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선택과 유다와 강호순(요 13:21-30) 본문
제 13 장 ( Chapter 13, John )
주님을 선택하니
내 영혼에는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샬롬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예수님은
심령에 민망하시다, NIV 로 troubled in spirit 로 ' 영혼에 당혹감 느끼다'라고 나오신 것으로 보아
이후에 행동하시는 동기가 바로 지금 느껴지시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어제 묵상 구절 중 '저녁 식사 중'에 갑자기 느끼시고 행동하시는 것과 동일한 내용으로
그 분 예수께서도 철저히 모든 것을 주님 하나님께 맡기시고 계시며
그의 하나 하나 행동은 마치 아브라함이 그랬고 성경적 위인들이 그랬듯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즉각 행동하심을 보이시는 것이시다.
다시 말하면 그 분은 십자가에 달리실 자기의 운명- 소명 ! -으로 확실히 인식은 하고 있으시되
그 세세한 타임스케쥴은 주님 하나님 만이 아시고
그 분 예수님은 세세한 행동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하신다는 것이시다.
성경 어디에선가 '종말의 시간은 도적같이 임하고 그 시간은 하나님 만이 아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으로 보아서도 확실하다.
그러기에 다시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아
'시한부 종말론'은 절대로 거짓말이고,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은 '계시 사명자'라는 것은 허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이야기다.
자신이 예수님이 받으시는 그 계시의 특성을 넘어선다는 뜻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또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원리에 대하여 추정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세상과 계약을 맺고 계시다
계약은 최소한의 간섭이시고
모든 일은 인간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 추론은 아래에 곧 나온다.
또한, 인간의 선택에 따라 결과는 결정이 되되
그 결정에는 사단 마져 사용된다는 것'이다.
보라.
유다는 그때까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 마음 속에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자기와 욕심의 노예로서의 자기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그 갈등 사이에서 욕심으로의 선택이 이루어지자
주님 하나님께서 이제 드디어 십자가의 키를 돌리기 시작하시는 것이시다.
그 십자가 프로그램이 돌아가기 시작하는 '키'가
예수님의 떡 조각을 집어 들고 가시는 행동이시다.
주님 예수님은 이러한 거대한 하나님의 원리를 알고 계시는 것이시다.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이 어찌 유다의 마음 속을 모르실까?
마리아 옥합사건 때 벌써 유다에게 찌르신 적이 있으시지 아니하신가?
그러면서도 오늘 '영혼속에 그렇게 당혹하시는 이유'는
어차피 십자가의 사건은 제자의 배반으로 인하여 돌아가실 것은 알고 있으시되
언제든지 유다가 마음을 돌려
회개의 선택을 했더라면 다른 방향으로 틀어져 가실 것을 전제로 하신 것이시다.
그렇지만 결국 유다는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계실 그 예측에서 벗어나지 못하시고
그 상황이 예수님의 영혼을 찢어지듯 당혹스럽게 하신 것이시다.
그 떡을 집어 들고 가는 순간, 예수님의 마음이 읽혀진다.
가슴 아픔, 안타까움, 사랑하는 제자의 실족에 대한 통분......
한편 유다는 그 예수님의 걸어오심을 보며 어떠한 마음이었을까?
아마도 여러 마음이 회몰아 돌면서도
벌써 그의 안에는 어떠한 선택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 나라도 상관없어. 흥.........'
온통 부정적인 생각 뿐이었을 것이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의 한걸음 한걸음은 그의 남아 있는 삶 - 며칠 안되지만 - 동안
깊이 각인이 되어 그 날 그 시간 예수님의 그 발걸음이 머리 속을 울리게 되었을 것이다.
어쨋든 그는 돈을 더 바라는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을 버리지 않고 막바지까지 온 오늘의 그 시간에
사단은 그의 영혼 속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알 수없는 강력한 휘몰아침에 의하여
발걸음을 옮겨 집 바깥으로 뛰쳐 나가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을 읽어가며 '강호순'이 떠오름이 왠일인가?
그의 양심이 작용하지 않는 심성.
그것이 그의 잘못 만일까?
어디서 부터 그의 마비된 양심 -사단이 합일된- 이 시작이 되었을까?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어쨋든 그의 견딜 수 없는 악의 욕구 앞에
그는 자신의 영혼으로 버틸 수 없는 어떠한 행동을 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유다도 그렇지 않은가?
끝까지 돈과 예수님의 제자의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돈으로 선택을 하자마자
그는 사단이 뛰어 들어가 버린 것이다.
이후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도 어찌할 수 없는 양심의 마비된
악인으로 살게 되었을 것이고 , 주님이 돌아가시자 마자
사단이 여유를 두자 자살이란 극단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아침에 비가 오다가 멈추었다.
아내랑 근처 가까운 교회에 갔다.
목사님이 설교하신다.
' 주님 안에서의 자기 정체감'
예수님은 30년을 사시다가 드디어 자기의 정체감을 완성하시고
소명을 완성시키시려고
공생애의 삶을 선택하고나서는
사도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나오셨다.
그리고는 '온전한 자기 정체감'을 알고 '소명'을 완수 하러 가시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 가운데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되며 그것이 자신의 현재 모습을 이루어 가고
어떤 모습으로 죽게 될 지 결정되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 안에서 자신을 인식하여' 온전한 자기 정체감을 가지게 되고
그리하여 주님 안에서 '소명'을 알게 됨으로 살아가는 게
모든 인간 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시라는 것이다.
오늘 묵상과 일맥 상통하는 것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난 행운아다.
비록 늦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올바른 가치관 안에서 나를 정립하고 있지만
주님 만이 나의 소명의 궁극적 가치임을
영혼 깊숙이 인정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나의 선택은 '옳다'고 주님이 추인하신다.
감사한 일이다.
오늘 감사한 주일이다.
계곡같은 길을 걸어 돌아 왔다.
비온 후 개인 날은 너무도 청명하다
물이 맑다.
이상하리 만큼 마음이 좋다.
감기 들어 어제 쓰러져 잠든 피곤한 몸이 날아갈 듯하다.
강변에서 밀려 오는 시골 내음이 좋다.
아마도 내가 주의 날을 주의 날 답게 보내고 싶은 선택을 하자마자
주님이 기쁨으로 내 영혼을 채우시기에 그런가 보다.
죽을 때까지 주 안에서 죽을 내 선택.
주님 감사합니다.
늘 감사할 뿐입니다.
부정의 늪에서 벗어나와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고
그 세상이 주 안에서 누리는 평강의 세상임을 깨닫게 된후
난 늘 감사함을 느낍니다.
감사함을 느낌이 영혼의 평안함의 다른 반증입니다.
그게 감사합니다.
난 올바른 선택을 했고
이제 난 내 인생에 그리 큰 의혹과 당혹감이 없을 줄 압니다.
못살아 왔다는 자책은 절대로 없을 줄 확신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는 게 아니고 됩니다.
참 감사하신 하나님
주 안에서 올바른 정체감을 회복시키시고
이제 소명의 한 가운데,
그게 비록 거대한 일이 아닐지라도
주 안에서 소명을 확실히 찾아가게 해주실 줄 믿기에 감사합니다.
특별히 오늘
비온 후 주일 맑은 봄을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길은 내내 천국의 길이엇습니다.
이제 피어나기 시작하는 새순과 꽃봉오리들이 어찌나 아름답던지요.
주님 안에서 피어나는 우리 영혼 같아서 감사했습니다.
이 기쁨을 알지 못하는 모든 분들을 위해 축복합니다.
그들 영혼을 지키소서.
어려움 당하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들을 이 깊이 든 감기의 육체지만 날아갈 듯한 통쾌함 주시듯
회복시키시고 새순과 새 꽃으로 그들을 낫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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