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바위 틈에 거한다 해도( 렘49:7-22 ) 본문
제 49 장 ( Chapter 49, Jeremiah )
16. 바위 틈에 거하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 스스로 두려운 자인 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 같이 보금자리를 높이 지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
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돔인.
에서의 후예.
해발 1000m 높은 고지에서 살던 족속들.
바위 틈에 산다.
척박한 그들의 삶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라는 표현은
그들이 외부적으로 공격을 받을 염려가 없는 상태에서 살면서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 생각되는 '산꼭대기'를 점령한 것을
대단한 자신들의 성취로 생각하는 것 같다.
마치 읽어가며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뉘앙스로 읽혀진다.
자신들의 세상에 만족한 다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기대'를 낮춘 '무소유'의 삶으로 이해될 수도 없지 않지만
무소유나 소유를 버리는 삶은
' 산 속에서 홀로 사는 ' 것이 아닌
세상에서 부대끼면서 비교와 올라오는 욕심등을 내려 놓고 살아가는 것인 바
그것과는 다른 고립되어 사는 삶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그 가운데서도 올라오는 그 교만은
'바위 틈에 거하면서도 산꼭대기를 점령하는 게 대단한 것처럼 착각하는... '이라는
뉘앙스로 느껴진다.
나.
' 고작 바위 틈에 살면서 겨우 산꼭대기 점령 한 것으로 콧대를 높이는 것은' 없는가?
또한 한편으로 '바위틈에 사는 것으로 좌절하는 것은 없던가?
'교만'과 '열등감'
두개는 서로 다른 것 같으면서도 너무나도 비슷한 경계 선 에 서 있다.
내 최근의 성취로
나도 모르게 교만해져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어찌 보면 그것은 '겨우 무주공산,산꼭대기 올라 '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나도 모르게 그러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놀랜다.
얼마 전 학회에 다녀왔다.
작년에 비해 대단한 발전 들이 있었다.
학문의 발전속도가 놀랍고
그들을 앞서서 끌고 가려는 연자들의 의욕이 뜨거웠다.
어찌 생각해보니 ' 바위 틈 속에서 산꼭대기 만 보고 만족하던' 에돔인처럼
느껴지려 했었다.
천천히 준비하던 논문이 있다.
2차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논문 쓰려 시도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던
이 어리석은 심사에 도전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행인 것은 예전보다 '비교의식'이 줄었다는 것이다.
초조는 느끼되 덜 초조하다.
19. 보라 사자가 요단의 수풀에서 올라 오는 것같이 그가 와서 견고한 처소를 칠 것이라 내가 즉시
그들을 거기서 쫓아내고 택한 자를 내가 그 위에 세우리니 나와 같은 자 누구며 나로 더불어
다툴 자 누구며 내 앞에 설 목자가 누구뇨
나.
교만과 열등감의 사이를 오르내리며
하루에도 몇번씩 '롤러 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어지러움 속에 살던 자.
그러던 자가 이제는 조금은 덜하다.
왜 이던가?
난 '내 성취'가 내가 올라선 위치에 대하여 자주 착각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 성취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확신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렇고 지금은 아직 최고 분들에는 형편없이 부족하고
나이 늦어 현실적인 암담함이 있지만
그것 마져 '지금껏' 인도하신 하나님이
그 전에 그토록 안될 것이란 강력한 부정의 틀 속에 살던
모든 것을 깨뜨리시며 간증거리로 인도하셔
지금의 나름의 성취를 이루신 것을 미루어서라도
추후에도 역시 큰 걱정하고 계획하고 비교할 일이 없다는 것을
나름으로 깨닫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오늘 그러신다.
'택한 자를 내가 그 위에 세우리니'
주님이 알아서 하신다.
주님이 택하여 주신 택함 받은 자가 맞다면
'누가 막을 것이고
누가 다툴 것이며
누가 그 앞에 설 수 있을 것' 인가 이다.
지금 그렇게 확신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다시 성경을 덮고 세상의 삶 속에서 부대끼다 보면
말씀 구절을 잊고
주님의 그 은혜와 인도하심을 망각하면
또다시 나혼자 인 것처럼 '교만'해지려 하고
'비교'하려 하다가 흔들거릴 수는 있지만
난 자꾸 자꾸 주님 앞에 나가려는 노력을 할 거고
그러다 보면 그 시간이 길어지며
주님 앞에 섬이 내 거의 대부분의 할 일이 되가는
그 과정과정에서
어두움은 물러가고
사단은 쫓겨가며
그로 인해 생기는 갖은 교만함과 열등감과
그로 파생되는 좌절과 혼란과 엉뚱한 콧대와 불안함과 행복지 못함이
모두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다.
에돔
바위 틈에 살고 있는 것이 만족 스럽다니 얼마나 다행이긴 한가?
그것 마져 늘 불행으로 인식하고 사는 자들은 또 얼마나 많던가?
아니, 평지에서 비옥하게 살면서도
삶이 늘 불행하다 불평하다가 결국은 자신의 목숨을 자신이 마음대로 버리는
영원한 벌을 받을 자들 보다 그 얼마나 다행이긴 한가?
하지만, 더 나은 것은 세상, 더 큰 곳에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서
그 분께서 허락하시는 범위 안에서
그것이 많든
그것이 적든
거기에 만족하며 사는 삶이 훨씬 더 낫지 않겠는가?
주어지되 굳이 거부하지 않고
없으되 그리 안타까워 하지 않으며,
굳이 무소유를 주장하며 자아를 키우기 보다는
주님 성령님의 주시는 영적 충만함으로
심령적 '무소유'가 자연적으로 허락됨이
바로 행복이지 않던가?
바로 그것은
그가 산꼭대기를 겨우 차지하며 만족하게 되든
대 평야의 지주로서 만족하게 되든
그 지주의 소작인으로 만족하게 되든
그 만족의 정도에서는 하등차이가 없게 된다.
바로 그게 '샬롬'이다.
평강이다.
그게 바로 주님이 이 세상에 주시고자 하시는 '심령천국'의 기본이다.
바로 그게 주하인이 세상에 전파하고
주하인이 늘, 단 일초도 빠짐없이
누리면서 살고픈 기본 감성이다.
오늘.
논문을 쓰려한다.
작년 부터 연초에 늘 결심을 하였다.
논문 두편 쓰련다.
그러던 것이 올초에도 똑 같이 그랬다.
작년에는 손도 못대던 것이 올해는 반쯤 완성해놓았다.
그렇고는 지금까지 손도 대지 않고 있다.
솔직히 '귀찮다. '
아니 무섭다.
그 무서움에는 '나보다 더 뛰어난 자들이 ......' 라는 비교와 더불어
혹여 웃음거리나 되지 않을 까하는 두려움도 있다.
옳지 않다.
누가 이런 생각을 하겠는가?
하지만 이게 내 에돔적이자 동일한 의미의 반 에돔적 생각이었다.
교만과 더불어 다니는 '열등감'이란 이야기다.
나.
어제부터 기도했다.
오늘은 조금 더 진척해보자.
그러면서도 귀찮고 무서움이 날 사로잡는다.
오늘은 기도하면서 그렇게 해 볼것이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이 주신 성취를 나누는 목적으로..
후배 의사들의 귀감이 될 목적으로 .. ( 이차 병원에도 연구하는 의사가 있다.. 나이들어도.. 라는 것을 .. )
그러면서 주님이 주신 내 성취를 드러낼 목적도 있다.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오늘은 에돔에 대하여 묵상을 시키십니다.
'바위틈에 거하면서 산꼭대기를'이란 구절이 꼭 우물안의 개구리를 빗대는
어이없는 그들의 만족함과 교만함을 표현하는 구절이 아닐 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그리 뉘앙스로 꽂혔습니다.
그것은 역시 '저'를 보고 오늘 느끼게 하시려는
우리 주님의 '레마'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는 말씀 묵상을 이 블로그에서 풀어가는 동안
아니나 다를 까 주님이 줄줄 인도하시는
그 매일의 경험을 또 하고 있습니다 .
주님.
저 맞습니다.
교만하면서도 우물안 개구리 같은 내 모습을 오히려 열등하게 낮추는 습관이
오래되었습니다.
교만과 열등감은 늘 형제처럼 붙어 다님이
제 속의 증거로 확실히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전에는 알아도 방법없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매일매일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진폭이 커져만 갔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주님이 저에게 함께 하시고
주님께서 절 앞서 목자로서 나가시며
주님께서 저를 막아서는 사단의 생각들을 자르시고
주님께서 저에게 하나하나 성취를 이루어 가시고
주님께서 제 앞길에도 제 달란트에 맞는 길로 인도하실 것을 알기에
이제 교만함도 내려 놓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 허무하고 어리석음을 포기하려 하고 있습니다.
부족함도 그렇습니다.
주님 허락하신 것을 어찌 내가 감히..
아직은 의지 안에 머물고 있는 생각들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주님과의 동행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전 너무도 자연스레이 주님뜻대로 생각하고 나갈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주님.
믿음마져 주님 그리하실 줄 믿습니다.
이제 '바위 틈에 거하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가 아니고
'바위 틈에서 살기도 하지만'
'산꼭대기도 점령하기도 하는'
주님 안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자 되길 원합니다.
특별히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 가정에 허락하시는 그 자유의 변화가 감사합니다.
아직 눈에 띄는 세상적 관점의 성취는 아니지만
산꼭대기면 어떻습니까?
바위틈이라면 어떻습니까?
장래에도 산꼭대기 만은 아닐 수도 있고
바위틈보다 더 넓고 큰 반석이 될 수도 있는
저희 아들들의 성취도
우리 주님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
모든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만나 뵐 그날 까지 흔들리지 않고
평강 안에서 거하게 하소서. .
제 가족 그리하소서.
오시는 모든 분들 그리하소서.
저 논문.. 아시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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