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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앞에서 흐르다 ( 렘23:9-22 ) 본문

구약 QT

말씀 앞에서 흐르다 ( 렘23:9-22 )

주하인 2009. 10. 22. 11:29

제 23 장 ( Chapter 23, Jeremiah )

 

 

 내 영혼의 찌꺼기

마음 속의 부유물들을

주님 말씀

그 흐르는 성령의 바람 앞에

털털 털어내고 

다시한번 

주님의 하늘 아래

겸허히 서고 싶다

 

비록 

가진 것 하나 없더라도

주님의 불어주시는

그 바람에 

날 맡겨 버리고

그 흐름이 그려주시는 

내 몸사위 하나 만으로

주님 앞에 영광 올리고 싶다

 

그것이 

내가 

주님께 드리는

유일한 찬양이 될지라도

오늘

주님 앞에

그리하고 싶다

 
 

 
9.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라 내 중심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을 인함이라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특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12.  그러므로 그들의 길이 그들에게 흑암 중에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되고 그들이 밀침을 받아 그 길에 엎드

      러질 것이라 그들을 벌하는 해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여호와의 이니라   
15.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내가 선지자에 대하여 이같이 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우리니 이는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에게로서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 하시니라  
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수요예배 전 얼른 수영을 갔다가 가느라 저녁을 먹질 못했다.

수요 예배를 마치고 아내 먼저 들여 보내고

집으로 향하던 길목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 갔다.

아내는 그 사이 운동을 갔는 지 느즈막히 돌아 왔다.

이제 며칠 안남은 입대 전의 둘째 아들과 성경을 열심히 읽고

찬양을 드리고 나니 마음이 좋다.

 아내와 대화를 하던 중 아내가 '장가계'를 가고 싶다 한다.

막내 처제식구 가는 데 장모님하고 같이...

여행사는 시골에 있는 아내 사촌 오빠가 운영하는 여행사다.

벌써 몇년 째 이 처제 식구 , 우리 식구, 저 처제 식구 끼고 중국을 간다.

일단은 '그러라'했다.

아내는 환기가 필요한 시기가 맞다.

폐경기 우울증 올 것만 같이 아내의 감정 변화가 조금씩 오는 시기에

큰 아들 제대하고 둘째아들 군대가고

그 아이들이 집에서 컴만 하고....

부딪치는 스트레스가 많으리라 생각을 해서

가능하면 아내를 이해하고 덜 자극 적인 말투를 쓰려 애를 쓰고는 있다.

ㅎㅎ

원래 단정적 말투에 '부정적'언사로 늘 먼저하던게

내 오랫동안 습관되었던 말투였었다.

그러니 내 의도와는 달리 얼마나 힘들 들었겠는가?

 그러면서 조심스레이 내 속에서 드는 부정적 생각들을 확인해갔다.

부정적 생각은 이것이다.

' 아니 그 여행사는 잘 안되는 가?

 왜 자꾸만 중국 만 식구들 바꿔가면서 저렇게...

 장모님은 free라지만 그것 '미끼.' 아니던가?

 여행사가 크고 전혀 그럴 의도가 없다고는 하지만

요새 여행사 다 휘청거리는 것 사실이고

울며 겨자 먹기로 여행 팀을 조직해서 운영해야 하는 사업 특성상

가족들을 끼워넣으면 머릿수라도 채워지니 그런 거 아닌가?
 그렇다면 언제까지 중국 만 저 여행사 통해서...

가족끼리 너무 유대관계가........'

솔직히 이런 생각은 '유치한 생각'임을 안다.

 반대로 생각하면

' 가족끼리 어려울 때 도우면서 살면 얼마나 좋은가?'

' 장모님 힘 들고 낙도 없으실 텐데 따님들, 조카 잘 두어서 호강하시네... '

이런 긍정적 생각은 얼마나 좋은가?

마음도 편하고 기왕에 쓰게 될 돈인데..

수년간 중국 여행간다는 것 한번도 막아서 성공한 적은 없다.

솔직히...ㅎ

 이제 은혜의 시간이 길어진 탓인가?

내 영혼이 조금은 더 물러진 탓인가 보다.

훨씬 빨리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아내와 대화를 시도했다.

'내가 이런 생각인데... '

아내는 전혀 의외라는 듯 이야기를 한다.

이해가 간다.

그러면서 난 정확한 내 마음과 더불어 '위로의 여행'이니 가족끼리 잘다녀오라고

멋지게 말했다.

 

 오늘

여호와의 '말씀' 혹은 '말'이라는 표현이 수차례나 되풀이 되어 나온다.

예레미야님은 그 말씀에 얼마나 전율하는지

뼈가 흔들리고 포도주를 취한 듯 격렬한 반응이 느껴짐을 고백한다.

그게 무서워서이든 감동의 전율이든..

 그러면서 17절에도 '여호와의 말씀'이야기는 나오지만

그것은 '자기 마음'에서 비롯된 '착각'이라는 의도라고 하신다.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으신가?

오늘 날에도 '주님의 뜻', '주님의 응답', '주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으로 인하여

수많은 은사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이야기를 거론하며

많은 오류를 뿜어내고 있지 않던가?

신앙생활하는 개인들은 또 아니던가?

기도하고 받았다며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는 없지 않던가?

그러면서 잘못된 결과에 대하여 오히려 주님을 원망하는...

 그것을 보면서 많은 혼란을 겪는 것이 사실이다.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마음'의 장난인가?

사람들은 살면서 많은 상처를 입고 큰다.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분들도 많지만

오늘 묵상에서 처럼 잘못된 사단의 장난에 혼란에 걸리는 사람들 중은

 유난히 상처를 크게 받은 사람이거나

감성이 민감한 사람들은 그 상처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영상을 '응답'내지 주님의 말씀이라 착각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어제 묵상에서 '내 진료실에 걸어놓은 액자'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사람들의 인지능력의 한계에 대하여 절실히 느끼고 있다.

 위에 늘어 놓은 내 이야기는

같은 상황에 대하여 내 마음이 두가지로 반응을 하고 있고

둘 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현재로서는 밝힐 수가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되돌아 생각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선택'이라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오늘도 보라.

주님은 늘 말씀을 주신다.

당신이 선택하신 자손들에게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면 어떻겠니?'...

직접, 혹은 선지자를 통하여

현대에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늘 말씀을 주시고 걸어오신다.

그러함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고

위에 지적한 '오류'의 근본은

'자기 마음'에서 떠오르는 사단적 생각과 구분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과 '사단이 주는 자기 마음의 생각' 사이에서

사단 쪽 생각, 즉 오늘 묵상에서 '자기 마음'이라 표현되어 있는

그 부정적 생각을 선택하는 것이다.

 오늘 묵상 내용 중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실을 긍정적으로 보는 듯하나

실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거꾸로 보고

자신의 마음에 편한대로 생각하고 싶어하는 '부정적 생각'이다.

진실을 부정하는 것이란 말이다.  

 즉, 선택을 잘못하는 것이다.

 문제는 영적인 것 혹은 심리적인 것은 '선택'을 하는 순간

그 다음의 문제는 내 의지와는 별개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감정이 변하고 자꾸만 '화'나 '갈등' 쪽으로 나가거나

선한 평안의 방향으로 마음이 쏠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선택'을 어떻게 해면 제대로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바보인가?

나는 부정적 생각이 유치한지 몰라서 자주 화를 내는 쪽으로 쏠려가던가 ㅜ.ㅜ;;

'자기 마음'으로 대표되는 부정적, 사단적 사고를 선택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밀림에 의해서 '자동적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것은 왜인가?

오랜 훈련탓이다.

역기능 가정에서 성장했던 나는 원망과 분노와 갈등을 스스로 훈련시켜왔었던게

그 부정적 선택이 잦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훈련 보다 더 깊은 이유는 사단은 '영적 영역'이란 이유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지만 우리가 부정적인 선택을 하도록

자꾸만 잡아끄는 힘이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호흡하고 숨쉬는 이 대기에서 늘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담의 원죄 탓이다.

 하나님이 '영'이고 하나님이 '선'이듯이

사단도 '영'이고 사단은 '악'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분이 진리이심을 인정하는 우리는

사단이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고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늘 '선'과 '악'의 사이에서 '선택'을 할 기회를 주어질 수 밖에 없으며

그러한 선택이 이루어질 때마다 점점 더

선이나 악 사이에서 우리의 영혼은 익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난 자주 '선'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해왔고

그 선택이 쌓이면서 어느새 내 속의 부정적 성향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선한 선택 - 실은 대부분은 물질적, 현실적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쪽이다. ^^;; - 을 하면 할 수록

마음에는 평강이 쌓여가고

그 평강이 그리워서 자동적으로 더 선한 선택을 하게 되어갈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다시  '선택'을 늘 옳게 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위의 묵상구절에서도 '좋은 것 만 같은 거짓선지자들의 말'은

부정적여 보이는 무서운 예레미야님의 말씀보다는

훨씬 '하나님의 말씀'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사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영리하다.

'선택'이 늘 쉬운 것 만은 아니다.

 문제는 선택을 하되 어떤 기준으로 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좋음직하고 그럼직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 만은 아니지 않는가?

위에서도 보듯이..

 그러기 위해 우리는 늘 말씀에 고착되어 있어야 한다.

말씀을 자꾸 읽어야 한다.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말씀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개인적 말씀'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큐티', 즉 말씀 묵상을 해야한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하고 아무리 영적체험을 많이 해도

단 하루라도 말씀을 묵상하지 못하면 '사단'에게 넘어질 수 밖에 없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해야할 그 수많은 상황 중에서

매사에 선택이 옳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말씀이시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말씀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영감'이다.

이게 말 장난처럼 들리던가?

오늘 예레미야님의 감동을 보라.

그 중심이 상하고 뼈가 떨리고 포도주 취한 자 처럼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하나님의 감동을 , 하나님의 살아계신 경외감을 절절히 표현하고 있지 않던가?

그렇게 말씀으로 사로잡힌 상태에서의 '선택' 만이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일단,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옳은 선택이 이루어지면

주님은 기쁨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감정의 순화를 주신다.

행복을 주신다.

상황이 하나도 나아진바 없는데 그 분은

아주 아주 행복함을 주신다.

쐬고 싶을 때 불어오는 바람처럼 싱그럽다.

쉬고 싶을 때 주물러 주는 안마처럼 감미롭다.

선택을 옳게 하고 나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저러한 영감의 폭죽이다.

 

 그러고 나면 인생이 바뀌게 된다.

불필요한 에너지 , 즉 부정적 에너지와 싸우느라 소모된

영적 에너지가 필요없게 된다.

성령께서 막아주시고 감동으로 채워주시니

영혼은 넉넉해 진다.

그게 밖으로 표출이 되기 시작한다.

찬양으로 나오게 된다. 

사진이 찍혀지게 되었다.

트럼펫도 불게 되고

시화전도 꿈을 꾸게 된다.

글도 씌여지고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도 이루어진다.

 진료 실적이 늘어나게 되고

못하던 어학도 부쩍늘어나게 된다...............

 

 늘 발전 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 옳은 선택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삶은 그리 녹녹치 않다.

평안하고 부요해지면 마음은 게을러 진다.

그러다 보면 말씀 앞에 절절히 서야할 당위성을 잊어 버리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또 옛 버릇이 스물거리고 나온다.

마음은 뒤죽 박죽 , 곤죽이 되어 간다.

이전의 그 끔찍하던 지옥도가 내 맘에 펼쳐지려 한다.

아침은 늦어지고

마음은 불안해진다.

주님은 감동이라고 그리 외치던 그 외침이

어느 순간엔가 '그랬었던가'하는 무감각으로 바뀌어간다.

 

참으로 어리석은 '나'임을 느낀다.

주님의 은혜와

그 말씀의 눈물나는 감동과 기쁨이

얼마나 되었다고 이리도 잊혀져 가고 있단 말인가?

오늘

예레미야님의 그 절절한 말씀 앞에서의 '전율'이 새롭게 느껴진다.

그 감동이 너무도 부럽다.

나도 다시금 말씀 앞에 더 겸허히 서야 한다.

 

내 영혼의 찌꺼기,

마음 속의 부유물들을

주님 말씀,

그 흐르는 성령의 바람 앞에 털털 털어내고

다시한번

주님의 하늘 아래 겸허히 서고 싶다.

비록

내 가진것 하나 없더라도

주님의 불어주시는 그 바람에

날 맡겨 버리고

그 흐름이 그려주시는

내 몸사위 하나만으로

주님 앞에 영광 올리고 싶다.

그것이

내가

주님께 드리는

유일한 찬양이 될지라도

주님 앞에 그리하고 싶다.

 

오늘..

 

 

 

적용

1. 말씀의 살아계심을 맛보자.

   성경 일곱장 읽겠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주님의 말씀의 뼈가 흔들림을 체험하자.

 

2. 기도한다.

  기도원 간다.

  말씀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묵상하겟다.

 

3. 말씀하시듯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자. 

 

 

 

기도

 

 주님.

자꾸만 무디어져 가는 제 마음을 들여다 봅니다.

주여.

주님의 앞에서는

늘 감동인 것을

자꾸만 그 감동이 잊혀져 가려 합니다.

너무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절절히 주여

말씀으로 제게 오시사

레마로

충격으로 그리 절 붙드소서.

우리 아들들 그리하소서.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옳게 살아가기가 너무도 힘이 듭니다.

세상의 풍파가 너무도 세어서

갈등이 가족안에 팽배합니다.

주여.

그아이들을 도우소서.

저도 도우소서.

늘 말씀 으로 인하여

옳게 판단할 수 있는 기준으로 절 붙드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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