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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님의 워낭 소리 ( 요 10:1-6 )

주하인 2009. 3. 8. 09:59

제 10 장 ( Chapter 10, John )

 

 

아무소리 듣지 못하는

야생이길 원치 않나이다.

주님.

 

주님의 우리 안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양이길 원합니다.

주님.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 문으로 들어 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인도

    하여 내느니라 
 

 양의 우리란 무엇일까?

기독교,

교회로 표현되는

한번에 온전히 구원받고 말았다는 일회성 개념인가?

 다른데로 넘어가는 절도요, 강도가 있다는 것을 보아

교회에 이단이 넘어 들어가는  그런 모습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문지기가 맡아 두었다가

그분, 예수님이 양의 목자로 오실 때 문을 열어 준다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분들이 구원을 온전히 얻지 못했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그제야 양이 주님의 소리를 듣는 다니.. 그것도 맞지 않는다.

천국으로 생각하면, 양의 우리는 더 더구나 맞지 않다.

 

 문지기는 또 누구인가?

성령이신가?

성령이 예수님 보다 먼저와서

예수님께 맡긴다는 이야기도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그렇다면 '천사'인가?

그럴 수 있다.

천사가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지만

성경을 보아서는 '신약'이후의 역할이 그리 뚜렷하지 않다.

 어쨌든 '양의 우리'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넘어갈 일이다.

 

 뚜렷지 않지만 묵상 중 느껴지는 생각은

양의 우리란

십자가 로 인하여 구원 받은 백성,

혹은 구원받을 백성이

이 땅,

사단의 영역 안에서

구워지고 삶아지고 연단을 받아서

정결해지고 천국에 가는 과정 동안

늘 자유 의지에 의하여 오염되고 실족될 위험에 있지만

주님은 보호의 울타리를 치고

그들의 가는 인생 여정 동안

조심조심하며 쉼을 주는 틀이 아닌가 그런 생각.

 

 주님이 단 일초라도 우리의 영혼에 쉼없이 보호하신다면

우리가 언제 정결해질 연단의 기회를 맛보겠는가?
 돌아보아도

이치적으로도

담굼과 달굼은 원리다.

철이 강해지고

금이 제련되기 위해서는

연단이 원리다.

 빛도 파동이다.

사는 원리도 즐거움이 있으면 슬픔이 있다.

소리도 파동이다.

환자 분들의 회복도 굴곡이 있다.

좋았다 정체되었다가 .. 반복하면서 결국 회복된다.

파동이 원리다.

 

 이 굴곡의 저점에서

양같은 우리 들,

미련하고

무엇하나 할 수 없고

무엇보다 악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보다는 무지하고

어찌할 수 없는

양같은 우리 들은 보호 받아야 한다.

 다시 새 날이 오고 어두움이 사라지고

바닥에서 올라오고

지침을 회복하여 힘찬 걸음을 내딛어

주님 계시는 그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 곳에 가기 위하여

주님이 다시 힘차게 인도하실 때까지는

양의 우리에서 쉬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쉬기 위하여서는

이 우리 안에서 거하여야 한다.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단의 세력에

양이 미혹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고 나면

주님이 오신다.

문으로 오셔서 양을 부르신다.

그냥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양의 이름을 부르신다.

그 이름 하나하나를 각각 부르신다.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

모두 의미가 되어진다.

그렇다. 

모두의 개성없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모두 '자기'의 하나님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가 그리도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있다.

'이름을 불러준 순간

 그는 나의 의미가 되었다.'라 한다.

데일 카네기의 글 중에

자기 존중감이 사람의 가장 큰 욕구 중의 하나라 한다.

이름을 많이 기억하는 사람은 성공하는 사람이다.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그 사람의 가치감이 살아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존재감이 없다 한다.

존재감이 없는 자는 이름이 불리워지지 않는 자다.

 '강호순'이나

연쇄 살인범의 유일한 동기가

이름이 불리워 지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그들은 지옥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비록 그들은 왜곡된 욕구이고

그 바탕에 인격적 파멸이 바탕이 되어 있지만

이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아준 다는 것에 대한

인간의 존재족 욕구를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죽으면 썩어져 버릴

나랑은 아무런 상관없는 물질적 유한한 존재의 불특정 다수에게

이름을 불리우는 데도 그리

절정의 기쁨을 느끼는 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각각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신다면

그 얼마나 대단한 영광이겠는가?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와 하나가 되어 시간과 공간을 같이할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보고 만나는 소 우주와

그가 경험하는 소 우주가 만나 하나로 교통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의 영역이 더 넓어져 가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의 기쁨을 유발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런,

나 같이

엉망인 자에게

주님이 이름을 '각각', 개별적으로 불러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 분은 온 우주를 만드신 분이시다.

그러한 그 분의 세계와 하나가 될 기회를 얻는 것이다.

 

워낭소리라는 영화가 힛트를 치고 있는 모양이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스토리는 알고 있다

 40살 먹은 소와 노인의 우정.

그들은 워낭 소리로 대표되는 시간과 공간의 하나를 누리고 있다가

드디어 이별의 시간이 되는 것을

진솔하게 보여 주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본질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하기에

그들로 하여금 숙연하게 하는 것이다.

얼마나 유지될지 의문이지만...

 

그러나,

주님이 내 이름을 부르신다.

그리고 인도하신다.

난, 양이요.

그 분은 인도자시다.

그 분은 그냥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시다.

양의 무리를 인도하시되

나를 개별적으로 불러 인도하시는 것이시다.

난 무리이되 그 분 만의 워낭소리를 듣는 '양'이다.

예수님으로 모범을 보이시고

성령으로 도우신다.

모두에게 개별의 하나님이신 놀라운 비밀이시다.

 

 가다가 쉴 때가 되어

내 지력과 능력이 그 분 소리를 들을 힘이 부칠 때

굴곡의 바닥에 내려설 때

쉬어야 한다.

쉴 때는 또 천사가 날 보위한다.

 

오늘은 주일이다.

본의는 아니지만 당직을 서서 아침 예배는 드리지 못하지만

주님이 보호하실 것이시다.

오후 두시에 병원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 분의 워낭소리가 기대가 된다.

 

 

 

적용

 

1. 외우겠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인도

    하여 내느니라 

 

 

2. 주님의 소리를 듣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

  세 미한 소리이든, 확실한 소리이든... 주님 응답하소서.

  나에게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3.  오전 금식 하겠다.,

 아까 아까 마음 먹었다.

 지금 성공했다.

 

4. 교회 문제에 대하여 ..

   인도하소서.

   주여

 

5. 성경 일곱장 읽겠다.

 

6. 당직 설 때 최선을 다한다.

 친절하겠다.

 

7.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하여 묵상한다.

 

 

기도

 

 

주님

우리에서 보호하셔서

우리의 의지만 있다면 강하게 붙잡으셔서

실족으로 부터 보호하시고

내 이름을 부르시어

날 인도하시는 주님.

그 주님을 감사드립니다.

그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 주님, 나의 주님을 기뻐합니다.

오늘 하루

강력히 잡으소서.

주님의 소리를 듣는 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부족하지만 그리하소서.

종이 울리듯

주님 내 귀를 울리시거나

내 영혼을 울리소서.

 

예수님

감사하며 기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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