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사랑의 약속 ( 벧후3:8-13 ) 본문
제 3 장 ( Chapter 3, 2 Peter )
모르는 사이에
봄은
어느새 이처럼
우리 가까이 와 있었습니다.
그 차거운 겨울 바람도
버들 강아지가
수놓는 이 계곡을 바라보니
아주 멀리 있는
옛 기억 들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은 이처럼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합니다.
주님의 시간은
더욱
그 분의 뜻이겠지요..
주님은
나에게 말씀하지는 않으셨어도
그 분의 약속대로
세상은
또
봄의 기운으로
이리
세상을 채우고 있습니다.
약속대로......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나..
사랑받는 자.. 맞다.
'사랑하는 자야' 그러신다.
예...
참 다정히도 부르신다..
사랑하는 사이는 시간의 흐름도 다르다.
한시간이 너무도 짧고
못보는 몇 시간은 몇년과 다름없다.
시간의 상대적 흐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시간..
가끔 응답의 시간이 길어질 때 우리는 당황할 수 있다.
얼마 전 , 자칫 우리 가족은 깊은 좌절에 빠질 뻔 했다.
확신하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하지만, 그때 응답 받지 못한 상황을 이해시키는 구절이
이 구절이다.
머리 속으로 이해가 된다.
' 우리의 시간과 주님의 시간은 다르다. '
머리로는 그렇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 응어리가 풀리지 않는 듯할 때가 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면 모든 단점조차도 다 이해가 되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깊어 갈 수록
하나님에 대한 사모가 깊어갈 수록
돌아보아 말씀이 놀랍게 이루어졌던 경험을
깨닫는 시간이나 빈도가 늘어갈 수록
내 인생에 성령의 임재가 느껴지는 시간이 늘 수록
말씀은 이해가 되어 버린다.
말씀이 가슴 두근 거리는 약속으로 체험될 때가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저도 사랑합니다. 주님.
주님이 그러시다면 그러시는 거 맞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괜히 가슴이 두근 거리네요.
희망이 스물 거리며 가슴을 칩니다.
감사합니다.
기쁘게 기다리지요.'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체질이라..
개역개정판에는 '물질'
NIV에는 Element 라 나온다.
무엇이라 표현 되든간에
체질이 풀어진다는 개념은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막연히 이해가 되더니
그림이 스치고 지난다.
육신의 장막.. 이 '체질'
육체의 껍질... 이 '물질'이
하나님의 날이 임하며
감히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 마지막 날에 '불'로 세상을 심판할 때
우리 기독교인 들은
같은 불이라도 뜨겁지 않은 '감해진 불'로 태워질 때
육신의 껍질 - 실제 든, 우리를 그리도 괴롭히는 육신으로 대표되는 정욕이나 죄악의 실체이든-이
SF영화의 한 장면 처럼 스러져서 바람에 날라가 버리고
성경에서
육신의 장막 속에 사는 '나'로 표현되는
그 본래의 '나'
주님이 그토록 온전히 만들어 주고 싶어 하시는
그
'나' 만 이 남아
주님이 태워 버리고 남은
새 하늘과 새 땅 - 아래에 나온다-에
우뚝.....
정말 우뚝 ..
홀연히
서 있는 장면이 연상된다.
굳이 불교적 용어를 빌리면 '해탈'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라나?
하지만
주님의 불로써
육신이 불타버리고 스르르 날라가 버리고
본연의 나만 남은 상태.
그게 주님이 말씀하시고 싶은 오늘의 '모습' 아닌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보라.
새 하늘과 새 땅이라 하지 않는가?
주님은 약속을 하셨다 .
약속을 하신다.
그런데.....
위의 환상과
약속을 주신다는 말씀의 약속을 불구하고
왜
지금껏
아직도
그리
크게
감흥이 없는가?
마치,
약속이니
천국이니
불 심판이니
......
모두
멀리 있는
어떠한 말장난의 소산이나
아이들의 유치한 발상 같은가?
그러면서
그것을 건드리면 다치고 말 ,..
그래서 누구도 그런 표현을 하기를 두려워 하는
이중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게
그래서,
누구도 천국을 향해서 간다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하지만
돌아서면 차겁게 굳어 버리고 마는,,
그래서
오늘의 기독교가 그처럼 냉랭하고 자꾸만 식어가는 현상이 벌어지는 ,
그러한 실체가 '약속'에 대한
오늘의
내 분석이 아닐까?
정말 그런 생각이 맞다면
왜
약속은
가슴떨리는 사랑의 상대가 주는 반지가 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천국'이나 '새 하늘'이나 '새 땅'이 그리 갈급하지 못한 이유는
그 보다 더 '절박한 다른 어떤 것'이 있기에 그렇다.
그것은 눈 앞의 문제다.
우리를 정말 중요한,
목숨을 걸고 추구해야할 그 하나님의 약속을 가로막는
그 문제가 무엇인가?
다양하지 않겠는가?
시험도, 직장도,
오랜 상처에 의한 중독의 문제도,
사람을 잡아끄는 육체의 본질적 정욕의 문제도
태만이 주는 게으름도..............
무엇도 문제다.
주님이 약속하신 그 약속보다
눈 앞을 가로막는 것이 너무도 많다.
어찌 해야 하는가?
실제로 정말 중요한 것은
생명의 문제이고
그 생명의 궁극적 약속은
'천국'이고 '새하늘'이고 '새 땅'이며
그 안에 들지 못함은 지옥을 암시하는 것이고
그것은 영원히 타서 죽는 멸망과 사망을 암시 함에도
왜 눈 앞의 것에 가로막혀야 하는가?
진실과 사실이 있음에도
왜 썩어질 위의 것들이 가로막는다고
그리도 쉽게 가로막혀야 하는가?
이야기할 것은 너무도 많다.
하지만 사실이 중요하다.
사실은
그리 오래 유지할 수 없는 우리의 낮은 인내와
자꾸만 잊어 버리는 망각과
아무리 그래도 .. 하는 이 믿지 못하는 의심이 문제다.
그러면 어찌 해야 하는가?
어찌 해야 이 난관을 타개하고
진실이고 진리인 '약속'에 나아갈 수 있는가?
답은 제일 처음에 있다.
사랑이다.
절절한 사랑이다.
사랑에 빠진 자,
온 정신을 투자할 수 밖에 없다.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넋을 빼앗겨야 한다.
사랑이 내 영혼을 불사라야 한다.
그 사랑이 세상의 그것과는 달리
끊임없이 유지되어야 한다.
절절히 유지되어야 한다.
점점 세어 져야한다.
세상의 변덕스러운 그것과 다른 사랑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주님은 살아계시다.
말씀으로 살아계시다.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에 침잠하면
그 말씀이 주시는 영감에 감동하게 된다.
주님의 영감은 인간의 지력이 주는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그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폭이 넓고 지속적이고 은은하며
점점 더 증폭되는 다른 점을 가지게 된다.
말씀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여져 있다고 성경에 나와 있다.
즉, 성령이시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날 이끌어 주시는데
어찌 그 감동을 표현할 수 있고 제한 할 수 있는가?
너무도 크고 놀라운 영역이시다.
그 분은 우리가 노력해야 그제야 오시는
그런 제한적이고 조건적이신 분이 아니시다.
늘 우리 곁에 계시고
'이미 있으신 분'이시다.
그런 그 분을 우리는 말씀이라는
주님이 약속으로 주신
그 계약서 앞에 서기만을 기다리신다.
그리고는 주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을 알려는 약간의 노력을 시작하면
그 분은 그 계약서의 약속 처럼
우리의 영혼에
감동적인 사랑을 부어주기 시작하신다.
그 분은 그러시다.
그 사랑의 증표로 '약속'을 하셨다.
그 약속은 가슴떨리는 일이다.
날 얼마나 사랑하셔서
손가락 걸고 사랑의 반지를 끼우시는가?
약속의 반지.
그 약속은 이제 '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것이다.
그 새하늘과 새 땅이
이제 주님의 사랑으로 절절히 느껴지길 원한다.
날 사로잡고 있는
인생의 이 지긋지긋한 문제들....
죽도록 쫓아다니던 어두움의 상처들.
그토록 힘들게 하는 삶의 근본적 문제들.
어서어서 벗어 버리고 싶은 육신의 정욕들.
이제 그만 훌훌 털어버리고 싶은 비교와 관계의 좌절들..........................
주님은 약속으로 말씀하신다.
이제 얼마 있으면- 천년이든, 하루든 - 주님의 바람이 불고
주님의 불이 이 온세상에 붙어 버리면
믿지 않거나 변질된 자들은 영 벌에 들어가
죽는 것 보다 더한 고통으로 몸부림치겠지만
믿는 우리들에게는
우리의 '고난'의 원흉인 이 엉터리 같은 육신,
즉, 내 모진 인연과 연민과 좌절과 헛된 정욕의 본산인
육신의 껍질이 날아가 버리 듯
내 체질을 성령의 불로 태워 버리시어서
정말 홀연히,
정말 개운히,
정말 날아갈 듯이,
...............
주님 앞에
불현듯
서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오고야 말 것이다.
그것을
주님은
약속을 하신다.
그 약속을
난
굳건히 붙들어야 한다.
그 약속을
내 영혼에 깊이 각인해야한다.
아직은
날 가로 막는
둔한 흐릿함이 있지만
이것을
주님 말씀앞에 내려 놓아야 한다.
주님의 사랑의 그 놀라운 기쁨으로 ,
주님의 약속에 대한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감사하신 하나님
난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말씀 만 들어도
주님 단어만 들어도
내 영혼은 진동을 하고
내 가슴은 방망이질 하고
내 두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나도 모르게 주루룩 흐르길 소원합니다.
주님에 대한 그 격정이
날 견디지 못하게 하여
전하게 하소서.
그 기쁨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정말로 정말로
긍휼히 느껴지게 하소서.
그래서 가르치게 하소서.
이 놀라운 사랑
이 놀라운 기쁨
이 놀라운 가벼움
이 놀라운 평안을 어찌 그들이 알지 못할까..
견디지 못하게 하소서.
특별히 약속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이
내 영혼 깊숙이 각인되길 원합니다.
사랑합니다.
주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의 약속을 받습니니다.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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