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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QT

그래도 난 안다(요 12:12-19 )

주하인 2009. 3. 17. 12:16

 제 12 장 ( Chapter 12, John )

 

 

 

흐린 아침여서

매화의 봉오리 터짐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흘래쉬를 터뜨리고 사진을 찍으니

입체감이 살아나고

또 다른 멋짐이 보인다.

 

나귀타고 오시는 주님이

내 마음을

잠시 흔들었어도

성령의 불로

다시

조명하시어 주소서.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축제 분위기가 연상이 된다. 

 영웅이 등장한 후 그를 보기 위하여 인산 인해를 이룬 인파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모두 자신 들을 대신하여 대리 만족을 줄 그러한 자를 머리 속에 그리며..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를 타신다.

그것도 어린 나귀.

나귀의 걸음 자체가 그리 우아하지 않은데

어른 남자를 태운 '어린 나귀'의 발걸음이 얼마나 비틀 거렸을까?

거기에 크기의 부조화는 ...

참으로 모양새가 그리 이쁘게 연상되지는 않는다.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그러나  무리는 다시 환호 한다.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만일 ,

주님이 잘빠지고 미끈한 백마나 흑마를 타고 오셨다면 어땠을까?

 무의촌인 사북에서 군의관 생활 할때

태백에 특별하신 동료 선생님께서

산을 사서 거기에 목장을 운영하시면서

거기에 곰도 사서 기르시고 자기 만의 왕국을 건설하신다 하여

가본 경험이 있다.

특별히 기억 나는 것은 그 때 본 말이다.

'Empiror'라 명명되어지 커다란 흑마.

키가 얼마나 큰지 내가 서있는 키를 넘어설 높이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생일 선물로 들여온 것을

여론의 질타 때문에 처분된 것을 '의사 선생님께서 사오신 것이라신다.

 얼마 전 키르키츠 스탄이라고

러시아 근처의 빈국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시던 소아과 의사께서

그 말의 원산지가 아마도 '키르키츠스탄' 산이 맞을 거라는 말씀을 하셨다.

 예수께서 원하시면 키르키츠스탄 엠퍼러 뿐이런가?

아라비아 산 말도 좋을 텐데.

그보다 훨씬 좋은 종자의 말을 선택하여

털을 잘 다듬어 꾸미고

망또를 흩날리며

12제자를 좀...꾸미셔서 장식용 부하로 데리고 나타나셨거나

천사들이 머리 위에 나타나서 빵빠레를 불었다면

얼마나 뽀대구 났을 것인가?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귀, 그것도 어린 나귀여야 하셨는가?

 

 군중을 상상했다.

그들이 그 토록 환호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는데 환호하지 않을 수 있는가?

환호의 더 깊은 이유는

자신의 신세가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 자체' 보다는 '하나님의 덕'을 볼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환호하는 또다른 이유는

'예수님' 자체 보다는

'예수님이 보이신 능력' 탓이시다.

죽은 자를 살리신 자이니 얼마나 대단하시겠는가?

 거기에 구경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에

대단한 구경거리가 아니지 않던가?

 어찌된 이유이던  '환호의 본질'을 보면

주님 보다는 '나의 이익'이 있는 것이다.

 

다시 상상으로 돌아가 본다.

멋진 모습으로 검은 엠퍼러 말을 타고 주님이 나타나시면

그 중 누구도 자신들의 상상에 틀림이 없을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그것은 그 다음에 이어질

십자가의 사건에 도저히 맥이 이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주님은 '나귀'를 타셨다.

그것도 어린 나귀를 타셨기에

더욱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하셨다.

 

우스꽝스럽지만

그 모습을 지켜 보는 나는

비록  묵상 중이지만 슬픈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영광을 조금이라도 받으신 후에 십자가에 오르셨더라면

가슴이 덜 아플 것을

그 분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처절히 순종하고 계시다.

십자가도 무섭고 힘이 들지만

이러한 소소한 부분에서 자신을 낮추고

자아를 부인하는 그 분의 주님에 철저 순종하심과

주님 안에서의 순종하기 위한 지혜가 놀랍다.

 

어찌되었던,

주님의 그러한,

조금은 충격적이고 도발적이 퍼포먼스 같은

어린 나귀타고 오시는 모습은

몇몇 사람들,

특별히 신앙인을 가장하면서

자신의 사리와 사욕을 우선하는 신앙인들의 가슴에

심한 실망감을 주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 자리에 '호산나' 소리가 일제히 멈추어지고

잠시 '고요한 적막'이 흘렀을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

자신 들이 그려 놓은 메시아의 등장과 자신들의 입장이 펴질 것이라는 상상이

어찌 '어린 나귀와 그 위의 묘한 남자'의 뒤뚱거림과 일치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 증거로 후에 나오는

'나사로의 살아남'을 증거하는 자들의 증거하는 모습이 아닌가?

환호가 이어지고 있더라면

가만히 두어도 좋을 것을 왜 열심히  분위기 띄우기 위해서 노력하는가?

어쨋든 그들은 성공했다.

다시 환호가 시작이 되었다.

 

 또 주님은 무엇을 노리고 저러셨던가?

 

 그 잠시 유지된 정적 속에서

자신의 이익 만을 위하여 - 그게 의도적이 아닌 자들- 다시 한번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생각을 가지게 하려함은 아니시던가?

 

만일

주님이 주님이시고

주님이 어떤 모습이던 상관없이

주님임을 깨닫는 자들,

특별히 나사로와 그 가족들,

그 기적을 미리 경험한 사람들은

전혀 그러한 흔들림에 흔들릴 일은 없지 않는가?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거의 확신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한 그들은

그 분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던

그 분 예수님이 나귀 타시는 발이 질질 끌리던

가끔 옷이 나귀의 발에 밟혀 뒤뚱거리는 코믹한 모습여도

그 분 예수님은 하나님이실 뿐이다.

 

 이러한 증거는 곧 나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들 ,

자신의 이익 만을 생각하던 자들은

모두 반대자로 돌아서서 오히려 저주를 퍼 붓는다.

 

 

지금

현실에서는 안그럴까?

 

주님을 믿으면서

기복을 추구하는 자들.

주님이 주시는 축복의단물 만을 빨아 먹으면서

주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과연

주님의 십자가를 환호할 수 있는가?

그 십자가를 눈물로서 가슴아파 할 수 있는가?

그래.

세상의 잘 되는 때는 주님이지만

잘못되면 신앙이 잘못되는 것이라 저주하는 자들은

과연 주님이 십자가 달리실 때도

'주님'이 저분이시라 할 수 있는가?

눈물로써 그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어린 나귀는 내 일상에서 어찌 나타나는가?

 

오랜시간 기도하고

나름으로 호산나의 그 분을 예상하고 기다리던

아들의 입시 결과가

생각보다 그리 시원찮을 때 난 어찌 반응했는가?

 꼭 기름진 흑마 타고 오실 그 응답을 기다렸는데

잠시지만 비록 얼마나 가슴아파 했는가?

난, 호산나의 환호를 멈추는 동안

얼마나 내 믿음의 허구성과 허술 성을 직면하였더란 말인가?

 

그래.

곧 주님은 놀라운 은혜로 깨달음을 허락하셔서 다행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또 앞으로도

난 주님의 주님 되심을

그 분의 응답의 형태와 상관없이 인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주님은 그것 때문에

주님은 진실의 기독교인을 보시기 위하여

자신의 십자가의 본질을 사랑할 자를 위하여

끝까지 낮추시었다.

 

 

 

적용

 

1.  어린 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묵상하자.

  조건에 상관없는 사랑함이 필요하다.

  긍휼함의 대단함을 기도한다.

 

2.  예수님의 철저한 낮아지심을 묵상하자.

  죽도록 순종하시는 분이시다.

  나의 가끔 게으름과는 차원이 다르시다.

  주여 , 성령으로 , 주님에 대한 처절한 사랑으로 불타는 내 영혼을 허락하소서.

 

3. 성경 일곱장 읽겠다.

 

4. 조건과 상관없는 사랑을 베푼다.

    주님의 모습에 실망하는 자들에게

   나사로 부활의 기억을 전하는 자가 되리라.

 

 

 

 

기도

 

주님.

놀라운 주님.

주님의 그 놀라운 아기 나귀 타고 오시는 모습을

잠시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자신의 모든 바람을 버리시며

주님 하나님의 뜻,

십자가에 달리실 수순을 밟고 계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난 어떤지요?

늘 내 상처만

늘 내 것만

늘 나만 생각합니다.

주여. 용서하소서.

그들 환호하는 군증속의 대다수와

뭐 그리 다른지 모르겟습니다.

용서하소서.

깨닫게 하소서.

그럼에도 배반하지 않게 하소서.

그럼에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주님,

나사로 살리신 그 기억 만을 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죽도록

주님을 증거할 수 있도록 하게 하소서.

꺼져가는 이땅의 주님 믿음을 되살리는 입이 되게 하소서.

그러한 자들의 소리를 꿀로 들을 수 있는 귀로 허락하소서.

주님

온전히 당신 자체 만을 사랑하길 원합니다.

조건과 상관없는 예수님 만을 갈망합니다.

그리되도록 안수하시고 축복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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