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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널 끝까지 사랑하리(요13:1-20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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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널 끝까지 사랑하리(요13:1-20 )

주하인 2009. 3. 21. 10:44

제 13 장 ( Chapter 13, John )

 

 

아버지 꽃과 아들 꽃처럼 보이네요.

그리 보아서인지..ㅎ

 

아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란다지요.

아버지는 아들의 바람 막이가 되어야 하고요.

 

하지만

인간 들의 원죄적 속성으로

어디 성한 부모자식 간이 하나라도 있나요.

나의 선의가 아들에게 내려갈 때는

가끔 독처럼 느껴질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역기능 가족들이 너무도 많지요.

 

전, 지금의 병원 생활이 참 좋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로

리더 분들이 보여 주시는 자애로운 부모상을

많이 보거 든요.

그 분들의 공통점이 있으셔요.

주님안에서 말씀대로 살려 몸부림치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잘 큰 자식들을 증거로 보고 있고요.

 물론 그 분들도 단점은 있음을 봅니다.

하지만, 단점보다는 훨 큰 장점이 절 기쁘게 합니다.

 

주님이 전제가 되시면

아버지와 아들은

사진 속의 꽃 같이 될 것만입니다.

결국

저도 그리 될 것을 느낍니다. ^^*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아버지.

 사랑.

 

 엊그제 둘째에게 잔소리 하고 마음이 안좋았다.

그렇지 않아도 순수하고 마음이 약한 녀석이긴 해서 ...

 저녁에 기도원 가서 주님께 많이 내려 놓은 후 집에 가니

아내가 그런다.

 첫애 - 제대하고 온지 얼마 안된다.   이제야 겨우 주님 안에서 순해지는 아버지 탓에

과거에 많이 혼나고 자라던 아이라서 아빠와 그리 사이가 좋지는 않았었다. ^^;;- 가 둘째와 저녁을 먹어가며

충고의 얘기를 했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마라.   헤아려라... '

아이구.

감동이다.

 말씀 앞에 서는 나날이 지나면서

난 인격의 전방위적 부분에서 개선의 리모델링을 진행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걸리는 부분이 많았는데

아이, 특히 첫아이의 입에서 저러한 소리가 나옴은

많은 부분 위안이 된다.

 공감해주는 아들이 대견 스럽다.

아들이 신앙안에 있으니 현실적으로 불가한 가정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듯 해서

주님 안에 있음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내 선택의 올바름을 본듯하여 기뻤다.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나의 주님 안에서의 몸부림이 인정을 받는 간접적인 소리인 듯 하여 기뻤다.

 

 하지만, 늘 나에게는 걸리는 부분이 있다.

아직도 사랑하는 사람들,

특별히 가족들에게  조건에 상관없는 사랑을 보였던가 하는 면이다.

 오늘 주님이 '아버지' ,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이라는 구절이

더욱 마음을 그렇게 한다.

 아니다.

며칠 전 둘째에게 잔소리 하는 것도

일견 '교육'의 내용이긴 하지만

가만히 속을 들여다 보면 아이의 불만족스러운 삶의 태도가

날 답답하게 하는 것이 맞다.

 거기에 내 결점이 급함은 과도한 언어 선택을 하게 하고.....

 

사랑.

 

 정말 진실하고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이의 잘못을 보면서도 - 이것도 내 인지의 흔들림이 땜에 진정한 잘못인지 아닌지도 헷갈린다.

솔직히 세상의 돌아가는 세태에 비쳐, 내 아이들은 뛰어나질 못해서일 뿐이지

절대로 착한 아이들이 맞다. - 이것을 용인해야 할지,

지적하고 고쳐야 할지 순간 헷갈린다.

 사랑에 그 답이 있음을 안다.

사랑하는 자는 태도에 있어서도 사랑하는 자로서 행동할 것이 맞다.

그렇다면 '아이의 가슴에 묻힐 비수같은 언어'를 자제하였을 것이며

실수를 먼저 공감해주었을 것이고

좀더 현명히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난 그러지 못했다.

 아무래도 '사랑'보다는 다른 것이 앞서는 모양이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분의 사랑에 감동하면서

난 하나하나 배워가고 있지만

아직도 진정한 사랑에 대하여서는 배울것이 더 많다.

더구나 주님은 그런 날'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라 하시지 않는가?

아이.

부족한 면이 많지만 이제는 조금은 더 여유롭게 보기는 한다.

하지만, 그 조차 조건적 사랑이다.

내 눈에 맞는 부위만 골라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온전한 사랑을 배우기 위해 거쳐가야할 과정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조건없는 사랑'  '끝까지 하는 사랑'을 배워야 한다.

 

난, 참 다행이고 행운아라 느낀다.

지금껏 많은 시간을 불신의 내 주장으로 살다가

나이 40가까이 되어 주님을 영접함으로 구원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서서히 진실에 가까이 살게 되다가 오십 가까이 되어

성화의 길목에 발을 들여 놓게 되고

삶의 곳곳에서 주님이 진실로 가르치시려는

그 사랑에 대하여 하나하나 깨우쳐 주심을 받아가고 있는 중이어서 그렇다.

내 능력으로는 '사랑'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덕목이다.

더구나 , 온전한 사랑은 그 무게가 태산보다 클 터이지만

지금껏 해오신 나에 대한 그 분의 역사의 흔적으로 보아

이제 가능할 듯도 싶다.

 

 아들아.

가족들아..기다려라.

곧 더 좋은 사랑을 보이마.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예수께서도 정확하게 십자가 사건이 이루어지는 시점은

알지 못하고 행하셨던 모양이다.

 저녁 드시던 중에 '텔레파시'처럼 깨달으시는 것이시다.

 몇가지 생각할 바가 있다.

 

 주님 예수님도 미래에 대하여 모두 다 아시진 않는다.

하나님의 뜻은 너무 정확하게 가르치시지 않는다.

종말론자의 허구.

 

 주님 예수님이 불현듯 '때'가 오셨음을 감지한 후

가장 먼저 하신 것은 식사를 멈춘 것이다.

나에게 가장 힘든..ㅎㅎ

그리고는 팔을 걷어 '세족'을 행하신다.

죽도록 자신의 역할을 다 하신다.

몸소 보이심.

 감정 상 죽기보다 무서운 그 상황에서

주모 같은 자들은 '왜 나를 위안해주지 않아... '라며 온통 제자들에게 '분'을 발휘했을 것을

주님은 낮추신다.

 

 아버지는 아버지다.

죽도록 자식과 가족을 사랑해야할 숙명의 자리이다.

그게 나에게 부여된 사명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식을 사랑함을 멈추지 말자.

계기가 주어지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가족을 지키는 게 아버지의 마땅히 할 일이다.

 

  또한, 깨어 있어야 한다.

주님 예수님은 주님 하나님의 말씀을 식사하시던 도중 들으신다.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몸으로 보이신다.

 다행이도 잔소리 사건 후에도 난 아이와 성경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작년 부터 시작해서 아이와 신약 일독을 마쳤다.

그게 아이에게 자존감을 높인 모양이다.

이제는 내 성질에 상관없이 시간이 되면 자연스레이 같이 읽는다.

 어제는 두려워하고 기죽을 아이와 성경읽고 자연스레이 대화를 나누었다.

말씀 앞에 섬은

가족의 회복에 극적이 부드러움도 주신다.

 난 늘 주님 앞에 깨닫는 자가 될 마음을 가지게 되고 있다.

 

주님 말씀하소서.

아버지가 듣겠나이다.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아이와 난,

죄책감이 많은 편이었다 .

 

역기능 가정의 특성이 이것이다.

혼내고 미안해하고

. ...해야한다...는 '터부'가 많고 못함에 대한 당혹감 ..많고.

삶이 부자연 스럽다.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그러한 잘못된 부분을 깨신다.

이게 말씀의 귀한 부분이다.

내 영혼을 떠도는

오래된 잘못된 '사어死語' 들이

하나하나 물러나고 말씀의 '생명의 언어'로 신비하게 대처되어가는 현상.

내 선택을 통해서 주님의 성령이 말씀을 내 영혼에 집어 넣어 주신다.

 

그 중하나의 구절이 윗 구절이다.

' 주님의 보혈로서 난 깨끗해진 자다.

 하지만 온전히는 아니다.

 매일 같이 씻어야할 발은 남은 자다.'

 

얼마나 귀한 깨달음인가?

보혈로서 온전한 구원을 받았으니 더 이상 회개 필요없다고 하는

구원파들이나 기복적 믿음의 기독교인들이

자꾸만 지을 수 밖에 없는 원죄의 흔적을 가지고

얼마나 스스로 당혹하거나, 아예 마비시킨 양심을 가지고

왜곡 되어 가는 가?

그 자신의 영혼은 모르는 사이, 깊은 죄책감으로 시들어 가

믿는 그들이 우울증이나 분노나 어이없는 죄악이

더욱 많이 생기는 것이다.

 

말씀은 현명하게도 가르치신다.

'발은 더럽다.

그러나, 너희는 이미 깨끗한 자다.

매일같이 닦기는 닦아야 하되 전신은 아니다. '

 

와.

난 아버지로서 조금은 부족한 자 맞다.

아들도 그런 거 같다.

하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죄책감은 별로 없다.

마비가 아니고 자유다.

주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깨닫게 하고 자유를 주신다.

 

어제 저녁 아이와 나는 다시 껴안고 축복하고

아들은 기쁨으로 저녁 늦게 강변으로 트럼펫 불러 나가려는

아버지의 짐을 챙겨주고

자전거에 실어 주며 , 먼지 앉은것 '지'가 ㅎㅎ 닦아준다.

이게 행복이다.

이게 기쁨이다.

주님은 묶여 있을 날 풀어 주셨다.

 

좋은 아버지가 될 자신이 생긴다.

아들은 좋은 아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어제그제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적용

 

1. 주님의 말씀에 더 고착되겠다.

 성경 일곱장 읽겟다.

 

2. 주님 앞에 깨어 있겠다.

 열심히 살아도 결국은 다 똑같아 진다.

 김삼환 목사님의 설교 중 대학 나와도 초등학교 나와도 70살 되면

 다 똑같이 잊어 먹고 노인되면 기저귀 차게 된다 한다.

  주님 앞에 깨어 있음 만이 나중에 남는다.

 

3. 사랑.  조건없고 그 끝없는 이름..

 아들, 이웃, 모든 사람 들로 펼쳐갈 긍휼한  사랑을 간구한다.

 아버지 학교 간다.

 습관으로 가지 않기 원한다.

 사랑을 배우는 기회가 되길 원한다.

 

4.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기다리자.

  난, 기다림을 잘 못한다.

  더 기다리자.

 

5. 온전한 사람 없다.  

  누구나 발을 더럽다.

 불신자는 예외다.

 나도 그렇다. 

 과도한 기준은 금물이다.

 아들도 그렇다.

 이해하고 참고 기다리자.

 

6. 매일 발 닦자.

 영혼의 발은 말씀으로만 닦을 수 있다.

깊은 영적 묵상이 필요하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은 날 위해 끝까지 사랑하신다. ..하십니다.

그 위대한 너그러움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힘이 납니다.

날 죽도록 사랑하시고

나의 잘못을 이해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그 잘못을 통해 회개하고 주님 말씀에 비추는 노력이

조금씩 증거로 보여짐을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금일 묵상은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훈육하십니다.

아버지 .. 하나님이요.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부족한 저의 사랑을 주님의 성령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의 위안도 기쁘게 받습니다.

아버지로 ,  세상의 사회인으로

살다가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수없이 많은 저의 실수를

발이 더러운

발만 더러운 것으로 말씀해주시고

매일 씻으라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전 늘.. 자유롭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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