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부르심을 듣고 사는 삶[삼상3:1-21] 본문
부르신 곳에서 ~
부름 받은 곳에서~
부르심을 들은 곳에서 ~
아..
내 매일의 삶에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기 위하여~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NIV: vision, KJV: open vision)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보이지 ' 않다.
vision..으로 표시되는 '이상'.. 이 보이지 않다 .
하나님과의 독대로 이루어지는
눈을 뜨고 있어도 보이는 확실한 영상, 환상을 비전으로 표시하지 않던가?
하나님의 이 땅에 임재하심의 한 현상,
가장 뚜렷한 임재감이 '이상'이지 않을까?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반면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상징하는
엘리의 눈이 어두워져 '보지' 못함과 대비 시키며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그 차이는
하나님의 등불이 켜진
'하나님 전 안에 누'워서 있는 가 아닌가에 차이가 있다.
반면, 엘리는 자기 처소에 누워 있으니
같은 '믿는 자'라도 이리 차이를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8.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그리고 '부르심'과 '응답'에 대하여
16.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이르되 내 아들 사무엘아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엘리의 부름과 대비시키신다.
'하나님의 부르심'
사람의 '부름'...........
이 땅을 살면서
부름과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훨씬 가깝고 쉽다.
당연히도 ...
그리고 그 차이는 어제 묵상에도 ,추후 엘리의 운명에도 잘 나온다 ㅜ.ㅜ;
당연히도
이땅을 살면서 주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우리네 삶에 주어진
오직 유일한 인생의 목적이라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분의 비전에 '응'하는 삶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등불'로 상징되어지는 '성령의 은혜'를 놓치지 않는 삶이 되어야 하며
그 쉬우면서도 어려움을 위한 기본전제 조건이
'하나님의 전에서 잠을 잠'
자면서도 주님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몸부림 침이다.
그렇다 .
인생의 목적이
그냥 하나님 임재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그냥 매일을 사는 것이다.
그게 .. 목적이다.
그게 사는 유일한 이유다.
옳게 사는...
알면서도 자꾸 잊는...
그런데
한가지 걸리는게 있다.
'부르심'
'비전'..............하면
자꾸만 마음 한구석에서 '버거운 느낌'이 밀려온다.
한동안 나 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계가 뜨거울 때 ( 영적으로 뜨거운거하고는 꼭 ......일치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비전 속에서 '선교사'로 부름 받고
'콜링'이라면서 여러 분위기를 조성하며 강요 비슷한 느낌을 받던 경우가 있었다 .
한때..
책도 '부르심' , 콜림', 비전............' 등의 이름으로
대다수 선교사님으로....나가야될 당위성,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한국교회 교인들의 확장.......의 도구로
한편은 이용되던.. 그러한 느낌으로
그런 '부담'을 아주 어려워 하는 나..........
부르심, 비전,... 이런 것에 별 감흥을 못받았었다.
하지만
오늘 '부르심' . 이상, 비전은
좀 다르다.
세상을 살면서
어쩌면 자꾸만 눈을 가리고 귀를 유혹하는 자극들이
당연히도 많기에
이상과 부르심을 들을 기회가 점점 적어질 수 밖에 없는 게
현대 신앙인들이 제대로 된 믿음을 유지하기 어려운게 사실이다.
디지탈시대로 대 전환이 일어나며
이전 아날로그 시대에
정말 하나님 전인 교회나
집에서 가까운 기도원 (아.. 내 집있는 AY에는 너무 귀한 기도원이 예술공원 안에 있다. .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 시절을 정말 은혜로 붙들어 주시던 매개체다... ^^*)에 나가 몇날며칠을 잠자며 기도하던
그런 일들은 차치하고라도
그냥 차분히 아침과 취침전 수십분 만이라도
주님 만나는 고요한 시간을 유지하기가
정말 어려운 시대가 맞다.
잠시 정신을 놓치면 어느새 기도하려던 시간이 훌쩍 지나고
'주님 아시지요'.. 하고 잠자리에 드는 경우가 태반이고
누워서도 나도 모르게 '유ㅌㅂ'나 영화에 눈이 꽂혀
새벽 몇시까지 그냥 온 정신을 다 뺏겨 버리다가
겨우 잠드는 경우도 허다하다.
디지탈이 나쁘고 유ㅌㅂ가 나쁘며 영화가 혐오스럽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월이 바뀌면서
점차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 전에서 등불을 켜고
주님과 교통하는 삶의 기회가 점차로 줄어
마치 '엘리'가 '육신의 나이'가 '매우매우 늙어'
신앙인의 모습만 가지고 '자기 처소'에서 잠을 자며
세상 사람들과 큰 차이없는 매일을
늙어가는게 '위험'하다는 이야기다.
세상의 가치에 휩쓸리면서
진정 '비전'과 '콜링'과 '부르심'이
왜곡되고 편협한 한 가치..
그럴듯한 이유로 선교사 나가는 것 만이
유일한 부르심과 잘 나가는 믿음 생활의 가치라
오인 (그렇다.. 단지 誤認일 뿐이다... 그도 맞다.. .하지만 더 큰 의미의 매일의 부르심도 있다.
매일의 비젼, 매일 주님 전에서 불켜놓고 자는 일상의 삶도 있다는 이야기다. )되게 되어
매일의 부르심
매일 주님 말씀을 들음
매일 일상을 최선을 다하면서도 주님을 놓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삶에 대하여
잊어먹게 되고 흐릿해져
결국 '디지탈.......세상의 화려함'에 매몰되어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주님은 내게
주님 성전에서 성령의 불을 켜고 자고 일어나는 삶의 가치...
그 귀한 부르심을 잊지 않고 살게 하시기 위한
되새겨주심의 말씀을 하시는 듯하다.
점차로 거세어지는
세상의 가치에 묻혀
주님의 부르심이 희미해지고 소멸되지 않기 위하여
더 깨어 몸부림치며
부르심을 듣는 매일이 되어야 겠다.
오늘 더....
주님.
몸부림을 치다가도
어느새 똑같이 또 세상의 유혹에 하루의 대부분 빼앗깁니다
넋을 잃다.. 라는 표현이 얼마나 합당한지요.
제 의지의 부분, 마음의 부부에 해당할 이 넋이 빼앗겨
온전한 주님과의 합일된 영혼이 됨을 방해 받지 않기 위하여
이 디지탈 , 세속의 급변은 참으로 큰 도전입니다.
주여.
잠시 잠시 조금 조금 더 반항하여
이 재미있고 빠르고 유쾌한 '마취'의 유혹들에
멀리해야 할 듯 싶습니다.
점점 더 '스마트폰 '을 내려 놓고
'탭'을 붙드는 시간을 줄이고
주님의 전에서 잠드는 시간이 늘어나야 겠습니다 .
기도하는 시간,
임재감을 더 크게 느끼는 시간이 늘어나
진짜로 큰.. .
비전, 이상, 하나님의 뚜렷한 소리의 부르심을 사모하는
제가 되어야 겠습니다 .
그것만이
이 모진, 계시록적 세상에서
오직 '영혼'을 붙들고 성장하고 성화해갈
유일한 길임을 ,
그게 제가 살아 늙어가며 죽음을 향해 마주해나갈
유일한 목적이고 이유임을 알게 하소서.
잊지 않게 하소서.
주여.
힘을 주소서.
저를 '주님의 성전'에서 '불 밝혀놓고 떠나지 못하게 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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