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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생명으로 노래하다(렘39:11-18) 본문

구약 QT

구원의 생명으로 노래하다(렘39:11-18)

주하인 2010. 5. 4. 12:35

 39 장 ( Chapter 39, Jeremiah )  

 

구름아 오라

바람아 불어라

어두움이여 임하라

 

그럴지라도

내 주님에 대한 갈망과

주님 내게 주신 생명력과

주님 임재하심으로 인한 하나됨과

구원 받은 내 영혼의 생명을

끊을 수는 없으리라

 

그래

상황아 그래라

불고 누르고 어두워라

그래도 난

두손 들어

주님을 노래하리라

 

 

 
12.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 
  적군의 왕이 그런다.

예레미야님을 선대하라고...

주님을 잘 믿는 자들은 불신자들도 존경한다.

주님께서 그들 마져 만지셔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보호하신다.

 
 
 
15.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그래도 그의 사정은 그리 좋아진 것은 아니다.

늘 '갇힌 상태'다.

거기에 주님의 말씀이 임하신다.

 우리의 바램과 많이 다르지 않은가?

고생 끝 행복시작이면

현실적인 것도 확 달라져 버렸으면 좋을 것을...

그리고 또 주님의 말씀은 임하신다.

 어찌보면 주님은 늘 시키시기만 하시는 분 처럼 느껴질 수 있다.

주님이 임하시면 '평강'이시란 것을 모르는 자들에겐...

주님 임재 신앙을 지닌 자들

코람데오 신앙을 경험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임하신다는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 은혜인지 모르는 자들,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은혜가 임하면 그곳이 어디라도

비록 갇혀 있더라도

갇혀 있는 것이 육신이든 다른 어떤 조건이라도

은혜가 강력히 임하실 수 있다면

그것 만한 기쁨이 어디있을까?

세상의 모든 것 다 버리더라도 그럴 수 있다.

최소한 나는 그리 고백할 수 있다.

아니.. 선언할 수 있다.

喪家에서 내 친구들에게 그리 고백했다.

뜨악한 그 친구들의 표정에서 난 불쌍한 그들의 영혼을 보았다.

 

 
 
16.  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성에

      재앙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나의 말이 그 날에 네 목전에 이루리라 
' 가서  Go and tell '  말하라 하신다

 잡혀 있는 예레미야님에게 '가서'라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이신가?

그 분 하나님의 의지, 기뻐하시는 강력한 마음을 표시하는 게 아니신가 싶다.

어떠하신 말씀을 어떤 상황에 하시더라도

그것은 모두 '선'이시다.

이제는 무조건 순종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기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강렬한 의미의 기쁨.

현실이 가능하지 않을 지 모르는 듯 보이나

그것은 믿는 자에게는 사실을 의미한다.

'가서'

갇혀있지만 풀려날 것이다.

가서...

 

 나.

 풀려날 것이 있다.

안될 것 같은 느낌도 있다.

믿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오랜 습관이다.

하지만 믿으면 될 것이다.

그것을 믿는다.

주님이 임하시면 '자신'이 생기고 믿어질 것이다.

 

 


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붙이우지

      아니하리라   
18.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 같이 되리니 이는

      네가 나를 신뢰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벳멜렉

예레미야님을 구하는 데 도움을 준  구스인.

구스인이라면 '흑인'이다.

그가 절대로 구원을 받을 것을

주님께서 이리 확언에 확언을 하신다.

 

 들으면서 몇가지 생각이 든다.

'심리적 흑인'이어도 주님이 구원하실 것이란 사실

열등감이 심하고 죄책감이 심해 자신은 도저히 자격이 없을 것이라

강력히 믿고 있는 자들.

그들은 그들의 심리적 성벽에 갇혀 있고

그들은 늘 불안 중에 살고 있다.

삶이 어둡고 침침하다.

예수님을 믿어도 힘이 없다.

그 분의 십자가 보혈을 아무리 말해도 자기 만은 안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들에게 '강력히 구원해서 노략물 같이 댓가없이 거저 줄 것'이라

예레미야님, 갇혀 있는 선지자를 가게해서 확언해 주신다.

얼마나 귀한 일인가?

우리가 할 일은 '아멘'하고 기다릴 일이다.

 

또, 구원에 대한 문제다.  

여기에는 목숨을 구원해주는 것을 말하고 계신다.

죽을 위치에 있다가 살아나면 얼마나 기쁠까?

천금을 준다해도 죽는다면 어찌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구원에 대한 감격이 줄어드는 이유가 있다.

구스 사람 에벳멜렉은 제도권의 중심인물인 듯 싶다.

그가 왕에게 호소하여 예레미야를 구할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럴 수 있다.

만일 그가 자신의 재물에 대하여 생각이 미친다면...

'아니 겨우 목숨만 ?

내 아까운 재산은?'  이렇게 생각이 미친다면

구원에 대하여 감사하기는 커녕

기왕에 구해줄것...이란 생각에 불만도 싹트지 않을까?

 

 오늘의 메시지는 이렇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은 당신의 자녀를 구원하신다.

그 구원은 우리의 생각과 느낌과 판단을 넘어선다.

주님은 주님을 선으로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직접' 함께 하신다.

그들을 너무 기뻐하신다.

구원은 단순한 죽음에서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으신다.

구원은 물질에도 국한되질 않으신다.

구원은 '우주의 궁극의 무한한 힘이신 하나님'께

성령으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생명있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삶은 체험한자 만이 알수 있는 것이다.

구원 받은 나는 구원이 어떤 것인지 안다.

 

 어제는 머리가 멍했었다.

그래서 기도원 갔다.

예배 때만 가던 것을 넘어서

은혜로 통해 갈급을 해소할 목적으로 기도원 감을 기뻐하셨던가?

내내 은혜가운데 홀로 깊은 감격을 맛보다 왔다.

그래도 상황은 달라지지는 않았으나

이전과 똑같은 메시지 - 주님의 영광을 위한 내 후반의 삶이란 목적-에도 불구하고

훨씬 뚜렷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어제그제보다 어제를 통해 오늘은 훨씬 맑다.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편안하다.

 

 아침에 아들이 전화가 왔다.

둘째는 힘이 들어야 전화한다.

회진 돌다가 받은 전화.

그럴거라 생각했던 그런 어려움을 호소한다.

목소리에 풀이 죽어 있다.

전화 안올때는 서운하더니 전화오니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덜컹 한다.

서울 지방경찰청.

너무 편안한데로 발령을 받아 너무 안이해지면 어떨까 걱정했던대로

아이는 수주간을 예배도 참석하지 않했었다.

그러다가 깨닫고는 부리나케 주일 예배는 참석했지만

고난이 없으면 믿음은 해이해 지는 법.

이전에 그리 열렬히 주님께 매달리던 자신의 고백과는 달리

계속 나태한 것이 사실인 듯 싶었다.

그러다가 요 며칠 스트레스받는 일이 생기니 이제야 아빠를 찾고

아빠의 잔소리에 오히려 한걸음 더 나가 '아빠 매일큐티 집은요?' 하고

책을 보내주길 소원한다.

가슴이 아프지만 할렐루야다.

 두가지 마음이 날 흔들려 한다.

안타까운 마음과 다행이라는 마음.

다행인게 사실이긴 하지만 아버지로서는 가슴이 아프다.

그렇지만 이제는 확실히 깨닫고 있다.

'고난은 유익이다. '

 

그렇다.

구원 받았다고 고난이 그치면

나락에 떨어진다.

예레미야님도 고난 투성이다.

에벳멜렉님도 저리 열심히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도 목숨만 부지해준다는 약속이있었다.

이전에는 이랬었다.

'그것이라도 만족하자.

 구원.

 사망의 이 유한한 삶에서 구원시켜주셔서 '천국'시민 자격 준다니

 이 얼마나 다행일까?

 이 세상.. 그저그저 버티다 가면 되지...'

그러다 보면 세상에 부대끼다가 나약해지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구원의 약속.

그 구원의 의미가 너무 축소되어 값어치 없게 취급되었다.

비단 나뿐일까?

믿음생활 하는 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구원이라는 단어에 그리 현실감 있는 감동을 느끼지 못함이 사실이 아니던가?

구원이라는 단어는 그 앞에서 감동적이지 않은 체하면

왜곡된 미천한 신앙인 취급을 받을까 두려워

감사하는 체하고 십자가의 은혜에 눈물이라도 흘려야 될 것 같지만

막상 돌아서고 나면 그리 인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의미없는 단어 면서도 그것을 그리 인식하지 못하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 들여지지는 않았던가?

 

 얼마전 성장반 공부를 했을 때

구원에 대하여 확실한 정의를 기초부터 다시 배웠다.

'우주 궁극의 무한한 에너지 자원에 나를 연결하는 행위'가 구원이다.

그 구원은 '십자가 예수님'을 통해서

믿기만 하면 이루어 진다.. 라 하였다.

 우주의 그 무한한 에너지가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의 연결로 인하여 채워지면

고갈되어가던 이 내 조그만 몸과 영혼의 생명 에너지가

순식간 리필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뻣뻣하던 냉동 생선이 해동되고

순간 펄떡 거리듯

내 영혼은 생명에너지로 넘치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시고...'

하나님의 임재.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함.

성령이 충만해짐.

모두 비슷한 상황이 아니던가?

 

 주님 하나님은 그런 엄청난 사실이 구원임을

말로 일일히 설명하시지 않으신다.

한번 체험해보라.

그리하면 너희가 달라지리라.

체험하고 은혜받은 자 만이 알리라... 하시는 듯

그 귀한 구원을 에벳멜렉에게 약속하고 다짐하시며

갇혀진 예레미야님에게 안스러워 하지도 않으시고

'가서' 전하라.. 고 하신다.

그것은 '구원' 만이 모든 것의 '본질'이심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시고

그 하나님의 펄떡이시는 생명의 에너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랑하시는 자들이 채워져

이 땅이 천국의 모형이되고

천국이 그런 경험을 한 자들로 그득 차는

그 놀랍고 경이로운 장면을 보시고자 하는

그 목적으로 우리를 만드시고 이끄시고

놓치 못하시고 안타까워 하시는 것이시다.

 

 감사하다.

감사하다.

구원 받음이 감사하고

구원을 깨달음이 감사하고

구원을 그리도 쉽게 이 모진 자에게 허락하시었었음이 감사하고

늘 구원의 생명력으로 채워주심이 감사하고

그 감사함을 느낄 수 있음이 감사하다.

적용

1.  아들. . 구원의 감사함을 이 기회 통하여 더욱 체험케 되길 원한다.

  고난이 유익이다.

 유익은 주님 앞으로 더 갈 때만 이루어진다.

 기도하는 아들, 성경 읽고 묵상하는 아들

 그래서 인생이 복있어 지는 아들이 되길 바란다.

 모든 고민과 갈등, 주 안에서 해결되길 빈다.

 

2. 갇혀 있는 자.

 세상의 모든 갇혀 있는 자들.

 고민과 갈등에 갇혀 있고

 현실의 상황에 묶여 있는 자... 그러면서 하나님의 자녀될 자들이

 모두 주님 앞에 어서 나와 해결받는 기회가 되길 기도한다.

 나 ,

 오랜 묶임 풀려날 것이다.

 믿는다.

 감사하다.

 

 

3. 구원에 대하여 감사하자.

 기도로 그리하자 .

 묵상으로 그리하자.

 

4. 성경 3장 읽겠다.

 여유되면 더 읽는다.

 깊게 묵상하며 읽는다.

 

 

 

기도

 주님.

오늘은 갇혀 있는 자와 그럼에도 자유로운 자에 대하여 묵상합니다.

갇혀 있는 것은 몸이지만

갇혀 있는 것이 정신까지 일 수도 있는 게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갇혀 있어도 영혼이 자유로운 것은

하나님의 덕입니다.

갇혀 있어도 상황조차 주님 뜻대로 자유로울 수도 있는 것도

주님의 뜻이 맞습니다.

주님.

구원해주셔서 감격스럽습니다.

주님이 구원해주심이

내 영혼의 구원이고

그것은 내 안에 생명의 에너지가 넘치고

그로 인하여 삶이 자유로움을 의미하는 것임을 압니다.

그게 삶에서 하나씩 체험되어지고

주님의 뜻이 제 삶의 방향을 이끌어 가고 있음을 압니다.

주님.

감사하니 당신의 그 구원의 뜻과 의미와 이끄심과

당신의 임재하신 그 놀라운 충만함이

제 게으름과 제 무지로 잊혀지고

제 원치 않는 비교로 인하여

망각되지 않길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여.

이 놀라운 평화가 감사합니다.

이 놀라운 축복이 기쁩니다.

이 구원의 감격이 놀랍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시여...

제 자식들, 제 아내, 제 식구들..

이곳에 오시는 모든 분들..

우리 기도하는 대한 민국 백성들..

아직은 모르지만 곧 영접할 친구들...

우리 북한의 동포들..

세상의 모든 기독교인들..

모두 구원의 감격으로 사는 자들 되길 소원합니다.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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