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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감동으로 미치다 (스1:1-11 )

주하인 2009. 11. 12. 10:36

제 1 장 ( Chapter 1, Ezra )

 

  

주께서
은혜를 주시면
세상의 작고
세세한 것까지
어찌 그리
모두가
이쁘게만 보이는가

맑은 햇살을 받아
뿌리는
저 적은 꽃의
노란색  생기가
이 아침을
감동으로 열어간다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그러고 보니

어디 한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오래 앉아 있지 못하던

이 엉터리 주하인이

아직도 주님 앞에 서 있는 이유는

'감동'이었다.

늘 묵상하면서 평강이니...기쁨이니.. 했지만

그 단어들을 정리하니 '감동' 탓이었다.

세상의 권세, 불신자의 대명사 , 사단의 또다른 상징어가 '바사'였는데

그 바사왕 고레스가 '감동'하니

조서도 내리고 온 나라에 공포하길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 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4.  무릇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

    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뜬금없이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전을 만들라 하고

 하나님은 하늘의 신이라 고백하며 '하나님은 참 신'이라 고백을 한다.

그러면서 재정적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음도 보이고 있다.

 또한 마치 선지자 처럼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리라는

권면까지 하니.. 참...놀랍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듯하다.

 

 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도저히 이전의 행태로는 짐작할 수 없는 행동을

180도 바뀌어 해내는 것.

이것은 '감동' 받은 어떤 일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잔잔한 정도의 것이 아니다.

 주님의 감동은 '전율'일 수도 있고

잔잔하지만 점차로 커지는 지속적인 특성이 있다.

 

 BC 500 년 경의 이 인물의 하나님에 의한 이 감동과

그에 의하여 벌일 출애굽과 유사한 사건을

150여년 전의 예레미야 ( BC 625년경 유다 왕국 말기 요시아왕 때 활동한 대예언자)님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예언했다.

 놀랍지 않는가?
  


 
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건축코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6.  그 사면 사람들이 은그릇과 황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즐거이 드렸더라 
  그러자, 유다와 베냐민과 레위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한 마음이 되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건축하기 위해

즐거이 자신의 예물을 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그 척박한 환경에서도 한마음으로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의한 '감동'탓이다.

 

 여기서 생각해볼 몇 가지 것이 있다.

 

 우선 죄로 인하여 잡혀왔던 그들이 주님께 감동을 받을 만큼 잘 한 것이 있던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오셔서 감동을 줄 어떤 행동을 하셨던가?

 고레스 왕도 마찬가지다.

그가 하나님을 알던 자인가?

어찌 그가 선지자 처럼 행동하던가?

역사가 증명하는 틀림없는 '감동'받은 자의 180도 다른 반응.

' 하나님의 감동'이 답이다.

다른 것은 생각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감동은 어떻게 오는가?

'주님의 때'다 .

우리는 초조하고 급하고 눈에 보이길 원하지만

주님의 역사는 100년 넘게 지난 후에도 이루어 진다.

그게 가장 선한 길이기에 그렇다.

주님의 뜻은 '선'함으로 믿고 기다리면 그것이 정답이다.

 

 또한, 행동 문제다.

감동 후의 행동.

행동을 하고 말고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행동이다.

하지만, 시기가 늦게 온 것은 주님의 늘 주시고자 하는 감동에 대하여

반응할 만한 백성들의 자격이 부족해서는 아닐까?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많이 회개하고 더 빨리 돌아섰다면

감동은 더 일찍오지는 않았을까?

 

 

이전에 다니던 교회는 조그만 교회다 .

재적인원 80명이 못되는...

그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10여년을 다녔다.

수도적 성향이 강해 개신교 수도사가 있는 ....

그러기에 '영적 경건함'을 추구하고 절제와 영적 성화를

목표로 삼고 있기에 '헌금'이나 '구제 '부분에 대하여

타교단에 비하여 부담이 적기는 했다.

알아서 내는.......

 귀한 영적 Insight와 성장을 얻은 교회이지만

 짧은 글로서 설명하기 힘든

인간이 사는 곳은 어디나 있을 수 밖에 없는

'앎'과 '실제' 사이의 괴리 탓으로 수년간 고민하다가

올해 초 드디어 교회를 옮기게 되었다.

지금 다니는 교회는 '안양 제일교회'로 '홍성욱'목사님이란

대단히 균형잡히고 존경스러운 목회자를 모시고

날로 성장하는 몇 안되는 교회 중 하나이다.

 틀림없이 세상에서 세상 속에서 있기에

이전 교회보다는 '영성'이라는 면에서는

많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교인들이 영성이라는 개념조차 모를 분들이 대부분이 그런게

사실이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교회가 사랑스럽다.

주님이 얼마나 날 사랑하시는지.. 라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교회의 부흥이 얼마나 많이 되는지

드디어 이 교회가 증축을 결심하셨고

지난 달 부터 '건축헌금' 설교를 하셨다.

 우려하고 주위에서 들려오던 개신교의 병폐 - 건축을 둘러싼... - 는 아직까지는 보이지 않고

목사님의 균형잡힌 목회철학 탓으로 버거운 헌금 강요는 일절 없지만

그 많은 예상 소요 경비와 나의 남들 눈에 보이는 '위치' - 의사-라는 점이

괜히 내 마음에 부담이 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작전헌금' 소리가 나와도

내 마음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아직까지 결심도 되지 않는다.

솔직히 '새로온지 얼마 안되는 평집사'이고

'겉만 뻔지르르한 빈털터리 중년 산부인과 의사'가 내 속에 드는 마음이다.

압력은 전혀 없지만

막상 '강요'라는 느낌에 부딪히게 되면 '반발'이 나올 것 만 같다.

돌아본다.

수년전 위에 말한 그 수도적 성향의 금전 부담을 전혀 안주는 개척교회에 다녔을 때에

내 상황에 맞지 않을 거금 - 내 딴에는 거금이 맞다. ^^;;- 을 전혀 아까운 마음이 들지 않고

쾌척한 바가 있다.

 비록 그 속에는 내 '의'가 없지 않았었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변하였고 오히려 그 때보다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정말 필요한 - 고등부와 청년부가 너무 빨리 팽창되어 예배드릴 장소가 없다 ^^* -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할까 생각을 해보았다.

나름대로 이 정도면 적당할 것 같은 예상 액을 생각은 든다.

아깝지만..

 왜 그럴까?

왜 그런 차이가 보이는가?

나름으로는 '은혜'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은 해보고 있지만

지금 교회도 놀라운 말씀의 퍼레이드가 예배드릴 때마다 날 사로잡는다.

하지만 첫 사랑 후 그 때의 내 강렬한 감정의 움직임 만하지는 못하다.

마치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하면 어딘가 후련할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빨리 빨리 정리하고 빨리 빨리 내 버려야 할 것 같은 '밀림 =Drive' 가 있었다.

 그것을 오늘 묵상 중에 '감동'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다.

'바사 왕 고레스'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

'미쳤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

 사도 바울께서 '내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란

그 표현.

예수님 믿고 처음 얼마동안 날 아는 사람들이 날 보고 '미쳤다'고 했다.

헛소리 한다가 아니고

미쳐서 정신 빠졌다는 뜻도 아니다.

180도 이전의 행동양식과 다른 행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교회에 다닐 자'가 아닌 '자'가 다니고

줄 담배를 피워야 사는 자가 끊고

걱정덩어리가 얼굴이 편해지고.................달라지니

미쳤다고 한다. ^^*

 돌아보면 정확하고 재고 자르고 손익을 계산하는 내가

가끔 미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감정의 폭우가 쏟아졌었다.

그러고 나면 '후련한' 마음이 들고..

그게 가능하면 이 세상에 덜 모습을 보이시려 하지만

꼭 필요한 주님의 주권 탓인 것 같았고

그럴 때마다 '고레스 '왕 같은 미친 감동을 맛보게 되었던 것만 같다.

 

 교회 헌금 문제.

이것을 두고

비단 나 뿐 아닐 것이다.

' 위신'과 '현실'

' 퍼주고 싶어하는 본성'과 '아까운 마음'

' 목사님의 눈'과 ' 내 마음'

 ..........

어느 것이 강하냐에 따라 고민하다가 적절히 액수를 적어내고

그것을 '신앙의 성숙정도'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합리화 시키고 잊어 버린 후에

가끔은 억울한 마음이 들을 때마다 

스스로 '못된 신앙인'으로 깜짝놀라는 분이 없지 않아 있을 지 모른다.

그러다가 시험에 드는 분도 없지 않고...

 현 개신교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부분이

이 '물량' 주위로

신앙을 가장한 성전 증개축 경쟁이 차지하는 비율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 안에서 교인들이 멍이 드니..

지금의 교회.

그런 부분은 전혀 아님을 안다.

문제는 '나'다.

어디까지 '내 의'고 어디까지 '감동'이냐가 구분이 가질 않는다.

감동으로 절절히 신앙생활 이어가고 싶고

그러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자유'안에서 쉼을 누리는 매일이 되고 싶지만

어리석은 내 지혜 없음은 이게 내 영적 태만과 구분이 잘 안가는 게 문제다.

 그러한 나에게 오늘 묵상은 '감동'이란 단어로 답을 허락하신다.

 

문제는 감동을 받을 시기를 단축시키고

그 강도를 강하게 받았으면 좋겠고

감동으로 내 일생이 지속되는 삶이었으면 하는 문제다.

이스라엘인들을 묵상했지만

그들이 주님이 약속하신 '출페르시아'를 이루어내는 것이

그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하나님께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주적인 하나님의 다른 뜻이  있으셨던 것이 분명하지만

위의 내 얘기를 통해서 추정해보면

그것은 '내 영적 게으름'도 시간을 늦추고 밀리게 하는 원인이 있을 듯 싶다.

 그래서 전혀 돈 문제에 대하여 해보지 않던 기도를 해보려 한다.

'주여 어떻게 할까요?

出 바사(페르시아)'는 고통을 초래한다.

없는 돈 있는 돈 다끌어 모아야 하는...

하지만 일차 구원의 상징인  '출 애굽'보다는

더 성장된 헌신을 요구하신다.

그게 오늘 감동과 더불어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묵상 포인트인 듯싶다.

그래서, 헌금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반항이나 냉냉한 심정보다는

능동적인 기도와 더불어 더 커진 '감동'을 체험해보길 권하시는

주님의 뜻이신 듯 싶다.

 

 

적용

 1. 기도원 가겠다.

 말씀을 적용하면 기분이 좋다.

어제도 피곤한 몸 이끌고 저녁에 오랫만에 기도원 다녀왔다.

몸은 피곤하지만 날아갈 것 같다.

 

2. 감동을 유지하기 위하여 죄를 멀리한다.

 주님이 원하시지 않으시는 것은 멀리한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적용을 한다.

 감정적으로 맞지 않는 것도 주님이 원하시면 받아 들인다.

 기도한다.

 

3. 말씀 일곱장 읽겠다.

 말씀은 생명이다.

 성령의 검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감동이다.

 

4. 내일 아침도 일찍 일어나겠다.

 늦게자도 조금 일찍 일어나진다.

 주님은 기뻐하면 더 기뻐하신다.

 

5. 미치길 원한다.

  주님을 위하여 주님께 미치고

  사람을 위하여 온전한 정신으로 지혜를 주소서.

 

6. 병을 낫게 하소서. 

  어제의 기도를 이어간다.

 아내의 등,  가족의 건강,  내 허리, 하반신, 영혼의 정결화....

 

7. 사람이 변화할 유일한 조건은 '감동'이다.

 주님에 의한 감동이다.

  자식, 누구든... 변화시키기 위해 기도하고 기다린다.

 

 

기도

 

 주님

오늘은 희한한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 나타난 일.

역사가 증명하는 일.

이스라엘 백성의 '출 바사 사건' 을 보고 있습니다.

100 년 넘게 전에 예언된 일이

하나님께 미친 듯이 '감동한' 고레스 왕의 결단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감동을 독려하고

그들의 출 바사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출애굽과 비견되는 출바사는

결단과 헌금 등의 개인의 노력이 요구됨을 봅니다.

거기에 그들을 그냥 두시지 않는

성령의 감동을 느끼고 있습니다.

비록 구약시대에 저들이 성령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저들을 저리 감동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의 감동이 틀림이 없습니다.

주여.

귀하신 주여.

저도 제 인생을 돌아봅니다.

신앙의 인생은 정말 제 전체 삶의 1/4도 되지는 않지만

그때 그때 뚜렷하게 날 이끄시던 감동의 물결을 보고 있습니다.

어찌 그때 내가 그랬을까?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때의 그 마음은 지금도 감동처럼

아련히 물밀려 오듯 오는 듯합니다.

주여.

감동으로 절 잡으소서.

제가 무리가 되지 않고

제 영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

과도한 결심과 헌신은 주님의 원리가 아님도 알고 있습니다.

주여.

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면 강력히 이끄소서.

마치 낙태를 포기하려 산부인과 의원 원장을 포기하려던

나도 모르는 그 강력한 밀으심과

제 여력이 닿지 않는 금액의 헌금을

아주 자연스레이 결심하게 하던

그 감동의 밀으심으로 절 미소서.

그게 주님의 뜻이면 전 따르오리다.

귀하신 주여.

그게 저만 그리하지 마소서.

제 아들들.

제 아내.

제가 아끼는 사람들.

제 아는 사람들.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감동이 우리의 살아갈 에너지임을 확연히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들이 인생에 몇번씩 주님으로 미치는 재미로 사는게

어찌 이리 기쁠 것인가를

제가 느끼듯 같이 느끼게 하소서.

그래서 바라옵기는 이 땅에 주님의 천국이 이루어지길 소원합니다.

사단은 물러가게 하소서.

그들이 아무리 궤계를 꾸며도

그것은 인간의 머리의 유한한 장난임을 부끄러이 느끼게 하소서.

내려놓는 삶.

그리하여 주님께 온전히 인도받는 삶을 살게 하소서.

그 가벼운

잠자리 날개의 삶의 자유를 체험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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