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주께서 경건하다 하실 때까지(벧후 2:1-9 ) 본문
제 2 장 ( Chapter 2, 2 Peter )
한얼산 기도원
주일 예배 중.
쪽문으로 들어오는
한줄 기 햇빛은
신선한 공기와 더불어
참으로 행복케 했다.
성경에서 뿜어져 나와
내 영혼을 흐르며
나로
깊은 은혜 가운데
머물게 하는
이
성령의 충만한 전율이여........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경건이란 것이 무엇인가?
도덕적 올바름 만을 이야기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불교나 이슬람교에 경건한 사람이 더 많고
세상에 불신자 중에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경건한 자는
주님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도덕적으로 바르지 않아도 경건할 수 있다는 이야기 인가?
오늘 날 매스컴에 떠도는 비 양심적인 기독교인의 행태도
모두 경건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믿고
도덕적으로 최선을 다해 사는 자는 경건하다고 할 수 있는가?
바리새파는 경건하다고 할 수 있는가?
경건의 모양새는 있으나.. 라는 성경구절이 있다.
모양새 만 있어서는 안되기에
마음 깊숙이 정결해진 기독교인을 '경건'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
주님을 믿으면서도 수도 없이 올라오는
이 경건치 못한 스스로의 행동이나
중독적으로 반복되는 수치스러운 은밀한 죄들은
어찌 한단 말인가?
경건의 모양새도 갖추기 위해 죽도록 고생했는데
내면마져 정결한 자를 경건하다고 하면
과연 죽을 때까지 경건할 자 , 얼마나 될까?
가능할까?
경건은 어디까지가 경건일까?
어디까지 이르러야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주께서 경건하다 하시는 자'가 될까?
..............
..............
분명코
이렇듯 쉬울듯한 뉘앙스로 '경건'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곳곳에 경건에 대하여 써져 있는 성경을 보면서,
경건은 '주를 믿는 자' 들에게만 해당하는 개념으로
이루기가 쉽지 않은 경지이지만
그리 어렵지도 않은 경지를
말씀하시는 것이 틀림이 없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렇다면 위에서 질문과 독백의 답을 열거한 사실 중에
간과된 것은 없는가?
있다.
늘 그렇지만
기독교는 '타력 종교'라는 사실이 기본이다.
위의 생각들은
주님을 시험자로 생각하고 홀로 걸어가는 수도승의 개념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타 종교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주님은 꼭두각시로 세운 것만 다르지...
우리에게는
주님 예수님의 깨끗게 하심이 계시고
주님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계시다.
주님 하나님의 놀라운 넓이의 사랑이 있으시다 .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경건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경건하기 위해 말씀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과
'주님의 임재감'을 느끼기 위한 영적 민감성과
' 말씀이 이루어져가는 내면적 체험'과 그에 필요한 시간 뿐이다.
경건의 '과정'이다.
말이 어려운가?
주님 앞에 경건한다는 이야기는
매일 같이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해도
주님 말씀으로 날로 이겨나가려는 결심과 노력과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음으로 변해가는 현상을 가진
영적인 기독교인이면 '경건'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둘째,
너무 쳐지는 느낌이 없지 않아
우려와 더불어 아주 적은 조건(?)을 제시했다.
' 아침에 일어나 성경묵상하자.
기도원 가라.
운동해라.'...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내린 권고성 명령이 지켜지지 않는다.
속에서 '울뚝'하고 성질이 올라온다.
'얘........관둬라......'
다양한 속상함의 이유가 올라오며
난 울화가 올라오는 것을 참고
차를 몰고 나왔다.
'왜 이리 성질이 올라오지?
아이는 큰 잘못은 아닌데...'하면서도 속이 상함에
마치 내가 딴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래.. 오랫동안 익숙했던 내 분노의 유형이 이것이다.
통제에 따르지 않는 것에 속상해함과
그러면 다양한 이유로 화가 밀려오고
아침의 경건함은 멀리 사라지고
난 좌절에 빠지면서 그게 또 화가 난다.
왜 그럴까?
운전을 하며 합당한 말씀을 찾으려는 마음 속의 시도를 되풀이한다.
겨우 가라앉는다.
그래도 다행이다.
예전같으면 불같은 성질이 '확'하고 올랐을 것을...
어쨋든 주님을 이유로 선한 싸이클을 돈다.
이것이 '경건'한 것 아닌가?
주님을 이유로 왜인지 모를 속상함을 이겨냈다.
그 이겨냄이 내 의지로 되지 않는 것을
주님을 생각함으로 주님이 이기게 하시고
또 한번 과거 불신의 시절 부터
내 골수를 더럽게 물들여온 악한 사슬을 끊어 버리게 하고
다음에 또 그럴지 모르지만 어찌되었던 간에
한번 두번 자꾸만 주님의 이름으로 사슬이 풀어지다가
화보다는 온유가 점차 내 속을 사로잡을 기회가 많아지고
그런 내 자신이 참 기쁘고 대견하며
그런 나의 평화를 주신 하나님이 좋고 사랑스럽고 감사하고
그래서 자꾸만 자꾸만 선한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런 선함을 보아가면서
사람들이 나의 주위에 살아계신 예수님의 흔적을 기뻐하고
멀리 섰던 자들이 가까이 다가서고
전에는 듣지 못했던 온유하다는 칭찬이 오며
평화가 삶을 지배하는 기본 심성이 되어가는 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경건'이 아닌가 싶다.
아.
지금까지 내가 겪어오는
나의 하나님이 주시는 '경건'에 대한 인식이다.
그런 자에게 시험의 때를 면케 하신다 하신다.
비단, 아이와의 예를 통해서 보듯이
분란이 찾아올 과거의 예에서
훨씬 편안한 가정 사가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 만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이 시험의 때를 면케 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희망의 메시지다.
지금의 현실이 너무도 암담하다.
과거의 그것과는 너무도 다르다.
실제로 금융대란이 회복이 된다해도
숨겨져 있는 '기후대란', '석유대란', '곡물대란' '실직대란'
자국의 보호정책에 의한 '국가간 이기주의'에 의한 전쟁 등... 예견할
종말적 현상들이 산재해 있다.
이 때에 무엇을 믿을 것인가?
더 열정적으로 경쟁에 뛰어들어
다른 사람을 누르고 성공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이제 더 이상 안되니 포기하고 골방에만 쑤셔 박혀 있을까?
그러면서 현실을 피해 인터넷으로 도망이나 다니던가
깊은 우울의 수렁에 들어가 버릴까?
도처를 쳐다보아도 희망이라고는 없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도 보이지 않는 그 분이
내 지금의 답답한 현실을 해결하실 기미가 보이지않는다.
이런 때에 길은 어디인가?
주님이시다.
주님이 믿는 자에게는 그날을 감해주신다고 복음서에 나온다.
오늘은 '경건한 자'에게 시험의 때를 면케 하신다 한다.
꼭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함이라기 보다
인생이 꽉차기 위해서이다.
삶이 목표가 있으면 인생이 든든해진다.
삶의 목표는 허탄한 것이 아니다.
진실한 목표가 인생의 목표다.
진실은 '주님 안에서의 성화'다.
오늘 말씀하시는 주님이 인정하시는 경건의 완성이시다.
불의한 자는 경건하지 못한 자를 말씀하신다.
그대로 둔다.
세상에서 잘되어가는 것 같다.
돈도 많이 벌고
자식도 잘되는 것 같고
성공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성공은 의미없는 모음이다.
죽을 때 가져가지 못할 것들.
썩어져 갈 것들.
영적으로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들.
오직 자신을 위하는 것들.
타인을 위하는 것 같아도 자신의 내적 만족만을 위한
은밀한 이기주의 들........
그런자들은 간섭을 안하신다.
간섭안하면 편하고 존 것 같지만
그것은 지옥을 향한 수순에 다름아니다.
성경에 하늘에 쌓은 보화만이 진짜 보화라 하신다.
그들의 것은 주가 부르실 때
아무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는
오직 땅의 것들일 뿐이다.
남들 좋은 일만 시킬 것들.
....
그러다가 주님이 홀연히 나타나시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할 후회와 놀람들.
그것이 불의한 자들이 가야할 운명이다.
겁나지 않는가?
주의 날은 금방 올 것인데........
경건하자.
경건하기 위해 주님을 놓치지 말자.
매일이 행복하고
인생이 생기 있고
영원을 보장 받고
그 날을 감해 받기 위해
우리 모두 경건하자.
주님 앞에 바로 서려 노력하자.
그게 살길이다.
적용
1. 말씀 일곱장 읽겠다.
2. 기도원 간다.
3. 전도한 분 하겠다.
4. 회개한다.
특별히 아들에게 보인 표정과 언사의 실수를 그러하자.
5. 통제에 대하여 묵상한다.
6. 경건하자.
주님 말씀 앞에 서자.
기도
주님
그렇습니다.
주님을 묵상함이 즐겁도다.. 하는 노래가 귀에서 맴돕니다.
묵상함은 주님을 내 안에 받아들이려는 노력이요
그 노력은 주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기회요.
주님의 평강과 기쁨이 내 영혼에 운행하는 것으로
외적으로 온유와 겸손과 경건의 향기를 피우는 길임을 압니다.
주님
오늘 경건하라 하십니다.
굳이 내 의지적 노력이 아니어도
기쁨이시고 진리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선한 동기가 발휘가 되어
나도 모르게 인격의 향기가 발하게 되는
그러한 현상이 경건이라 알겠습니다.
주님
그러한 경건의 대열에 끼일 기회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더구나 말씀으로
환란의 날에 감하여 질 우리의 행운에 대하여 약속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오직 주님은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다시한번 깨닫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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