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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QT

빛이신 분을 보다(요12:44-50)

주하인 2009. 3. 20. 09:09

 

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 오시는 ..

 

주님 만 보길 원합니다.

주님 앞으로 나가길 원합니다.

어떤 마음이던 그렇습니다.

그냥

주님 만을

뚜렷이 볼 수 있길 원합니다.

 

 


44.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마음이 밝었다 어두웠다 밝었다 어두웠다를 되풀이 한다.

늘 밝었으면 좋을 것을..

 왜 이리도 어두움은 끈질기기도 한가?

 

 아들에게 잔소리를 했다.

급한 성격의 나는

잔소릴 시작하면 '많이' 뱉어내고 말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늘 주님 안에서 빛가운데 거하여야 함을 앎에도

어느새 분노와 좌절과 미안함과 걱정......이 슬그머니 밀려오려 한다.

 얼른 십자가 앞에 앉아야 하지만

이 어두움의 끈적임이 얼마나 강한지

손 발이 묶인 듯 꿈적하지 못하고 있다.

주님을 부르고 있지만 돌덩이가 하나 들어온듯

얼마나 무거운지 '주님.. '소리 하기도 힘들다.

 어떻게든 떨쳐 버리려 노력한다.

벌떡 일어나 왔다 갔다 해보기도 한다.

문득, 성경 구절이 생각난다.

'해가 지기 전에 분을 풀라'

 아이를 다시 불러 달래 주고 싶지만,

그것도 또 아이 앞에서 체신이 없는 듯도 하고..

생각이 돈다.

 어두움은 참으로 집요하다.

 

어쨋든 '선택'을 한다.

주님 뜻과 말씀 안에서 내 생각의 흐름을 정리하리라.

외웠던 말씀 구절을 억지로 되뇌어 본다.

마음이 가라앉는다.

 잠이 온다.

잔다.

아침에 눈을 뜬다.

 그래도 무겁다.

아침에 선교회 찬양이 있어 부리나케 일어는 났지만

조금더 영감있는 찬양을 주님께 올려드릴 수는 있는가?

죄스럽다.

 

일찍 일어나 시간이 있는 김에

혼자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마음이 차분해 진다.

역시 아침의 10여분의 고요한 시간은 참으로 좋다.

 

내 죄와 상관없는

주님의 임재감.

 '주님을 사모하는 자들은 죄가 있어도 심판이 없으되' 하는 구절이 스치고 지난다.

그래.

이 땅의 심판을 얘기하시는 지

백보좌 심판을 얘기하시는 지 헷갈리는 구절이긴 하지만

상황에 맞추어 이해가 간다.

 평생을 따라다니던 어이없는 죄책감이 옅어진 게 느껴진다.

주님은 자유롭게 하신다.

 

 매일성경 큐티집을 들춘다.

 45절에 ' 나를 보는 자는 ' 하신다.

 

주님을 보다.

 

무슨 이야기 일까?

나는 금방안다.

어두움이 내 속을 그리도 끌어 붙들어 앉히지만

난 끈적이는 당김을 무릅쓰고 고개를 들어

주님 십자가를 바라본다.

 

  언제인가 좌측 벽에 걸려 있던 십자가를 떼어

소파 앞쪽 TV 위에 십자가를 옯겨 걸어 놓았다

'눈을 들어 주를 보라.

 그를 늘 내 앞에 모심이여' 라는 구절에 합당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십자가 앞에 앉아 있음을 느끼고 싶었다.

 

 아침마다 그 자리에 앉아

가끔은 눈을 뜨고 십자가를 보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묵상하기도 하고

그 십자가 앞에 밀려드는 상념을 내려 놓기도 하고

십자가 앞에 말씀의 구절을 연상하며 쳐다 보기도 하다가

마음이 가라앉으면 눈을 감고 가만히 있기도 한다.

그러면 , 어떤 때는 놀라운 지혜가 떠오르기도 한다.

성경 구절이 떠 오르기도 하고

그냥 이유없이 감동의 눈물이 주르르 흐르기도 한다.

회개의 문제도 그럴 때가 있다.

 

 난, 그래서 주님 예수님의 사랑이 지금까지 마르지 않고 느껴진다.

문제는 마음이 평안해지면

그 밑에 있는 TV가 날 더 잡아 끌어

십자가를 보고 묵상하는 기회가 드물어진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면 어김없이 마음은 곤고해지고

강팍한 옛성질이 스물거리려 한다는 것이다.

 

오늘 .

시의 적절하게 주님께서 '보라'고 하신다.

그래서 말씀이니 어두움의 잡아다님을 자르고 ^^;;

주님을 뵈니  좋다.

 

 주님을 봄은 '빛'을 바라봄이다.

빛은 마음의 구석구석 어두운 데를 조명한다.

어두운 충동,

더 혼내고 큰 목소리 내어 아이를 잡아 흔들어

도덕적이고 열심인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싶은 충동을 내려 놓는다.

 또 어두운 충동.

이 아빠의 피곤한 몸 - 감기 까지 들었는데.ㅎ-을 이끌고 열심을 보이면

모두 열심히 따라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아침이 모두 게으르다...................라는 잡념을 누르고

주님의 말씀 가운데 밝음을 선택하게 하신다.

 나오기 전 방에 들어가

아내를 축복하고

큰 아들의 걷어찬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고 성경 말씀으로 축복하고 허깅하고

둘째의 방에 들어가 혼내고 기죽었을 아이를 축복하고 허깅하고 나왔다.

 남아 있을 아이와 가족의 앙금은 주님께 맡긴다.

 

출근하는 발걸음 앞에

요새 찍어서 올리는 '벗꽃'이 조금 더 화사 해져 있다.

겨울 사과님 블로그에 가니

남쪽 지방은 화사히도 벗꽃이 만개했더만 여기는 아직이다.

 이상하게도 내 발걸음을 옮기는 길목에 있는

그 나무 한그루만 꽃이 달려 있다.

 주님이 날 위로 하시려 하나보다.

세상에 특별한  욕심이 없고

별로 비전을 가지고 아웅할 거리가 없으니

주님이 나에게 주신 몇가지 특성이 있다.

 그 중 하나인 '눈의 감성'이다.  

그 눈을 축복하고 어루 만져 주신다.

그래,

그것도 어찌 따지면

주님 앞에 내려 놓고 정결화할 안목의 정욕이 맞을 수도 있지만

주님은 이 어찌하지 못할 어리석은 주하인의 심성의 어두운 부분을

위로하고 회복시켜 빛으로 나갈

잠시의 위로로써 '눈의 감성, 안목'을 허락하시는 모양이다.

기쁘게 받아야지.

 

주님.

주님 앞에 올려 드립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보고

주님 만을 내 구주로 사모하려는 노력을 올려드립니다.

주님.

주님의 임재감으로 저에게 응답하소서.

부수적으로 나오는 놀라운 평강으로 절 사로 잡으소서.

주님

제가 가진 아주 조그만 달란트로 주님께 올려 드립니다.

글로 올려드리겠습니다.

사진으로 올려 드리겠습니다.

찬양으로 올려 드리겠습니다.

무엇보다

이 땅에서 관계 속에서 발전하는 인격으로 올려 드리겠습니다.

아직, 부족한게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냥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제 영혼에 들어오셔서

어두움을 제하시고 밝게 하셔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절 이끌어 가소서.

 

부디 원하옵기는

제 입의 어두운 언사로

아이와 가정의 상처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그 아이들.

제 생각보다 훨 좋은 아이들로 인도하소서.

남을 위해 쓰이는 재목으로 인도하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만드소서.

지금 제 어이없는 그들에 대한 오류의 판단을 확실히 꺾으소서.

간절히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적용

 

1. 아이에게 메시지 보낸다.

 

2.  주님을 본다.

 철야 예배 가겠다.

 오랫만에..

 

3. 일찍 끝나는 오후.

 어찌할까.  주여 인도하소서.

 

4. 성경 일곱장 읽겠다.

 

5. 주님 만을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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