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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떠나는 이미 있는 진리의 여행(벧후 1:12-21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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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떠나는 이미 있는 진리의 여행(벧후 1:12-21 )

주하인 2009. 3. 2. 09:37

제 1 장 ( Chapter 1, 2 Peter ) 
 
 

한얼산 기도원의

주일 아침 정경.

성경의 못보던 구절이

영산의 정기어린 공기와 더불어

내 영혼을 속속들이 채우고......

 


   
 
12.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이미 있는 진리.

 

며칠 전 갈멜산 기도원 가니 목사님이 그러신다.

'나사로 묻힌 무덤에서 '마리아와 마르다'가 시킨대로 안해도 나사로는 살까요?'

 

'산다'가 답이다.

이미 살림을 받은 나사로다.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시키심은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실 목적이셨다...라 하셨다.

 

 금일 묵상에서 '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와 일치한다.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장막은 육체다.

장막에서 산다는 것은

육체라는 통속에서 사는 영혼이 '나'다..라는 이야기시다.

아니다.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온전한 '나'라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이 육신에 담겨져 사는 동안, 남을 위해서 산다고 한다.

그리고 그 베드로는 황혼의 삶속에서  그것들을 절박하게 느꼈다.

 

 

  어제 그제.

토요일 일찍 끝나고 집에 들어가니 아무도 없다.

불현듯, 여행을 가고 싶었다.

실은 지난 몇주전 실패한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혼자 해본 여행은 없었다.

내 인생에서..

돌아보았다.

왜 그랬는가?

 

 혼자하는 여행의 끝은 늘 '외로움'일 듯했고,

내 식구들을 두고 가는 것도 너무나 미안했고

아무도 부르지 않는 곳을 가는 것이 너무 처량해 보였고,

돈 걱정도 밀려오고 - 이상하게도 그리 부족하지 않고, 그리 각박하지 않음에도 난,

나에게 쓰는 것을 이리도 두려워 하고 있어야만 했다.   

아마도 아버지의 영향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  하여튼

여러가지 생각이 , 그 생각을 한 수십년간 날 묶어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떠나갔다.

 기차 여행도 고려 해보았지만

예전의 기억으로는 허리만 아팠다.

 그래서 얼른 가방에 몇가지 챙겨 넣고 차를 몰고 떠났다.

 오전 중에 한번 들춰 본

'가평 수락 계곡'과 '아침 고요 수목원'이 생각 났다.

 네비게이션을 맞추고

 물 한병과 과자 한개 사넣고 얼른 떠났다.

들키면 못떠날 것 같은 사람처럼 도망치듯이... 

 

 가며 가며 난 날 돌아보았다.

 

다행이도 영적으로 하나도 부담이 없다.

내가 영감으로 생각되는 현상이 날 채운다.

 

'나와 함께 떠나는 나만의 여행'

아.

하나도 생각하려는 의도가 없이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

그러면서 많은 생각들이 선하게 쏟아져 나온다.

가면서 가면서 '수첩'에 적어갔다.

 우선,  방향이 정확히 어디가 될 지 모르고

어디서 자야할 지 정해지지 않았고

저녁식사도 점심도 내일 아침도 결정이 되지 않았지만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아니, 안하려고 작심했다.

  그 이유는 '원초적 불안'의 실체와 맞닦드리고 싶었다.

어두움이 밀려오고 - 내 나이처럼 - 날 부르는 곳이 없어도

계획없이 살아도

날 근거없이 외롭게 만드는 실체를 한번 보자...하는 심사가 내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외로움과 부딪치는게 무서울 때

내 속에 날 위로하시는 '이미 있으신 하나님'의 존재가

날 편안히 만들 것이란 생각도 불현듯 들었다.

그것은 내 생각의 결과가 아니다.

그냥 그리 든 것이다.

 그래서 갔다.

 네비게이션 인도하는 대로 가다가다

사진을 찍겠다는 의도도 있다.

어두워서 못찍는 피곤한 곳이 오면

커다란 구형 카니발 , 내 차 속에서

가져간 성경과 책 을 통해 묵상과 생각을 깊이 하리라는 의도도 있었다.

 

 한참을 가다보니,

내 눈을 확 스치고 지나가는 팻말이 보인다.

'한얼산 기도원'

 

 아 그렇다.

십여년 전에 청년부들- 너무 적은 교회라서 인원이 두명이었지만 ㅎㅎ-  데리고 갔던

찬양이 뜨겁던 기도원.

우리나라 삼대 기도원 중 하나인 곳.

그 당시

혼란이 극을 달리던 내 영혼에 임하셨던

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내 달란트를 촉발시키며

날 온통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 넣던 곳.....

 실은 오래전 부터 가보고 싶었던 목록 중 하나였다.

 

가평에 한얼산이 있었다.

일단 늦게 들어선 그 곳은 황량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다음날이 일요일이라서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옛 영화는 점차 사라지고

묵은 때 묻은 건물에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리는 예배 소리만 들린다.

겨우 겨우 찾아간 '예루살렘 성전'에 가방을 내리 놓고

성경을 의자에 올려 놓고

정신을 집중하니

연세가 많이 드신 구세대의 목사님께서

열심히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설파하고 계시면서도

말씀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계신다.

     베드로 후서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그러면서 목사님이 순간 하시는 말씀이 머리 속을 뚫고 들어온다.

'무엇보다 지혜를 먼저 간구하라.

 기도할 때 반드시 먼저 지혜를 달라고 해라.

 말씀을 우선 시 하는 지혜.'

   그의 신기한 능력.. 맞다.

 생명으로 .. 맞다.

경건으로 .. 맞다.

 주님의 말씀으로 내 속의 원치 않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누를 때

그 말씀은 신기하게도 날 다르게 할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영역이다.

경건하게 날 만들 것이다.... 순간 꿰어지듯이 내 속에 파고든다.

얼른 수첩을 꺼내어 적어갔다

 

 주님은 하나도 빈틈이 없으시다.

어이없는 행동 - 토요일 갑자기 혼자만의 중년의 여행 - 을 통해

나와 동행하는 여행하게 하시고

여행지를 '기도원'근처로 가게 하시고

거기에서 정말 정해진 말씀을 듣게 하시고...........

 정말

내내 난 말씀 속에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어디 내가 기도원 여행하려 했나?

하지만, 주님은 예배가 끝난 시간 후 한참까지

날 잠들지 못하게 했다.

그 조그만 성전 안에 불편한 잠마져 -침낭은 가져갔다. - 을 들지도 못하게 하시며

주님 앞에 앉아 있음으로도 날 그냥 기뻐하시는 듯

놀라운 평강의 감동이 내 영혼을 그득 채웠다.

 

 

 실은 여행의 다른 목적도 있었다 .

교회 문제다.

너무 적은 교회이라

내 의사로서의 위치가 차지하는 비율이 너무커서

난, 영적 방향이 너무도 달랐지만

오랫동안 마음앓이를 해가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살펴가고 있어야 했었다.

 거기에 찬양을 좋아하는 내 특성 상

일단  적은 교회에 묻혀 가는 게 편하였던 의도도 없지 않았었다.

 너무 생각이 많이 충돌해서 정리가 필요했다.

 일단, 이랬다.

'주님 난, 장단점 비교상 어느 게 맞는 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내가 큰 죄인인 듯 싶기도 하고

 내 영적 발전을 위한 결단인 듯 싶기도 하고

 그대로 있는 것이 성화의 지름길인 것 같기도 하고

 나가서 돌아가도 실족의 위험이 덜한 곳이 답인 것 같기도 합니다.

 도저히 ,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주님이 날 혼내시면 그대로 있겠고

 주님이 가라시면 갑니다. ' 하고 나왔다.

 

 하지만, 말씀으로 날 잡으시고

영감이 날 꽉채워

내 가슴은 해방감으로 터질 듯이 기뻤다.  

 아침에 일어났다.

새벽 예배를 드리는 데

놀라웁게

정말, 놀라웁게도

전혀 피곤치 않다.

이 게으름 뱅이 늦잠꾸러기 주하인이 말이다.

 그리고는 졸리지를 않다.

 아침 세면 후 사진기를 호주머니에 넣고

이곳 저곳을 걸어다녔다.

코를 스며드는 공기의 청량함은 '달다'는 표현이 꼭맞다.

그토록 맞닦드리고 싶어하는 '외로움'의 철저한 실체는 온데간데 없다.

 깨달았다.

내가 걱정하는 실존적 문제,

내가 괜히 불안해 하는 삶의 상처의 문제.

...

이미 있어버려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아무 의미가 없다.

괜한 고민도 필요없다.

괜한 판단과 괜한 걱정도 필요없다.

그냥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누리면 된다.

 생각이 내 어이없는 두 아들에게 미친다.

'그냥 두자.

 내 나이가 되기까지 그들은 삼십년은 더 있어야 한다.

 그 삶의 길이동안 그들은 어떻게 기회가 주어질 지 모른다.

그들은 그냥 하나님이 준비하신 길을 갈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있어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믿으며

그들을 위해 '긍휼한 기다림으로 기도하고'

그냥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간헐적인 지도만 필요할 뿐이다...'라는 것이다.

 

 오늘 베드로의 말씀이 그렇지 않던가?

 

내 장막에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도 회한성 발언을 한다.

그럼에도 그는 사는 이유가 그들을 일깨워 이미 있는 하나님을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하는 게 그 목적이란다.

 참으로 이해가 잘된다.

 

 

 근처의 허름한 식당에서

주인과의 대화와 더불어

한얼산 기도원을 찾는 기독교 인의 수 감소에서

저물어 가는 이 땅의 기독교인의 힘을 아쉬워 하다가

다시 11시 예배를 위해 산으로 향했다.

기다리는 동안

숲속에서 잘 정리된 돌 계단 위에 앉아 성경을 읽음은

내내 행복이었다.

위의 사진은 그 무릎에 앉은

내 영적 충만감을 찍은,

노력끝에 얻은 사진이다.

 

 놀라운 은혜와 더불어 연세드신 목사님의 예배 인도를 마치고

아침 고요 수목원을 향했다.

아직은 철이 아니라서

그곳을 꾸며놓을 수많은 꽃들의 향연을 가슴설레이며 기다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급작스러운 여행이었고

세상이 추구하는 방향과

정 반대이지만

난 조금은 떨어져서 관조하는

내 영혼의 여행을 즐길 수 있었고

아주 많은 생각으로 날 채우고 돌아왔다.

 

새로운 월요일.

차이가 없는 월요일.

하지만, 난 조금은 더 차분한 가운데 맞이하고 있다.

 

주님의 나에게 임하신

이미 있으신 뜻을 가만히 관조하며.......

 

 

 

적용

 

1.  가만히 있겠다

 특별히 내 식구들에게 그리하겠다.

 기도하며.

인내하며

 

2. 아버지 학교 가겠다.

 내가 남을 위하는 길은 중보하는 것이다.

부족한 나에게 예비된 중보의 장소가 아버지 학교다.

 

3. 아이와 더불어 성경 일곱장 읽겠다.

 

 

 

 

기도

 

주님

감사하여이다.

언제나 있으시고 앞으로도 있으실 주님

그 주님을 생각하며

가만히 기다리겠습니다.

남을 위하길 원합니다.

 그런 마음을 주소서.

특별히 내 아는 기쁨을 남에게 전하길 원합니다.

흔들림없는 든든함을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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