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사단이 알려주는 꿀의 진실(렘 23:23-40) 본문
제 23 장 ( Chapter 23, Jeremiah )
조그만 들꽃이
하늘을 받치고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셨다
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27. 그들이 서로 몽사를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열조가 바알로 인하여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교회에서 성장 반 공부 하면서 힘든 것도 있다..
매주 화요일 저녁 마다 모임을 가지고 공부를 하는데
수준이 천차 만별이다.
솔직히 기초적인 부분부터 튼튼히 한다는 목적으로 공부를 하지만
아직 초보신앙인 - 죄송합니다..^^;;-들과 되풀이 되풀이 하려다 보면 힘이 들기도 하다
그러나 과제물에서 '은혜'를 받기도 하고
기초를 다듬어 가면서 마음을 비우고 나니 나름 은혜가 많이 된다.
역시 모든 것 주님의 뜻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1 - 4주 사이에 한권씩 읽어야 하는 과제물 책 중에서
어제는 '영적 전투' (티모시 워너 著) 라는 책을 읽던 중
당연하지만 정확히 정리해주는 글을 읽고 머리를 끄덕였다.
거기에는 사단이 나타난 이유와 시기와 '세게관'등에 대한 이야기로 진행되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닮은 피조물인 인간을 만드시고 흡족해하자
천사장이던 루시퍼 일당이 질투가 시작되고 그 즈음에야 이루어진 것이고
그들은 하나님과 직접 대적할 능력이 전혀 없으므로
그분의 피조물인 '인간 세상'을 공격함으로 주님의 기뻐하심을 막아볼 전략을 세웠다한다.
그리고 그들의 전략은 '속임수'로
그 속임수는 '하나님은 안계시고 인간의 힘으로 다 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고
'우상'을 세움으로 혹시나 영적인 관심을 돌리려는 계책이라 한다.
그 결과 세상은 점차 '물질계'와 '영계'로 분리해서 생각하고
거의 연관이 없는 듯 생활하다가 가끔 예배만 드리는 정도의
2신론 적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세계관'의 문제가 나타나게 되는데
'세계관'의 정의는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적 틀에 관하여 우리가 의식적이나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일련의 전제나 가정(- James Sire ) '으로
쉽게 말해 좋은 시력이나 나쁜 시력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같은 개념이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세계관은 진실로 우리가 믿는 것'이라 한다.
세상을 볼 때
몇가지 세계관이 있는 데
첫째가 '정령숭배적 세계관'으로 미신적 눈이다.
둘째는 '서구적 세계관'으로
거의 오늘 날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눈을 가져서
물질적 세계와 영적 세계가 명확히 따로 분리 되어 있고
가끔 이 자연의 물질 세계에서 영들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기적'으로 인식하는
기능적 이신론자의 개념이다.
그리고 세계는 영적인 요소가 전혀 작용하지 않고
과학적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 생각하는 것이다.
철저한 사단의 전략.
다른 또하나는 '성경적 세계관'이다.
하나님의 영역
천사들의 영역
사람과 사물의 영역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과 사물의 영역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느냐 하는 것을
주관심으로 살아가는 세계관이다.
오늘도 주님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 '말씀'이라는 강조를 되풀이 하신다.
'먼데 하나님이요, 가까운데 하나님이다'
'나는 천지에 충만하다'라고 하신다.
'바알로 인하여 이 백성이 나를 잊게 만든다'고 하신다.
예레미야 서 두달 가까이 묵상하는 동안
주님은 두렵게 하시기도 하시고 안아주시기도 하시고
어루기도 달래기도 ...하신다.
그러시면서 며칠 동안은 ' 나... 나.. 나.. ' '내가 말한다.'...말씀이다..라고
계속 되풀이 되풀이 하시면서 안타까운 반응을 보이신다.
짝사랑하는 애인처럼..
위험한 곳에 내 달리는 망나니 자식 다구치시듯이..
무엇이 문제인가?
위에 사단의 전략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그들은 속이는 자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속아 왔다.
그들은 너무나도 뚜렷한 하나님을 체험했음에도
늘 주님이 안계신 것처럼 바알 쪽으로 치달린다.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의 체험을 하고도
세상은 따로
하나님은 따로 계시는 것 처럼 살지는 않고 있는가?
일요일 예배는 드리면서 영의 세계를 생각하는 듯 하면서도
세상에 나가서는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살지 않는가?
위에서 '서구적 세계관' 이야기와 다름 없지 않던가?
영은 절대로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주님이 보이시는 은혜나 은사를 이해할 수 없는 '기적'처럼 치부하고
옛이야기나 설화처럼 흘려보내는 철저한 '이신론자'의 삶이
우리 현대인의 삶이다.
거기에 '하나님' , '은혜' , '천국', '은사'를 말하는 것은
위험한 신비주의자 치부하고 어이없는 유치원 생각 같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게
믿는 우리 속에는 없지 않던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찌 세상이 이렇게 어지럽고 혼탁할 수 있는가?
그러기에 주님은 그 이그러진 세계관을 가지고
사단에 휘둘리는 우리를 보고 '안간힘'을 쓰시고 계시는 것이다.
주님은 능력이 없으시던 분이시던가?
주님이 모르시는 분이시던가?
당신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변화시키실 수 있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게 하신 것처럼
가장 위험하고 절박한 순간이 아니시면 세상에 직접 손을 쓰지는 않으시는 것이다.
그 분은
이 세상이 너무 사단으로 인하여 혼탁해져가고
주님의 나라와 이 세상이 따로 돌아가고 있는 것 처럼
세상관이 '이신론적'으로 돌아가고 있기에
그것을 경계하시고자 ' 안타까운 경고의 말씀 '만으로
우리의 돌이킴을 권유하고 있으신 것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저 안타까우신 하나님의 외침과 권유에 응답할 수 있는가?
그래서 우리가 올바로 살수가 있단 말인가?
생각을 바꿔야 한다.
믿음을 바꿔야 한다.
'과학 지상주의'적 세계관과 '이신론적'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 세상은 주님의 영향에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인지해야 한다.
주님은 내 일거수 일투족을 간섭하시고 보고 계시고
내 뼈와 및 골수까지 아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분은 '인격적' 하나님이기에
나와 개인적 교류를 하시길 원하시는 분이시고
내 인생은 그 분과 '손잡고' 나아가는 코람데오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그길은 나의 영혼의 회복을 허락하는 길이고
그길은 행복의 길이고
그 길은 기쁨의 길이다.
그 길은 인생을 축복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이다.
얼마 전 ,
신종풀루 탓인가 환우 분들이 많이 줄어서 한가해진 틈을 타
K원목님 방에 갔다가 동료 연배의 의사선생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 분께서는 나를 보면 '느림의 미학'을 아는 사람이라 치켜세우시면서
아침마다 하늘쳐다보고 땅을 내려다 보고
천천히 출근하는 것을 보셨다면서
바쁘게만 전진하려는 많은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도전이 될 것이란 말을 하셨다.
감사했다.
날 알아보셨다.
주님이 기뻐하셔서 만드신 세상이 얼마나 맑게 내 눈에 투영되는지
난 아침마다 퇴근할 때마다
그들을 사진에 담고 그들을 향해 마음을 들어 화살 기도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왔다.
어찌보면 능력없는 자의 소일거리처럼 보이기도 할 것을
저분은 내 뒤의 하나님을 누림을 보고 계셨던 것이다.
참 감사한 것이 이것이다.
40살 가까이 되어서야
그 불신의 세계관, 철저한 이신론자에서
주님의 엄청난 에너지를 받아 첫사랑의 감격으로 전율한 후
내 세계관이 옳게 자리 잡아 가고
진리를 받아 들여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을
확인 받고 있는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주님 영접한 38살 이전은 '죽음의 시간'이었다.
어찌 보면 사단에 농락당하던 나였다.
그러던 내가 이 주님의 철저한 사랑으로 이러한 눈을 가지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사단은 영물이고 절대로 지치는 법이 없다.
늘 넘어지고 깨어진다.
그러기에 주님은 이리 말씀하신다.
' 주님은 가까운데도 먼데도 있다.
주님은 천지에 충만하시다.
그렇다.
그 분은 내 숨쉬는 공기에 충만하시다
그 분은 우주의 궁극에서 온 우주의 생성과 파멸을 주관하시고
그 운행을 조율하시고
우리 지구의 사시사철, 자전과 공전........을 주관하시는
아주 멀고 크고 위대하신 일을 하시는 cosmos적이고 Macro적인 분이신 반면에
그 분은 먼지보다 적은 지구, 그 지구의 바이러스보다 적은 주하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주관하시는 ' 가장 가까우시고 초 Micro적'이신 분이시기도 하다.
그 분은 우주 끝에도 지구 가장 깊은 곳에도 계시는
온 천지 만물에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한 분을 잊어버리고 솔직히 80여년 밖에 살지 못하며
그것도 젊음을 다 공부에 , 돈버는데 쓰다고 막상 살만하며 죽어버리고야 마는
이 허무하기가 그지없는 고기덩어리 육체에 집중을 해서
그 썩어질 통조림 텐트 속에 갇혀서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바보 중의 상 바보'가 아니던가?
그게 사단이 그렇게도 꼬득인 세상이다.
그게 사다니가 우리 '파리'같은 인간들에게
진실이라고 알려주는 '꿀'의 진실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어간다.
살면서 수도없는 죽음의 증상 - 아토피, 천식, 감기, 독감.......................-에 고생하면서 산다.
그러면서도 서로서로 육체를 탐닉하고 남의 자원을 조금이라도 빼앗아
자기 부를 늘리면서 죽지 않으려 운동 열심히 하고
한약 먹고 , 해구신이나 좋다는 모든 음식을 먹고
늙어감을 아쉬워 하면서 '비아그라' 먹고
얼굴 댕기고, 젊음을 과시나 하듯 불륜을 서슴치 않고
심지어는 남자가 남자를 .. 여자가 여자를 .. 탐내기도 하고
막장을 서슴치 않아가고 있다.
이게 '사단'의 '세계'의 끝 무렵이다.
이제 세상은 끝에 다가가고 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진리이시고 감히 엄두를 내기 힘들 만큼 크신 분께
두손을 들어 도움을 청해야 한다.
말씀 앞에 겸허히 엎드려야 한다.
십자가를 죽을 마음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럴 때 주님이 때가 되시면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면서 다가오신다.
그 엄청난 성령의 감동을 체험하고 말씀 앞에 고착되면
우리는 이 죽을 땅에서
주님의 무궁무진한 에너지가 넘치는 '천국 '의 에너지와 연결되는 것이다.
불같은 주님의 사랑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것은 말씀 묵상과 은혜의 체험으로 가능하다.
적용
1. 말씀 일곱장 읽겠다.
2. 불같은 말씀을 체험하고 싶다.
주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던 시절...
자주 불같이 내 마음이 타던 것을 느꼈었다.
너무 절절히 기뻐서 전기가 주르륵 주르륵 흐르던 것 같은 때가 많았다.
이제는 조금 더 뚜렷한 말씀의 임재를 원한다.
어제 저녁 늦게 기도원에 올랐다.
은혜 받으려니 옆에 앉은 분이 찬양도 안하고 양말 벗고 쪼그려 앉고 ㅎㅎ
은혜가 조건에 의해서 흔들리면 안된다.
조금 더 깊은 신앙의 성숙이 필요로 된다.
오늘 찬양집회에서 기대하자.
3. 어디에나 계신 주님을 찬양하자.
먼곳에도 가까운 곳에도...
천지에 충만한 주님을 찬양하자.
4. 내 바램보다는 주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길 바란다.
기도
주님
놀라우신 주님
살아계신 그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사모하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랬습니다.
가끔 저를 보는 사람들이 절보며 묘한 분위기를 말하곤 했던 것이
전 주님의 나라를 볼 노력을 하고 있는
올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서 그랬던 것 싶습니다.
주여.
제 인생이 얼마 남았을 지 더 모르겠지만
주님의 나라갈 때까지
그대로 있지 않고 더욱 더 주님의 나라와 내 삶이 나뉘어 지지 않았음을 믿게되게 하시옵고
저로 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도우소서.
바라옵기는
주님의 편만한 임재를 늘 느끼게 하시고
주님은 먼데고 가까운데고 어디에나 계신 분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불같은 주님의 임재를 늘 느꼈으면 합니다.
주여.
저로 그런 마음으로 세속의 손해도 기쁨으로 받을 수 있도록 도우소서.
모두 주께서 도우셔야 함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하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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