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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때에(렘 50:1-16 ) 본문

구약 QT

그날 그때에(렘 50:1-16 )

주하인 2010. 5. 23. 21:14

제 50 장 ( Chapter 50, Jeremiah )

 

흐리고 어두워도 해는 떠 있고 

사뭇 세상이 밝지 못해도

예수 십자가는  뚜렷하다

비록 구름으로  가리웠어도

믿는 자의 눈에는

뚜렷이 해는 보인다

 

믿는 자들에게 흔들릴 일은없다.

그날과 그때가 되면 

그들은 두팔 들어 찬양하게 되고

감동으로 벅찬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 천국은

바로 그 들 곁에 있기 때문이다

 

 
2.  너희는 열방 중에 광고하라 공포하라 기를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스러진다 하라 
 바벨론.

대 제국.

예레미야의 소리를 들을 까?

기왕이면 멋지게 그 제국의 어떤 권위 있는 자에게 말씀하라 하시지

왜 '유다 소국'의 예레미야라는 실권없는 자에게 임하여

그들의 망할 운명을 알리라 하셨을까?
바벨론, 그 큰 나라의 사람 입장에서 보면 콧방귀 나올 소리 아니었을까?

  그러나

사실은 이루어진다.

주님은 사실이다.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

무엇을 보이시고 싶으신 것이셨을까?

 

 주님의 말씀은 '현상'에 상관없는 것이라는 것이 아닐까?

주님의 말씀은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이루어지는 사실이란 이야기 아닐까?


  

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그와 함께 유다 자손이 돌아오되

    그들이 울며 그 길을 행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믿는 자.

'유다 인들'

특별히 하나님을 아는 자들,

하나님의 사실 앞에 풀려나오는 감격을 맛보는 자들은

이렇게 '울며 길을 행하게 되는 것' 아닌가? 
  

 

 오늘 .

 주일.

주의 날.

담임 목사님이 설교 중 하신 말씀에 끄덕였다.

사뭇...

 '기독교는 90%가 이성적으로 믿어진다.

나머지는 '믿음의 영역'이다. '라 시는 것이다.

그렇다.

성경은 과학적이다.

수천년 전, 그 미개의 시대에 '여성의 건강'에 대하여 정확히 집은 구절도 나온다 ^^*

사도 바울, 그 2천여전 분이 인권에 대하여 가장 현대적인 지시를 하신 것을 본다.

십자가의 원리.

구약에 맞추어 보면 한점의 빈틈이 없다.

 이외에도 너무 정확한 사실 뿐 아니라

감정적인 흐름도 정확히 묘사 되어 있음을

묵상하며 느낀다.

그 수천년을 격하고 내 영혼에 느껴지는 전율을

이 블로그에 곳곳이 묘사해놓았다.

성경은 믿지 않는 십수년 전의 내가 보기에는

전혀 상식에 맞지 않지만

믿어지는 나에게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는

믿는 자들에게만 알려주시는

성령의 비밀이 숨어 있다.

 아는 자들에게도 10%가 믿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하게 해 놓으신 것이시다.

그 나머지의 영역.

그게 믿음의 영역이고

그것은 '선택'의 영역으로 남겨 놓으신 것이고

그 믿음을 선택하고 받아 들이는 순간

'성령'이 임하셔서 믿을 수 없지만 믿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목사님은 설교를 이어가신다.

중국 개방초기 깊은 시골에 들어가셔서 수십명의 마을 사람을 모아 놓고

집회를 마치고 90도 허리가 굽은 할머니 안수하니

순간적으로 펴져서 목사님 자신도 놀라셨다 한다.

존비비어 목사님의 책에서 친구 분이 아프리카에서

죽은 아기를 살리고도 계속 우는 엄마를 보고 왜우냐고 물어보니

그 죽었던 아기가 살아 있을 때 안구가 없어 눈을 뜨지 못했었는데

눈까지 회복되고 시야가 열렸다는 이야기를 본적이 있다. 
 공통적인 말씀이 '자기 나라'에서는 기적이 없었다는 말씀이다.

믿음 문제다.

소위 문명이 발전하면 그들은 교만해지고

주님의 기적이 필요성이 줄어들며 당연히도 믿음이 떨어지는 것이다.

 한데 이 ' 믿음' 은 꼭 기적에만 필요할까?

기적은 왜 필요한가?

부족한 믿음을 위해 보여주는 당신의 살아 있으신 증거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우리 , 정말 믿음이 필요한 환경에 살고 있는

소위 문명인들에게는 믿음이 필요치 않으시던가?
믿음은 어찌 우리에게 회복될 것이던가?

어떻게 해야 우리가 믿음의 이 부분에 대하여

바벨론 민족들 처럼 코웃음 쳐 버릴

하나님의 말씀이 역동적으로 우리 영혼에 역사하실 것이던가?

 꼭 '기적'이 일어나야 되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얼마나 불쌍한 자들인가?

그렇다고 '중국'이나 '아프리카'로 이사갈 수도 없지 않던가?

 

 아니다.

 오늘 '유다' 백성들의 '그날과 그때'에 비밀이 있다.

'그날과 그 때에 돌아오는 길에 울며...' 

감동이다.

열렬한 기쁨의 회복이다.

슬픈듯 슬프지 않고 기쁜 순수함의 회복이다.

'그날 과 그때'는

그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던 유대인'들이다.

그러나, 세상에 살며 회복 못한 눌림에 눌려

이성이 앞서가며 믿음이 부족하던 자들이다.

그들이 환란과 곤란을 겪어가며 다시 회복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풀려나오며 ' 감동'으로 그의 영혼이 벅차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믿음은 우리의 결심 만으로 냉랭한 의지 만을 발휘하길 원하시는 게 아니다.

믿어지지 않는 과정에서 믿음을 선택하면

그 분 하나님은 놀랍게 영혼을 만지시는 것이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어느 순간

우리의 영혼은 믿음으로 굳건해지고 흔들림 없는 성화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되면 상황에 상관없는 놀라운 평강으로 매일 매 때를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게 , '그날과 그 때'다.

 요한복음 16:20-24에 '성령의 충만한 자'의 증거에 대하여 나온다.

기쁨....기쁨...기쁨...기쁨... 이다.

 

 지지난 주 .

토요일 당직을 서기 전에 생겼던 환우 분의 이해할 수 없는

발열과 복통으로 인하여 '재수술' 가능성 고려하며 겪었던

마음의 고통에 대하여 쓴일이 있다.

  나.

의사다.

의사는 예기치 못한 변화가 환우에 생기면

먼저 잘못한 것을 돌아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겪게 된다.

그 잘못은 나의 잘못에 대한 속상함을 넘어서

추후 올 수 있는 의료 법률적인 고통을 생각하게 하고

또한 나로 인하여 고통 받을 환우를 생각하게 되면

그 괴로움은 일반인의 잘못보다 두세배 가중되는 스트레스가 얹혀진다.

 더더구나 의사의 훈련 과정은

모든 가능성을 모아 놓고 거기에 잘못된 점 먼저 생각하고

대처 방안 생각하고 그 병리학적 변화 등을 생각하고

가장 나쁜 경우의 '예후'에 대하여 생각하는 등 훈련이 되어 있기에

'회복'에 대한 기도가 실로 힘들다.

 레이져 (실은 복강경 시술)하면 조직이 전기로 인해 지져지면서

그 부위가 전기적 화상을 입고 잘라지기 때문에

도저히 회복 안되는 어떤 상황이 예상이 된다.

그런 상황에서 기도로서 집중을 하다보면

도저히 회복되어 재생되는 것은

'의학 과학적'으로는 생각하기도 힘들다.

 그날..

 나.

이 부분에 대하여 흔들리는 생각의 큰 파도에서

깨달은 점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시고

모든 병을 고치시는 분이심을 믿는다면

어떻게 내 아는 지식에 대하여 레이져 소작된 부분 만큼은... 이라고

주님을 제한하는 가?

 토요일.

그 저녁 늦게까지 난 환우의 혹시 생길 수 있는 부위를 연상하며

기도를 했다.

믿어지지 않으려는 마음을 그냥 그 마져 주님십자가에 집중하면서

그냥 '아시지요?' 했다.

그러고는 간증에 썼다시피 환우는 금방 '변'을 보면서

회복되고 방사선과 전문의는 '이상없는데요?' 했다.

방금전까지 외과 전문의는 개복하자고 했다.

이게 믿음인 것 같다.

이성적으로 난 분명코 주님 앞으로 가져 갔지만

그동안 난 내 이성으로 제한 하던 부분이 많았었다.

그날, 난 믿어지지 않는 부분 마져 주님 앞에 내려 놓으려는

각고의 시도를 하고 회복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나.

솔직히 회복이 기뻤지만

그 회복보다 내 믿음이 성장했음을 깨닫고는 더욱 기뻤다.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난 놀라운 평안을 맛보았다.

놀라운 기쁨으로 그 바쁜 주일 당직을 받아 나갔다.

 

 오늘.

주일이다.

귀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날이갈수록 하나하나 믿음으로 받아

그 분이 진실로 기뻐하는 내 산제물을 올려드리는 것이시다.

그리하여 '그날과 그때'

나에게 예비된 온전히 회복되는 그 날이 오면

날마다 감동으로 두손 높이 들고 울며 웃으며

내 여명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주님.

기쁩니다.

믿음의 영역에

이제 조금씩 발을 전진함을 느낍니다.

나를 부인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선택하고 전진하려는 노력을 하는 동안

내 안의 부정적인 것들은 깨어져 나가고

내 의지와 이성에 따라서 받을 것만 받고 아닐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철저히 배제하던 이 비신앙적인 자가

이제는 조금씩 어떤 부분에서 그 비신앙적이고 지독한 이성적이던 것을

하나하나 깨뜨려 가게 되니 감사합니다.

정말 귀한 하나님.

당신의 그 날과 그 때가 곧 오리라 생각합니다.

희망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안되지만 주님의 하실 것임을 절절히 '믿는' 그 시간이

곧 다가오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하신 주님.

그날이 되면 제가 주안에 주님이 제안에 계심을

힘있게 이해하고 믿고 느끼게 되어

어딜 가도 어떻게 행하여도

어떤 위치에 놓이고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나에게 내 주님에 대한 감동을 빼앗아 갈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을 줄 압니다.

주님

두손들어 주님을 찬양합니다.

두손 들어 주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제 기쁨... 제 감동 받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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