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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큐티와 좌절 이겨내기 ( 스 4:11-24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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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큐티와 좌절 이겨내기 ( 스 4:11-24 )

주하인 2009. 11. 16. 09:34

제 4 장 ( Chapter 4, Ezra )

 

 

 

어두운 밤하늘
외로운 보름달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움
끝나지 않을 듯한
외로움

 

그래도

외롭지 않다

 

나에겐
십자가가 있다

 


사모하는
예수님이 계시다

 


11.  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린 그 글의 초본은 이러하니 강 서편에 있는 신복들은 
13.  이제 왕은 아시옵소서 만일 이 성읍을 건축하며 그 성곽을 마치면 저 무리가 다시는 조공과 잡세와

      부세를 바치지 아니하리니 필경 왕들에게 손해가 되리이다   
 그럴 듯하다.

오늘 묵상의 설명에 보면 '거짓 조서'라 나온다.

거짓 조서일까?

그들의 입장 - 조서 올리는 자, 바사 왕국 입장-  에서 보면 '진실'이다.

합리적인...

 거짓 조서라는 표현은 '선택받은 백성'의 입장이다.

 

 진실과 진실과의 대치.

세상 모두에게 다 그렇다.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을 입장이 어디있는가?

임신한 처녀라도 정당한 이유가 있지 않던가?

지금 시대는 더 더욱 그렇다.

아무도 진실이 없다.

모두 다 옳다.

미쳐간다.

진실을 구분할 틀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 진실한  '진실'은  그 수도 없이 많은 진실 중에서

하나님이 누구 손을 들어주시느냐는 데 있다.

 성령이 누구에게 거하느냐다.

그게 진리다.

진리에 바탕한 진실 만이 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블로그에 오시는 ' 자 뿐 아니라

모든 주님을 기뻐하고자 노력하는 기독교인들은 '행운'이다.

얼마나 많은 거짓 진실 들 속에서 세상은 뒤죽 박죽이던가?

 그 안에서 오늘 처럼 얼마나 많은 '갈등'들이 인간의 속을 뒤집던가?

그럼에도 진리인 그 분의 말씀을 붙들 수 있음은 혼란이 없다.

단순하고 힘이 있고 자유롭다.

그것만 가지고도 행운이다. (천국까지 ~~!!   아휴.. ^^*)

 

 

 

17.  왕이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사마리아에 거한 저희 동료와 강 서편 다른 땅 백성에게 조서를

      내리니 일렀으되 너희는 평안 할지어다
22.  너희는 삼가서 이 일에 게으르지 말라 어찌하여 화를 더하여 왕들에게 손해가 되게 하랴 하였더라 
  세상의 다양한 진실-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 모두 진실이라면... ^^;- 도 이렇게 말한다.

그 세상의 진실 속에 있는 권세와 정사와 어두움의 권세 잡은 자들 말이다.

그들도 이렇게 얘기한다.

'너희는 평안할 지어다. '

그러면서 너희는 '게으르지 말라' 한다.

'어찌 내가 (너희 같은 착한 자들에게 - 이것은 없었다 ^^;) 손해보게 할 것인가?' 라 한다.

 세상의 거짓 선지자들은 이렇게도 얘기한다.

' 구원은 어디에도 있다.

  착하게 살면 구원 받는다.......'

마치 '하나님'이 말씀하시듯....

사단 같지 않은가?

흉내내기 좋아하는..   

 

 
23.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저희가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역사를 그치게 하니 
 

하나님의 역사는 가끔은 빠르시지만 일반적으로 인내를 요하신다.

하지만  사단은 아니다.

조급하다.

 또한 반드시 반대 급부가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밟아 누르는 반대가 있다.

결국 그 화살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보라.

'권력으로 억제하여' 성전 건축을 강제로 막았다.

 

 

 
24.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전 역사가 그쳐서 바사 왕 다리오 제 이년까지 이르니라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건축 역사가 멈추었다.'

그게 다리오왕 제 이년까지 그랬단다.

 분명코 주님의 허락하에서

놀라운 증거를 보이시고 난 후에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늘 주님의 뜻이면 일사천리이고

수천 수백배 퍼부어 주시기만 하는 막힘없는 축복 만을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가?

고난은 필연이다.

마치 주님이 뜻을 돌리신 것 처럼 '딱' 멈춘다.

칼 같이...

그리고는 '변화없는 조용한' 좌절이 이어진다.

끝없는 좌절.

아니 끝이 보이지 않는 좌절.

아니다. 

주님은 그럼에도 당신의 역사를 이어가시었다.

주님의 뜻은 '최소한의 간섭'이자 '고난을 허락함'의 인터액티브한 역사다.

 이 '좌절의 끝이 안보이는 시간 '이 중요하다.

이 시간을 어떻게 지내느냐가 더 큰 축복과 주님의 뜻을 이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주님은 기다리시는 것이시다.

이 기다리는 시간을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하나님의 전' 건축

당위성은 알지만 쓰러지지 않겠는가?

이들 , 열심있는 자들도 다 식지 않겠는가?

 

' 매일 말씀 묵상'이 그래서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감동으로 적시지 않고는

쓰러질 수 밖에 없다.

기다림은 매일 같은 사단의 공격을 의미한다.

 난 이 블로그를 통해 거의 매일 같이 내 묵상을 올린다.

그것은 내 영혼의 티처럼 남아 있고

건드리면 올라오는 약숫물 안의 부유물 같은

내 영혼의 더러운 찌기들을

말씀에 비치어 매일 걸러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주님과의 매일 대화'

그것은 도덕적인 짚어냄과는 엄연히 다르다.

주님이 주권적으로 기뻐하시면서 말씀을 주신다.

그러기에 내 영혼은 자꾸만 더 맑아져가며 - 시간은 걸리지만 - 조금씩 더 성장함을 느낀다.

그 기쁨과 놀라운 행복은 말씀에 젖어 감동 -성령의 감동-을 체험해보아야 안다.

세상 무엇으로 바꿀 수 있는가?

 이

매일

말씀 묵상만이

'좌절'의 기다림 속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어제 일요일 .

주일.

주님의 날.

성가대에 앉으면서 문득 드는 생각.

 주님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두 가지'다.

'외부적인 성취'와 '내면적 성장'이다.

외부적 성취는 '선교', '전도', '구제'... 이고

내면적 성취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 온유 .....의 '성화'다.

 두개는 서로 별개일 수가 없다.

오늘날 교회는 성장이나 외부적 성취에만 너무 치중한다.

거기에도 더 세분화되어 '선교',구제' , 성장...어느 한부분에만 치우치기도 한다.

그것을 가지고 '해방신학'이니 '보수 신학'이니...........한다.

다행이도 우리 교회는 '복음주의 신학을 추구한다.

어떤 것 -선교와 성장' -에도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을

'주님의 영광 '을 드러내는 것을 우선으로 하되

주님의 영광이 우선이면 어느 누구와도 대화는 가능하다...

그들은 포용하되 주님의 복음을 타협하지는 않는다.. 는게

목사님의 비전이시다.

다행이다.

아주 균형잡힌 교회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 교회 뿐 아니라 현대의 교회 모두에

어딘가 미지근한, 어딘가 빠진듯한 느낌이 드는 것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러기에 늘 갈증나는 입에 '설탕물' 먹는 듯

먹을 땐 시원하지만 금방 허전한 느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게, 그거였던 것이다.

 '내면적 성화'의 추구라는 면의 결여.

솔직히 속이 허한 분들.

마음이 아픈 분들에게는 외부적 선교나 다른 어떤 말씀의 당위성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따르기에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

 실은 그들 뿐이겠는가 ?

자신도 느끼지 못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점차로 시들거리는 이유가 이것이다.

'내적인 공허함'

솔직히 '선교', '구제'......모습은 하나님의 일이지만

그것이 실적이 말해주는 것이니 세상의 '비즈니스'랑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일요일마다와서 예배 드리고 하는 얘기가 결국 '하나님 비즈니스'.

삐딱한가?

어제 갑자기 드는 생각이 그거였다.

이유는 '내면적 성화' 의 결핍이다.

  수년 전 부터 이러한 면에 대한 자각으로 '내적치유'니....하는 다양한 내면적 성찰이

교회를 주축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하지만 이것도 '심리학'을 접목한 거짓 목회의 위험이 다분하다.

반면, 내면 성화 만을 추구하다가 왜곡되어가는 모습 들을

이전의 교회와 교단에서 절절히 경험하였다.  

천주교의 수도자와 병폐는 역사가 증명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찌 해야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데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인가?

'통합적 추구'다.

어떻게 가능한가?

일단 당위성을 알아야 한다.

외적과 내적 추구를 동시에 해야 한다.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다.

'삶속에서의 영성'

프랭크 로바크.

'발칙한 큐티'...^^; 가 증거다.

삶속에 걸리는 모든 부분을 하나하나 말씀에 비추어 녹여 내는 것이다.

난... 아직도 걸리는 부분 많지만 삶속에서 말씀으로 녹여낸다.

 

이 이야기.

하는 이유가 있다.

오늘 묵상 구절에서 '하나님 뜻'이라고 열정을 보이던 일에

갑자기 제동이 걸렸다.

저 며칠도 아니고 수개월 내지 이년 가까이를 기다리는 동안

틀림없이 식어 버리는 감동을 경험하지 않을까?

 아버지 학교에 토요일에 갔다.

찬양을 마치고 오랫만에 보는 26기 동기 스텝을 만나 대화를 했다.

요즈음 사업 때문에 바빠 간이 많이 안좋단다.

이 형제는 2년전 개심하여 새벽교회까지 열심히 나가던 친구다.

그러다가 요새 ..사업 핑계...

하는 말이 '한번 안나가니 못나가겠다.' 다.

그렇다.

식는 것을 사단이 가만히 두는가?

 

 교회 마치고 집에 갔다.

큰 아들이 아직 누워 있다.

분위기 상 교회에 안다녀 온것 같다.

군대 다녀와 복학하기까지 매일 같이

밤마다 컴퓨터에 붙어 살며 밤낮이 바뀌었다.

둘째와는 달리 말이 별로 없다.

상처가 많다.

그래서 기도하며 기다리고는 있다.

아이의 믿음이  - 참 신선하고 명철하던 아이다 - 흔들리고 있어

더 이상의 대화나 강요는 자제하고 기다리며 기도만 하고 있다.

그 아이에게 '교회 가라'며 몇차례 깨웠지만 뒹굴거리다 결국은 안일어난다.

주님께 너무 죄송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속이 뒤집히려 한다.

화살기도 하니 마음이 가라앉는다.

서너차례 그러다가 문을 닫고 그냥 두었다.

저녁 먹으라는 소리에도 그냥 잔다.

그러다가 느즈막히 나갔다 온다면서 나간다.

 내 맘이 맘이 아니다.

아이들.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자꾸 '엄친아'가 떠오르려 하고

자식들을 기를 써서 성공시키려는 이유를 알기도 하겠다.

친구들을 만나도 어디에가도 자식 얘기가 싫다. ^^;;

그러면서 이전에 그렇듯 각종 진실일 듯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 생각은 나를 좌절로 몰고 가려 한다.

합리적인 어두운 생각들.

오늘 묵상 구절에 나오는 어두운 진실들.

그 진실 들이 사실로 나올 것이 두렵다.

둘째는 공부는 조금 덜 했지만

하나님 안에서 일년간 잘 잡았었는데....

아이는 나와 사이가 회복이 되어서 주님의 역사하심을 분명코 느끼었는데..

 첫애는 상처 받은 시간이 길고 나의 기대 만큼 더 강한 아픔이 있어서 인가

영 회복이 어렵다.

분위기가 무겁다.

마치 오늘 '성전 건축'이 멈추어 버린 듯.

 어제의 시간, 솔직히 요새 아들 제대한 후 분위기가 '냉랭'하다.

마음 속에서 싸움이 일어난다.

' 저 애에게 혼내고 가르쳐서라도 삶의 태도를 배우게 해야 한다.'

' 다 큰 녀석이 아직도 .....'

'.........'

' 아니다.   기도하고 기다리며 권면하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

  그러면 애가 저 생활이 굳어서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는가?'

 ' .............'

 화도 났다가 포기도 되었다가

주님 말씀이 떠오르면 차분해졌다가

오래 참는데 대한 두려움이 올라왔다가..........뒤죽 박죽이 되려한다.

솔직히 이럴 때 무엇이 진리인지 잘 모르겠을 때가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무조건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실 것을 아는 데도

정말.. 그럴까.. 생각이 들면 흔들린다.

 그래서 TV와 컴에 머리 박고 정신을 놓았다.

이게 예전부터 내 하던 방식이다.

그래도 달라진 것 하나는 더 있다.

성질을 끝내 안부렸다. ㅎㅎ

그러다가 늦게야 잠이 들었다.

 아침에 5시 되어서 '개운'하게 눈이 떠진다.

세시간도 채 못잔것 같은데...

이때쯤 나는 느꼈다.

주님은 주님이 원하실 때가 있다.

그때 마음과 몸이 개운하다.

아침 잠이 누구보다 많은 나.

더구나 늦게 잤는데 이것은 주님의 싸인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현상이다.

그래서 일어났다.

둘째 방에서 컴을 보다가 잠들었었는데

그 침대에 무릎꿇고 한참을 기도했다.

아내는 새벽기도 다녀오다 내 기도하는 소리 들었나 보다.

엊저녁의 무거운 발걸음이 아니다.

 다시한번 정리되었다.

'인내'할 힘을 주신다.

인내하면서 기도하면 다 선하게 될 것이다.

시간은 주님의 영역이다.

겉으로 성공하든 안하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어떤 모습이든 다 '선'한 주님의 뜻일 것이다.

 잠시 눈을 붙힌 후 일어나 나왔다.

 

 버스 안에서 묵상집을 들여다 보았다.

 어느 것이 '진실'일지도 모를 진실 덩어리들이 부딪친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다 맞다.

이 편도 , 저 편도 ... 이해 못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손해를 끼치는 것이 맞고

그들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이 어지러운 판단 속에서 누가 옳다고 손을 들어줄 수 있는가?

설령 손을 들어주어도 그게 맞다고 누가 장담하는가?

이러기에 진리가 필요하다.

진리는 '하나님 쪽'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 있는 자들이 진실이다.

그것 만이 답이다.

어리석은 세상의 '모두 옳음'은 '모두 사단'이다.

그럴듯한 합리는 다 썩어갈 것이다.

 아이.

아이에 대한 상념들.. 다 그럴 듯 하다.

하지만 오늘 아침까지 내가 보였던 인내가 옳았다.

주님의 눈을 의식하여 '성질'을 안부리고

급한 마음에 애를 대화의 장으로 끌어 들이지 않음이 옳다.

설령 내가 그래 보았자

현 시대의 젊은이 들, 88만원 시대라는 이 시대에서

이 아이에게 내가 장래를 보장하고 나가라할 자신은 있는가?
그냥 권면하고 기도하고 인내하고 기다리자.

속상해 할 일없다.

둘째 아들.

주님 뜻 안에서 하나하나 통합적 성장의 기초를 마련해 준 후

자신의 선택하에 군대에 갔다.

그 후는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을 확신한다.

이처럼 잘 나가는 ,

잘 보이는 우리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역사' 중에

큰 아들 쪽에서 제동이 걸렸다.

아.

답답하다.

이렇게 이렇게 기도하고 기다리고 지도하는 대로 가면 될 것을...

하지만, 오늘 주님의 뜻도

세상의 뜻에 막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렇다.

조급해 할 일이 하나도 없다.

그냥 기다리면 된다.

문제는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날 맞추어 가느냐 아니냐에 승패가 달렸다.

하루하루 말씀에 날 맞추어 가야 한다.

'빨리 적당한 성장, 좋은 직장, 좋은 신앙, 좋은 대인관계...'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만이 하나님 믿는 자의 마땅히 나갈 수 밖에 없는 기복적 운명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은 기다리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동안 철저히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매일 ' 투영하길 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 뜻'만이 진리이고 진실임을 믿고 기다리길 원하신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게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인가를 감사하길 원하신다.

 

 

 

적용

1. 큰 아들.

  기도하며 기다린다.

  지금처럼 매일 아침 기도하고 나온다.

  화 내지 말자.  

  잔소리 하지 말자.

   믿자.

  아이의 장래는 선하다.

 

2. 둘째.

 요번 주 부터 그리도 겁내던 화생방 교육과 수류탄 , ...훈련이 시작이 된단다.

 기도하자.

 아이의 사고 없음, 대인관계 확장, 장래에 대한 현실감 , 믿음 성숙을..

 

3. 교회.

 내 외적 충실을 기도하자.

 성적 뿐아니라 사랑도 넘치는 교회가 되길..

 삶속에서의 성화..

 담임 목사님의 영적 성화와 균형잡힌 목회를 위해..

 빨리 성장하는 교회의 담임 목사는 교만의 위험이 많다.

  다행이도 아직은 겸허하시다.

  아니... 노력하시는 싸움이 보인다.

  주님 뵐 때까지 우리 성도를 위하여..

 

4. 아내.

 폐경기 격변의 시기, 어려움을 잘 건너갈 수 있도록 ...기도하자.

 

5. 아버지 학교

 마지막 주차 스텝모임 가겠다.

 남을 위해 .. 기도하는 마음으로 . ..

 

6. 기뻐하자.

 난, 주님 편이다.

 세상은 흔들려도 나는 중심을 잡고 있다.

 주님의 사랑이다.

 

7. 사랑하시는 주님을 위하여 오늘 살자.

 낮아짐을 기뻐하자.   주님의 영광을 위해..

 

8. 통합적 원리... 삶속에서의 영성을 잊지 말자.

 

9. 발칙한 큐티.. 늦추지 말자.

  주님이 나에게 주신 개인적 사역이다.

 나 스스로의 말씀에 비추는 작업이다.

 감사하자.

 이곳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같이 주님을 알아갔으면 한다.

 

10. 성경 일곱장 읽겠다.

  말씀 만이  살 길이다.

 

 

 

 

 

 

 

기도

 

 주님.

저 자꾸 자꾸 넘어지려는 것을

그 때 그때 잡아 주심을 압니다.

감사합니다.

말씀으로 절 늘... 붙들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 행운에 감사드립니다.

그러함에 든든합니다.

주여.

살아계신 주여.

전에는 그랬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인의 감격을 볼 때도

그들이 곧 약해지고 지루해지고 냉랭해 질텐데.. .나도 그런 상황이 오면 어찌 이기나..

주님

그러한 일이 내 삶속에도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의 전 공사 중 느닷없이 걸리는 저 제동처럼

저희 가정에도 제동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뜻 안에서 선하게 나갈줄 믿고 있기에

감사하고 평안해 하렵니다.

믿습니다.

주여 .

우리 가정 ,

아니 믿는 당신의 자녀들 모든 가정이

주님 안에서 인내하고 자유를 누리고 기다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기쁨 가운데요.

감사하신 하나님.

오늘은 아버지 학교 마지막 주차 스텝모임입니다.

같은 고민을 가진 이땅의 아버지들을 위하여

같은 하나님의 기쁨을 나눌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도우소서.

좌절 후에도 금방일어서게 하소서.

끝없는 기다림도 기쁨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돌아올 회복을 위해서 그리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언제나 내 모습 )

 

언제나 내 모습, 너무나 부끄러워 
무릎으로 주님께, 기도로 가오니

홀로 서 있는, 죽은 내 영 깨우사 
주님만 나를 깨워, 내 영 살게 하소서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내 안에 계시고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나를 세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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