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그만 기다리시게 하자( 렘25:1-14 ) 본문
제 25 장 ( Chapter 25, Jeremiah )
쌍둥이 중 한 녀석이
진료실 들어간 사이
남은
요 녀석 요렇게
다리 하나 올리고
신나게 잔다
외로운 줄도
곧 고난이 닥칠지도 모르고.ㅎㅎ
동생보다
더 크고 건방져 보이네
그러나
주님은
건방지고 외톨이인 우리를
그리 보시지 않고
귀엽게 보실 듯 싶기는 하다
아마도
끝까지 그러실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의 할 일은
어서 어서 제자리로 돌아와
내 있을 자리를
채우는 것일 것이다
2. 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에게 고하여 가로되
예레미야님은 지치지도 않으신다.
계속 외치신다.
3. 유다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의 십 삼년부터 오늘까지 이십 삼년 동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일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 하였으며
23년 동안 여호와 하나님 말씀이
예레미야님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임하신다.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부지런히도 일렀으나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이다.
4. 여호와께서 그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
예레미야님 뿐이시던가?
주님은 다른 선지자들도 계속 보내셨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잠잤나?
다리올리고? ㅎ
아이는 귀엽기나 하지...
당직 방
환우가 없는 틈을 타 기도를 하였다.
'주님을 찬양합니다..'로 시작하여
'주님을 감사합니다...'하던 중
날 구원하여 주신 것이 너무도 감사하다.
(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님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내려오셔서
-'날 위해' 말이다 - 모진 고통을 감수 하시고 모진 모욕과 외로움과 인간적 치욕 등을 다 받아들이신 후
십자가 그 찢어지고 목마르고 지옥의 외로움의 시간을
나를 위해 감수하시고 돌아가셨으니 감사하다.
솔직히 '날 위해'라는 단어는 이해는 가지만 절절히는 아니었다. )
날 위해 또 살아나셨으니 감사함을 기도했다.
그러다가 '나 같은 자'를 위해서 죽으셨다니..
나 같은 자는 어떤 자인가?
난 내 속을 아는데 지금은 그래도 괜찮아 졌지만 ^^; 그 전에는
그 얼마나 추악했던 자가 맞던가?
정말 주님이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심은
원망과 분노와 질투와.........온갖 영적인 추악한 냄새를 참아가시며
날 위해.. 라는 결심을 하시고 끝까지 참아내시는 것이
어마어마한 인내와 의지라 생각이 들 었다.
난 돌아보면 '싫어하는 자'들은 단 일분도 참아내지 못하였었다.
물론, 지금은 아주 조금은 다르다.ㅎ
그런데 그 .. 정이라고는 하나도 가지 않을
누가 보아도 사납고 어지럽고 같이 하고 싶지 않을 듯한 이전의 '나' 같은 자를
참아내시고 지금 이후의 사랑받을 만한 자가 되기까지
인내하시고 참아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하신 것은
도저히 나의 머리 속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분이 그렇듯 날 위해 돌아가셨다면
그 초절한 인내와 끈기를 박수를 쳐 들어야 할 듯 싶다.
하지만, 인내와 끈기라는 게 십자가를 달리실 수 까지 될 '성품'인가?
정말 그렇게 하시기 위해 이해되는 것은 반드시 하나가 있어야 한다.
'사랑'이다.
초절한 사랑.
목숨을 바칠 만큼 절절한 사랑.
나의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영적 더러움을
그리하시지 않고는 되지 않으심을 아시기에 하실 수 밖에 없는 결단.
그게 '십자가의 사랑'이시고
그렇게 하심으로 '성령'이 내려오셔서
날 구원의 삶으로 천국 백성에 맞는 자격을 가질 수 있게하는 유일한 길임을
앎으로서 내릴 수 밖에 없는 결단이다.
그렇다면 그 분 하나님은
나의 냄새를 참아가시면서 사랑을 베푸신 이유는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나의 '장래'다.
그 분은 나 주하인이 냄새나는 자로서 그냥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을
미리 아심이었다.
그래서 내 장래의 향기나는 천국 백성으로서의 성화된 미래를
날 구원하신 그 당시에 벌써 '현재'로 보시고 참으실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 내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이던가?
냄새났던 날 혐오하기 보다는
향기날 나를 사랑해야 한다.
그게 주님이 날 구원하신 이유이신 것을...
시간이 넘치고 넘쳐서 책도 읽고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그러다가 잠시 TV를 켠 것이 붙들린 듯 끄기가 힘들다.
그래서 늦게 새벽 2시 넘어 잠들었다.
하지만 아침 일찍 눈이 떠진다.
일곱시.
더 자려하는데 도저히 잠이 안온다.
예배도 오후 2시에 병원에서 드릴 수 밖에 없는 데
잠시 뒤적 뒤적이다가 일어나 앉았다.
기도하고 성경 몇 장 읽었다.
묵상 구절을 드니
예레미야님이 '23년' , 그 장구한 시절을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하는..................것도 모자라서
이제 백성들을 불러 놓고
한 얘기 또 하신다.
난 입장 바꾸어 그 분 입장이라면 두서너번 이야기 해서
듣지 않으면 속에서 성질이 올라왔을 것이다.
견디지 못하고 정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 무식한 자식들...
사람 말을 못알아들어.
내가 어려운 말도 하지 않는 데 왜 이리 못알아 듣는 거야.
지들에게 나쁜 소리도 아니잖아.
모두 잘되자 하는 소리인데 왜이리..
끝이 보이는 데 저렇게 미련 스러울까?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는가?
어유.. 어유.. 저러면서도 '하나님'소리를 찾는다.
행실은 하나도......................'
하나님의 꾸준하신 임재로 인하여
비록 겨우겨우 참아가고 말은 전해가고 있지만
그들의 그 어리석은 '불순종'과 '우상'을 섬기는 잘못된 믿음이
추악해서 토악질이 나올 것 만 같을 것 같다.
그러나,
23년이나 예레미야를 통해서 - 물론 수백년을 다른 선지자 통해서 더 참으셨고 앞으로도 더 그러실 것이시다.
주님은... - 똑같은 소리를 하시고 하시고 또하시고 또하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하신 마음이실까?
마치 매너리즘에 빠져 돌아올 줄 모르는 백성들과 같이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시는 것일까?
습관처럼 되셔서 아무런 의미없이 소리만 발하실까?
미운 마음 들면 안되니 그냥 자신의 마음을 세뇌시키셔서
'내가 이들을 사랑하는 조물주니까.. ' 하면서 사랑하는 척하실까?
하나님의 사랑은 도저히 짐작을 할 수가 없다 .
겉으로는 경고하시고 두렵게 하시지만 끝까지 토악질 않하시는 것을 보면
그 분의 그 사랑이 이해할 수 없는 크고 놀라움을 알 수 있다.
난 무엇을 배울수 있을까?
사랑이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아니다.
오래 참아 지는 것이다.
토악질 나올 것 같고 성질이 올라오고 차가워 지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조건에 어떻든 그냥 이해하고 받아주는 것이다.
그게 사랑이다.
난 그 분에게 틀림없이 토악질을 유발할 만큼 그리 착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분은 아직까지 날 사랑하신다 하신다.
느낌으로 그렇다.
기도하시는 분들이 그러신다.
연초에 말씀을 뽑아보면 그렇다.
늘 '내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라 하신다.
십자가를 메신 것이 그 증거다.
십자가를 메러 가시기 까지 예수 공생애 33년 단 한번도 흔들림없으심이 그렇다.
나도 그래야 한다.
무조건 참아야 한다.
사랑한다면서 화나고 성질나는 것은 '의분'이 아니다.
그것은 '사단'의 성질이다.
사랑은 '감정'이 달콤해지는 상태가 아니다.
사랑하기에 감정이 순화되어 달콤해지는 것이다.
사랑은 끝까지 참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렇다.
아니다.
나에 대하여도 그렇다.
나를 위해 그 분은 무조건 참으셨다.
나를 위해 그 분은 절대로 토악질 하지 않으셨다.
나를 위해 그 분은 내 모든 아픔을 다 체험하셨다.
나를 위해 그 분은 십자가의 아픔과 모욕과 그 처절한 외로움을 참아내셨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내가 나에대하여서 나려고 하는 실망감도 꾹 눌러야 한다.
그게 사랑이다.
사랑의 눈으로 날 보아야 한다.
조건으로 보면 안된다.
잘할 때만 사랑해준다는 것은 망언이다.
그것은 사단의 장난이다.
사랑하기에 사랑해야 한다.
주님이 날 사랑하시기에 난 날 사랑해야 한다.
주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기에 나도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무조건 참는 것이다.
악취마져 참는 것이다.
미래에 있을 향기를 보고 참는 것이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감되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올바른 사랑에 대하여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내 조건,
내 악취에 상관없는 사랑.
사랑할 대상이 결정되면 무조건 받아들여 감싸는 것이 사랑임을 배웠습니다.
예레미야님을 통한 하나님의 끝없는 시간의 사랑.
예수님을 통한 어마어마한 사랑을 보고 배우게 됩니다.
그 사랑이 날 위함이고
그 사랑이 남을 위함임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렇게도 사랑하시는 것을 미워함이 안됨도 배웠습니다.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도 사랑하기를 배웠습니다.
주여.
간절히 바라올 것은
속에서 가끔 스물거리며 밀고 올라오는 비판과 정죄와
그에 따른 무시함, 분노 등이 사단의 것임을 알았사오니
주여 그들을 성령의 불로 태우소서.
이 거룩한 주일에
주님의 뜻대로 사랑하길 바라는 주하인이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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