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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이후(요12:1-11 )

주하인 2009. 3. 16. 11:35

제 12 장 ( Chapter 12, John )

 

 

 

부활은

철장 같고 죽음 같은 세상에서

하늘의 넓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죽음의 부정적 언어에서

생명의 긍정의 언어로

내면의 흐름이 바뀌는 것이다.

 

그 하늘도

때로는 먹 구름으로 흐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곧 해가 날 것이다.

부활한 내 심령에도

어두움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이 있으면

곧 생명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철조망과 하늘.

나사로의 부활

그리고

변함 없으신

곁의 주님.

 

부활은

나에겐

무궁한 생명으로의 탈출이다.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나사로가 앉아 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예수 곁에 앉아 있다.

 

 어떤 상태일까?

즉각적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환자 분들이 회복하는 단계의 그런 모습 같이 느껴진다.

말라있던 겨울 나무가 물이 오르듯

나른한 그의 육신에 어떤 생기가 도는 ..

그런, 그의 나른한 편안함으로

주님 곁에 앉아 있는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죽음 동안의 체험했던 경험을 되새김질 할까?

그는 어떤 경험을 했을까?

천국을 보았을까?

지옥을 보았을까?

 죽었던 그가 살았던 것은 무슨 얘긴가?

 

 나에 대하여는 어떤 의미로 볼 수 있는가?

죽어가던 불신의 영혼

상처 덩어리로 심장 가득히

죽음의 부정적 생각들로만 가득채우고 있던

그 죽음의 삶에서 구원 받고

더 온전한 구원을 위해 성화의 길을 향해 가도록 하신

그 하나님께 분명코 살림을 받았다.

그래서 내 영혼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소록소록 채워지고 있다.

생명으로 채워지고 있다.

봄이 온다.

그 봄에 새싹 돋듯 생명의 언어들이 날 채워가고 있다.

 

 

 나사로는 예수 곁에 앉아 있는 사람 중에 앉아 있다.

죽었다 살아서 다시, 살아 있는 사람 중에 앉아 있다.

 기적을 체험하고 생명의 구원을 허락 받은 나도 역시

일상의 보통 사람들 사이에 서 있다.

죽고 다시 살아나기 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인생의 그런 삶 속에서

다시 내 구원 이후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제 부활한 후 부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야만 할까?

다시 죽을 때까지 나사로는 천국 생각 만하고 살 수 있었을까?

온전한 성화가 이루어져 인간의 칠정오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온전하면 좋지만

기적과 응답이 곧 그 사람의 성화를 의미하지는않을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예수님 곁에 앉아 있음이 중요하다.

사람 중에서 예수님 곁에 앉아 있음이 중요하다.

살아가는 것은 혼자 가는 길이 아니다.

사람 사이에서 사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 손 잡고 가는 것이 다르다.

늘 그 곁에 앉으려는 노력 만이 달라진 나의 자격일 뿐이다.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부활이후의 나사로 묵상처럼

생명의 구원을 받고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내 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스치고 지날 때가 아직도 많다.

 괜히 서운할 때가 있다. 그래

특별히 몸이 피곤한 중년의 때는 그러리라 생각한다.

세상은 점차

나이 든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아지고 있다.

그럼에,

집에서라도 존경 받는 아버지로서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내 모든 것을 아는 그들에게 그것도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자아의 헛된 존중감이다.

아직도 자아가 죽지 않아서다.

그 자아의 허전함을 사단은 교묘히도 공격한다.

마치 유다의 소리 처럼

절묘한 논리를 가지고 밀고 들어오면

괜한 속상함과 허전함이 가슴을 채우려 한다.

 

  아들에게 퉁명스럽게 대한다.  

 아내에게 다정하지 못하다.

그들은 눈치를 살핀다.

...

 

 
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주님은 절묘하게도 그 타임을 아신다.

'저를 가만히두어'

나에게 하는 소리신가?

'나의 흔들리는 자아를 그만 건드려라. 사단아... '하시는 소리인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약하게 보이는 아내와

맘대로 할 듯한 자식과

주위 사람들에 대한 곱지 못한 내적 소리들에게 경고 하시는 듯하다.

 

'저들을 가만히 두어라' '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즉, 예수님이 예비하신 때를 위하여 그들을 이해하고 가만히 두어라.'하시는 말씀인 듯하다.

 

주님이 걱정되셔서 하는 말씀 이신 듯하다.

시선과 머리를 주위에 두지 말고

주님의 곁에 앉아 있는 데 두라 신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밀려 나오는 '유다의 논리'를 제동걸라신다.

 

혼자서 안되니

주님은 이리 말씀하신다.

그래

그냥 두자.

최대한 그냥 두자.

주님이 명령하신 것 맞을 듯 싶다.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참 지독한 자들이다.

 

죽음에서 살아 나온 자를

다시 죽인다.

 참으로 묘한 기분일 텐데

어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온 자를 죽일 생각을 할까?

 


 

11.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나사로는 다시 죽을 위험 성 에 대하여 어찌 생각할까?

나사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어찌 판단할까?

자신이 한 일은 비록 아니어도

자신은 예수님의 기적의 증거임을 당당하게 받아 들일까?

자신은 귀중한 존재임을 이해할까?

괜한 열등감에 사로잡히지는 않겠지?

자신이 주님의 작품임을 귀히 생각하게 되었을까?

 

 어제 목사님 설교에 그런 구절이 있다.

 

' 열등감을 심리적이나 정신과적으로도 일시적인 효과는 볼수 있으나

재발이 많이 된다.

오히려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나 심리사에도 열등감 있는 분들이  많다.

열등감을 치료할 수 있는 온전한 길은

'예수님 안에서 발견하는 소명' 뿐이다. ..라 하신다.

 

 나사로는 아마도

주님의 기적의 증거라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 들였을 것이다.

그러한 기본이 되어 있기에 예수님의 눈물을 받을 수 있는 자 아닌가?

 

난 어떤가?

난 과연 부활이 어떤 의미인가?

난 예수님의 증거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가?

주님을 믿고 날로 발전되는 이 기적의 증거들이

날 통해 예수님을 믿게 만드는 도구로 쓰임을 받고는 있는가?

과연, 난 나 만을 위해 살고 있지는 않았는가?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난 너무 소홀히 생각하고 있지는 않던가?

 

 내 소명은 무엇인가?

내 인생의 나아갈 바는 무엇인가?

이제 그만 주님이 원하시는 소명을

더 깊게 생각할 때는 아니던가?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주님이 날 구원해 주시고

나에게 달란트를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나만을 위해 쓰라 주신 것인가?

 어떻게 써야 하는 가?

어떻게 해야 이토록 승(昇)하는 자아를 누르고

주님 예수님 곁에 앉아서

진실한 사람들과 같이 주님을 드러낼 수 있는가?
 정신을 깜박놓고 흘러가는 세상에 넋을 놓고 있다보면

나도 모르게 '해야할 어 떤 일'에 대한 강박관념에 답답할 때가 있다.

이것은 '나사로의 그것'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무조건 가만히 있는 것은

게을러지려 하는 이 심성을 어찌 제어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날마다 세밀한 음성 속에서

주님의 뜻대로 하나하나 나를 부인해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 수 있단 말인가?

 주님의 은혜 가운데 평안하면

나도 모르게 한없이 나태해져 가는 이 나른함은 어쩌란 말인가?

 

 주여.

이 구분의 틀을 허락하소서.

너무 지나치지 않게

너무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주여.

난 주님의 증거임을 확신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날 보고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내 영혼이 주님의 성령으로 불타게 하소서.

주님 이름 만 들어도 전율하게 하소서.

 

주님

나에게 주신 소명을 다시금 확인하게 하소서.

너무 늦게 시작하였지만

더 이상 늦지 않게 하소서.

그 소명이

반드시 '선교'이거나 '거대한 업적'일 필요는 없지만

그게 아님도 배제하지 않게 하소서.

 

주여.

변하지 않는 하루하루에 당황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 곁에 앉아서

가만히 앉아 만 있어도 좋은

그런 나른한 회복의 하루임을 확신하게 하소서.

 

주여.

남들에게 긍휼한 마음 가지게 하소서.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 실 수 밖에 없던

그 엄청난 긍휼의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주여

터질듯한 사랑을 주소서.

주님

재지 않게 하시고

주님 말씀이면 그대로 따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적용

 

1. 성경 일곱장 읽겠다.

 

2.  주님 곁에 앉아 있는 나사로를 묵상한다.

 

3. 사람 속에 있는 나사로다.

 

4.  나사로는 나사로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는 하나님의 증거다.

 나도 그렇다.

 난 나 자체로 귀하다.

 나는 주님의 살아계신 증거다.

 그것을 잊지 않기를 원한다.

 

5. 식구들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

 아니,, 주님의 뜻이니 그대로 두기로 한다.

 판단하거나 압박하지 않기를 원한다.

 대신 , 사랑하길 원한다.

 

6. 서운함은 사단의 장란이다.

 주님. 깨닫게 하소서.

 주님 이해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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