장히 조건적 사랑을 주는 자...사랑이 부족한 자...로서

스스로 자책을 하고 있었으나

점차로 아들들에 대하는 내 심사를 들여다 볼 때마다

내 깊은 속은 그들을 이쁘게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게 기쁘다.

아이들의 조건과 상관없는

아버지로서의 흔들리지 않는 사랑.

 너무나도 당연할 것 같지만 정말 당연한가?

세상 모든 현상을 보면 온통 문제 투성이다.

그게 부모 자식간의 절대적 사랑의 부재 탓이 아닌가?

그게 요즈음 만의 현상인가?

어쨋든 인간은 원죄의 존재이다.

당연히 상처가 있을 수 밖에 없고 그것이 가족 간의 숨겨진 상처로 나온다.

 산다는 것.

정말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이제 주님의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

주님은 나에게 마치 '조건을 거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네가 내 말을 잘 순종하고 모두 행해야만'

'너는 내 백성이고 난 네 아버지다. '

속상하려 하였었다.

그래서 난, 그토록 주님을 체험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에 아주 알게 모르게 거부 반응- 죄송합니다. ... 주님... 이게 내 상처 탓이었습니다.  -을 일으켰고 그러한 것은 나도 모르게 슬쩍 지나치며 의식 속에 묻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믿어라.. 하면 '그러지요'하는 식으로 지나가 버리면서

속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의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정말 주님이 날 사랑하시나?

 정말 난 주님의 아들 맞는가?

 그렇다면 왜 이리 고통스러운가?

 그렇다면 왜 옛날 내 가까운 분들이 그랬던 것 같은 뉘앙스야?

  그냥 주님의 뜻이라니까..  기다려 보지.....................' 정도로 ..

 그것은 '불신앙'이지만 그 불신앙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의식 속에 묻어 두다 보니

믿음 생활에 힘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주님이 마지막 구절에 ' 네 행동에 상관없이 내 언약을 응하였다'라고

슬그머니 말씀하시는 그 뉘앙스가 느껴진다.

 난 부족한 아버지로서도 그러했다.

정말 맘에 흡족하게 아들이 날 대우하지는 못하지만 ^^;

그 아들이 사랑스럽다.

점차로 그게 느껴진다.

 허깅하고 쓰다듬으며 그 아들이 '피식'하고 웃는 모습과

아직은 그보다 더 학문적 성취가 덜한 둘째가 살갑게 오는 모습만 보아도

아버지로서 내 속에 그들에 대한 사랑이 쏟아지려는 마음이

충만하게 오는 것을 보아서라도

그 사랑의 정화이신 하나님의 그 마음이 읽혀진다.

안타깝기에

더 좋은 방향을 아시기에

그게 길이기에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이기에

우리가 아버지의 아들로서 당연히 자격은 있지만

그 자격 앞에 '슬쩍' 우리가 해야할 의무를 조건으로 끼워 넣으셨지만

실은 그게 그 분의 사랑에는 전혀 지장이 없으시고

우리가 아들이고 딸이며

우리가 받아야할 축복의 이유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상급의 크기는 조금 다르겠지만..

 

 난 믿어야 한다.

난 믿기를 선택한다.

난 믿음을 기도한다.

'그 분은 내 아버지고 난 그분의 아들이다.'

그리고 난 확신한다.

'그 분은 날 사랑하신다. '

'그 분은 날 보고 웃으신다.'

 

 하나님은 이 아침

언약으로

내 가슴 속에 드는 행복한 아침의 마음을

확인시켜 주시고 계신다.

감사하고 고마우신 분.

 

 

적용

 

1.  난 주님의 백성이다.

    난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은 날 위해 죽으셨다.

    예수님은 날 위해 부활하셨다.

 그걸 믿는다.

 

2. 주님의 말씀을 잘 알아 듣겠다.

  기도와 묵상과 회개로서 그리하자.

 

3. 순종하자.

 말씀하세요.

 듣겠습니다.

 

4. 믿음.

  믿음에 대하여 묵상하자.

 

5. 셩경 일곱장 읽겠다.

 

 

기도

 

 주님.

제 부족함을 아십니다.

누구도 잘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나 홀로 떨어져 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사랑도

누구를 사랑도

온전히 하지못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사랑할 이유와 마음과 상황이 오지만

그 뒤의 배척감에 마음을 닫고 있었던 적도 자주있습니다.

그것을 고백합니다.

주여.

오늘 주님의 언약을 보고 있습니다.

그 언약이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힘이 있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아들이고

주님은 내 하나님이란 사실이

단순하게 믿어진다면

내 삶은 더 이상의 터부는 없어질 것이고

나를 가로 막는 산은 무너져 버릴 것이 당연합니다.

주님은 살아계시고

영존하시고

모든 능력의 근원이시고

주님은 세상과 온 우주의 생성과 소멸과

그들의 운행을 조율하시는 분이시어서

세상의 밤낮과

이 땅의 계절과

육지와 바다 마져 유지시키는 그런 분이기에

더 이상 걱정 근심할 이유가 없음이 분명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주여.

내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주여.

내 아버지이심을 자랑하고 사랑합니다.

주여.

당신의 사랑의 언어들을 왜곡하지 않도록 도우소서.

늘 맑은 정신을 유지하길 원합니다.

주님의 열매가 아니신 것은 생각나지도 않도록 하소서.

난 주의 자녀이고

주님은 내 하나님이시기에 그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여.

사랑합니다.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