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가만히 겸손히 멈추자(삼상15:16-35) 본문
제 15 장 ( Chapter 15, 1 Samuel )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마음을 낮추고
나 이외를 쳐다보면
세상엔
아름다운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감동적인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보이는
주님의 작품은
모두가
아름다움입니다.
1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가로되 말씀하소서
가만히 있어야
주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린다.
17.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야
주님이 높이신다.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해야만
주님이 기뻐하신다.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
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나'라는
자아가 들어가면 안 된다.
'실로'라는
강력한 수사어나
' 다만'이라는
변명어가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땐
주님의 말씀이
변질되어가는 증거이기도 하다.
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당연하지.
순종이 제사보다 낫지.
어떤 땐,
순종이 왜 나은가 생각하고
더 좋은 길이 있을 것이란
가능성 고려하지 않는
그 분 하나님이 이상히 보일 때도 있지만
어린 아이 손을 잡고
따사로운 햇살아래
시원한 바람 부는
길을 가다가도
갑자기
어린 아이가 고집부릴 시
그 내용이
어른 보기에 전혀 옳지 않은 것이
거의 전부이란 사실을 볼 때가 있다.
아이가 옳은 대로 하는 것이 옳을까?
아이는 분명코
그 당시는
자신이 옳음을 확신하고
뗑강부릴 것이나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 분명하다.
내가 어린아이고
그 분이
온 우주를 아시는 놀라우신
창조주 어른이심을 감안할 때
어린 내가
내 소견이 옳음을 확신해도
어른 하나님에 비교해
그래도 옳은게
단 한톨이라도 있을까?
손잡은 아이가
손놓고
어른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기 맘대로 집어든 결과물에
더러운 오물이 묻어 있음을 앎에도
아이가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두어야 만 하는가?
순종은 그런의미에서
반드시 해야 한다.
설사
장티푸스
이질
파상풍
...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따라야 한다.
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그래도
깨달으면 다행이다.
25.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깨닫고는 돌아와야 하나
아직도
땅에 떨어진 오물 묻은 과자를
욕심내면 큰일이다.
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
이니이다
가슴이 답답하다.
변하지 않는
사울의 어리석은 욕심..
그 어리석음을 질타하며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를 발하고는
돌아서는 사무엘의 뒷 모습이
참으로 매몰차다.
공의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듯
두려운 마음이 올라온다.
성경의 살아 있음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돌아서는 사울의 옷자락을
급히 잡아 채는 사울.
그 손가락의 모습이 순간
눈에 스치는 듯하다.
아이들이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
한손에 들고
한손으로 머리를 받쳐 들고 있다가
머리를 받쳤던 손을 갑자기 놓으면
정상적인 아이라면
틀림없이
두 손을 바둥거리며
손가락을 있는 대로 벌려 긴장하며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취하게 되어 있다.
그때의 그 손가락 모습을
순간 취하다가
그 강력한 힘이 모여진 손가락을
얼른 내 뻗어
사무엘의 옷을 잡아 챘으리라.
이런 광경 하나하나가
마치 성경 속의 인물 하나 하나가
때로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반응은 웬일인가?
이 절박한 광경이 보여지는 이유는
왜 인가?
금방 답이 나온다.
30.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내가' '나로'... 나.. 가
다섯 번씩이나 나온다.
이 짧은 문장 속에
그의 절박한 심정이 그대로 나온다.
범죄하였어도
한번만 위신 살려서
장로들과 백성 앞에서
경배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기 바란다고 한다.
'당신의 '하나님 앞에서..
그의 절박함은
이제
하나님의 손이 아니다.
그는 손을 잡고 다니는 사실을
귀찮아 했었다.
그냥 떨어졌어도
사탕을 좋아하는
어린 아이다.
얼마나 사탕이 먹고 싶은지
잡으신 손을 떨구어 버리고
아버지이신 어른의
다구침에도
그 오물에 뛰어들어서
집고 야 마는
집착강한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31.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그래도
사무엘은 들어준다.
사랑하는 자의
청은
최대한 들어주는 게
사랑을 아는 자의 심사인가 보다.
주님 앞에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주님 말씀하시는 소리를
있는 그대로 들을
마음의 평정은 있는가?
눈 앞에 보이는
유혹의 달콤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잡으신 손을
따스하게 느낄 수 있는가?
떨어진 사탕의 홀림에도
배고픈 육신을 제어할 의지는 있는가?
육신의 배고픔보다
하나님의 잡으신 손길의 평강이
더 좋은
깊은 경험은 있는가?
그 기쁨으로 취하여
절대로
사탕이
사탕의 형태 이외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초월을 이해할 수 있는가?
걸어가는 삶 속에서
눈앞에 오는
온갖 유혹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뿌듯함은 느낄수 있는가?
오늘
사울의 모습은
철없는 아이의 모습과
차이가 하나도 없다.
아니
분주한 관심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집중 못하는
집중 장애아 같다.
주님은
가만히
겸손히
주님을 바라보길 원하신다.
그럴 수 있는가 ?
주하인?
적용
1. 가만히 있자.
분주한 마음이 들어도
가만히 있자.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오늘 만큼은 내려놓자.
2. 주님의 손을 연상한다.
3. 기도한다.
4. 주님의 말씀이면 한다.
어제 아버지 학교 가기로 적용 하고
문밖을 나서는 내게
장대비와 우산 없는 빈손, 그리고
나른한 육신이 집으로 갈 것을 명한다. ㅎ
그래도 잠시 망설이다가 내리는 비를 뚫고
택시를 잡아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놀라운 은혜가 나와 그 형제분들을 사로잡았다.
주님의 원리를 하나 더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오늘도
말씀 앞에 순종하기로 결심한다.
5. 성경 여섯 장 읽겠다.
6. 기도할 몇가지 제목을 놓고
차분히 기도한다.
7. 존대어를 쓴다.
8. 말투를 낮추겠다.
9. 난 주님 탓에 미련하다.. 라는 성경구절을 기억하려 노력한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분주하지 않게 하소서.
겸손하게 하소서.
주님 앞에 겸허하게 하소서.
소리내지 않고
말씀을 듣게 하소서.
그 말씀 앞에 정직하게 하소서.
왜곡된 논리로
말씀을 흐리지 않길 원하나이다.
주여.
오늘 하루도
주님앞에 설 수 있길 원하니
주여
그리되게 도우소서.
달콤한 유혹을
달콤치 않게 보이게 하소서.
주님의 손이 주시는
그 유혹
이외의 유혹은
내 영혼에 의미없게 만드소서.
간절히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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