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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에 묶였던 두 남자 (렘 40:1-16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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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에 묶였던 두 남자 (렘 40:1-16 )

주하인 2010. 5. 5. 13:51

 

매화는 피었어도

날은 어둡다.

 

봄은 왔어도

바람은 차갑다

 

예수님 영접한지 오래도

삶에는 변화가 없을 수 있다.

 

그래도 다르다

봄은 왔고

꽃은 핀다

대지에는 생기가 흐르고

생명으로 구원 받았다

 

그 사실을 잊지 않음은

매일

예수님 말씀을 가까이 함 뿐이다

언젠가

내 삶의 족쇄는

 끊어지고야 말 것이다

 

 


1.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과 유다 포로를 바벨론으로 옮기는 중에 예레미야도 잡혀 사슬로

     결박되어 가다가 라마에서 해방된 후에 말씀이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한 게 이루어 졌어도

예레미야님은 사슬로 결박되어 끌려가기 까지 했다.

 

 그래도  그 와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임하신다'

무슨 말씀이신지 내용은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그의 앞길에 대한 인도이실 듯 싶다.

 

 
 
4.  보라 내가 오늘 네 손의 사슬을 풀어 너를 해방하노니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선히 여기거든 오라 내가 너를 선대하리라 만일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거든

   그만 두라 보라 온 땅이 네 앞에 있나니 네가 선히 여기는 대로 가하게 여기는 곳으로 갈지니라 
 때가 되니 사령관이 불렀다.

그리고는 '손의 사슬을 풀어주었다.'

어디를 가든 선택할 기회를 주고

그가 자기 나라로 돌아갈 것을 선택하자

많은 선물을 주어 돌아가게 했다.

 

  
6.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중에서

     그와 함께 거하니라 
 선물과 함께 예언대로 이루어진 후 자신만 풀려난다.

현상만 보면 '예레미야님'은 매국노 같아 보인다.

바벨론의 앞잡이. 

 
9.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그들과 그들의 사람들에게 맹세하며 가로되 너희는 갈대아인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거하여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 
  또 한 인물이 있다.

그다랴.

바벨론의 총독으로 세워진 인물.

그도 역시 바벨론 왕에게 섬기는 게 이롭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인물은 그럴 듯 해보인다.

자신을 살해할 소문이 있는 자에게 아량을 보이는 덕이 있다.

 

 두 남자.

예레미야와 그다랴.

모두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민족의 불행을 틈타 성공한 사람들로 보일 위기에 있는 사람들.

비록 예레미야님은 그 속에 있는 민족사랑과 지속적으로 받은 고난을

우리는 알고 있어서 그분에 대한 반감은 덜할 수 있지만

그를 모르는 분들은 그 역시 그다랴와 같이 매국노로 보일 수 있지 않을까?

 둘은 비슷해 보이는 상황일 수 있지만 다른 점이 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고 들었던 사람이고

비록 그다랴는 하나님 믿음이 올바른지는 몰라도 매일같이 말씀을 듣던 자는 아니었다.

 아히감이란 분은 그다랴의 아버지로서 예레미야 26장에서

예레미야님을 도운 사람으로 나온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힘으로, 모두 잡혀가거나 죽는 그 상황에서

바벨론의 총독 노릇을 했는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게 차이인 듯 싶다.

의인에게는 고난이 많다.

십자가의 남은 고난을 그 육신에 채운다는 말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이 온것처럼 위안이 더 크게 예수 그리스도로로 인하여 넘친다는

말씀도 나온다.

 세상의 바램.

나의 바램은 기도하고 묵상하고 선한 일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매일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살면

일상은 자연스레이 '축복'으로 넘치길 바라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참으로 열심히 달려왔는데 어찌 이런..........하는 생각이 불현듯 불현듯 들때가 있다.

그럴 때 얼른 머릴 털면서 다시 주님 뜻 앞으로 가려 하지만

급한 본성으로 죄를 지었거나 힘이 들때

누르는 무거움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하지만, 예레미야님이 그러시다.

많은 굴곡을 겪으신다.

구덩이에 두번 ,

풀려나기도 두번

감금은 수차례

수없는 오해와 질타,

그리고는 하나님 말씀 덕으로 끝까지 인내하여

드디어는 바벨론의 예루살렘성 함락이라는 아픈 현실이 예언대로 이루어졌지만

또 감금되고 그것도 모자라 '손에 쇠사슬'이 묶여 포로로 끌려가고 있다.

원망도 될 상황이다.

주님께 울부짖고 '주님 이제는 ... '하고 싶기도 할 것이다.

'주님 이게 뭡니까?

주님, 주님은 힘이 없으신가요? '하고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원망하는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또 임하신다.

그리고는 풀려 났다.

그리고는 자신만 돌아갔다.

이것 또한 그리 폼나는 모습은 아니지 않는가?
무엇하나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이나 '만사형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인생이 쉽게 말하면 꼬이고 또 꼬인다.

 그다랴는 그래도 '총독'이라도 하면서 욕을 먹는데...

그러나, 그다랴는 죽게 되지만 예레미야는 산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사슬이 풀어짐'

'하나님 말씀이 개인적으로 긴밀히 이루어짐'의 차이.

 상황이 전혀 호감이 가지 않음은 위에 계속 나열하였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님은 원망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닉네임이 있을 정도로

중보의 눈물을 놓치지 않았던 분이다.

중보를 한다는 것은 그 안에 사랑이 넘친다는 이야기다.

사랑이 있다는 이야기는 원망의 흔적이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다.

그 영혼 내부 깊숙이 폭이 넓은 평안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타인을 위한 버퍼가 있을수 있다.

그것은 왜일까?

도저히 인간적으로는 가능치 않은 이야기들이

이렇듯 벌어지고 있는가?

그것은 '사슬'에 비밀이 있다.

인간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음은

인간들은 누구나 '사슬'에 매여 있다는 이야기다.

누구는 더 크고 누구는 더 작지만

사슬은 인간의 원죄와 그로 인한 강한 부정, 어두움, 불행을 이야기 한다.

하나님을 원망함?

그것은 부정한 암흑의 원죄를 이야기 한다.

예레미야를 매국노로 오해함?

그것 역시 주님의 말씀이라는 선언을 가벼히 여기는 어두움의 결과다.

현재는 이전보다 더욱 사람들이 타락했다.

그러한 어두움이 지혜로 인식되고 합리로 포장되는 시기다.

성공을 위해서는 죄를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시기다.

그러니 예레미야님의 상황에 자신을 대입하면

그것은 이해할 길이 없는 요원한 상황이 될 뿐이다.

원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다.

이게 '사슬'이다.

더구나 사슬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원망이나 어두움의 감정을 벗어날 수 없는 상태라면

죄책감이라는 '사슬'이 하나더 묶여 있는 것이 아닌가?

사도 바울은 그러신다.

죄는 율법으로 인하여 들어왔다고 ...

죄를 모를 때는 죄가 아니던 것이 율법으로 인하여 죄임을 깨달앗을 때

그것이 더 무거운 죄가 되었다고..........

이게 사슬이다.

사슬은 삶을 억압한다.

살아도 산것 같지 않다.

예수님 믿으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욕구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되풀이 하는 자들에게는

무거운 짐이고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두려운 '죄의 사슬'이다.

 

 하지만, 오늘 예레미야님은 사슬을 끌렀다.

하나님이 끌러주셨다.

그분은 그 사슬이 약하거나 없을 수 있는 분이었지만

주님의 뜻이시었기에 양처럼 끌려다니며 묶여 있었다.

그러나 주님이 풀어 주셨다.

그 사슬을 기쁨으로 순종했기에 그러셨다.

그 분은 늘 말씀을 가까이 했기에

말씀에 민감하셨기에 사슬이 사슬로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그 분은 모든 나쁜 조건을 다 가졌다.

현실로도, 사람들의 욕을 먹을 상황에서도...

하지만 , 그분의 그 원죄적 사슬에 영향을 받지 않을 이유는

하나님 말씀이었다.

 

그렇다.

산다는 것은 '사슬'에 매여 사는 것이다.

이 땅은 사단의 궤계가 횡행하는 곳이다.

그 안에서 원죄를 가진 우리들이 산다는 것은

사슬에 묶여 휘둘리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것은 '하나님,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영접' 만이 유일한 길이다.

 아니다.

영접한 후 매일 주님 말씀으로, 성령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수 밖에 없다.

멈추어 있으면 사슬을 풀 수 없다.

 죽음?

죽음조차 사단의 사슬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 땅은 온갖 사단의 조작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

성공.

성공해도 행복한가?

얼마나 가슴아픈 상대자들을 만들어 누르고 이겨야 하는가?

사람들이 주위에 끓어도 '군중 속의 외로움'은 얼마나 깊던가?

자식이 성공해도 그 자식이 자신의 영혼의 허전함을 달랠 수 있던가?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들도 나이들어 쇠약해져가는 허무함과

죽음의 두려움은 얼마나 큰가?

사람은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태어나면서 부터 죽어간다.

시간의 사슬이다.

 

 이 사슬 안에서도 자유로운 방법이 하나가 있다.

하나님의 임재감.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써 느끼는 성령의 충만함.

그로 인하여 커지는 일상에 있어서의 자유로움.

평강의 폭팔적 팽창.

이 땅에서의 천국생활.

.........

그것이야 말로 상황에 상관없는 ,

사슬에 묶여 있으면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언젠가 예레미야님 처럼 사슬을 끊고 완전성화될 수 있는 때도 올 것이다.

성령의 내주합일.

폭포수 같은 성령의 생수의 강의 흐름

.........

이것이 예레미야님이 자유로운 행로가 가능한 이유다.

 

 그다랴랑은 비슷하되 다른 이유다.

 

나.

아직 사슬에 묶여 있다.

많이 가늘어 졌다.

언젠가 곧 풀려날 것이다.

상황은 별다른 변화없이 진행되지만

그래서 가끔은 끌려가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그래서 속상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 얼른 얼른 기도원 가고 기도하고 말씀을 다시 묵상하고 하다보니

조금씩 조금씩 일어서는 시간이 단축되고

내 삶은 흔들림이덜해져 간다.

언젠가 사슬이 끊기는 날...

그러기 위해 주님의 임재를 늘 사모하다보면

난  성공할 것이다.

그리고 내 삶은 빛날 것이다.

 

 

기도

 

주님.

오늘은 희망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아직 갇혀 있는 내 모습을 투영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곧 풀려날 사슬의 끊김을 예언해주십니다.

감사합니다.

사슬에 갇혀 있지만 희망이 있고 평안이 있는 이유가

하나님 탓임을 알기에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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