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나는 주님 계신 고난을 기뻐한다(렘 49: 23-39 ) 본문

구약 QT

나는 주님 계신 고난을 기뻐한다(렘 49: 23-39 )

주하인 2010. 5. 22. 10:59

 제 49 장 ( Chapter 49, Jeremiah )

 


 
24.  다메섹이 피곤하여 몸을 돌이켜 달아나려 하니 떨림이 그를 움켰고 해산하는 여인 같이 고통과

     슬픔이 그를 잡았도다  
25.  찬송의 성읍, 나의 즐거운 성읍이 어찌 버린 것이 되지 않겠느냐 
  다메섹

시리아의 수도.

사도 바울이 회심한 곳.

이슬람의 4대 메카 중 하나이지만 유대인들이 많이 살던 곳.

기독교와 부딪치던 곳.

번성하던 곳.

 그곳이 드디어 주님의 정죄를 받는다.

표현이 가슴에 온다.

'피곤하여 몸을 돌이 켜 달아나려 하다'

어제 당직.

은혜롭게 시작했지만 다가오는 피곤함이 날 힘들게 하기도 했다.

그땐 괜한 불안감이 올라오기도 하고

'떨림이 나를 움키려는 것 같음'을 느끼기도 한다.

실은 비단 어제 뿐은 아니다.

오래전 부터 있어 왔지만 빈도수가 줄어들고

훨씬 정제된 뚜렷한 어떤 이유를 느낄 뿐이다.

 여러 이유가 있다.

현실적으로 수술한 환자들에 대한 괜한 걱정 (의사라면 누구나, 특별히 산부인과 의사의 직업병일수도........)과 당직하며 있을 스트레스, 약간은 현명치 못한 간호사의 잦은 전화 ( 정말 어려울 때가 있다),

그보다는 영적으로 방해 받을 때다.

영적인 것은 그런 것이다.

편안한 나른한 오후.

하지만 묵상의 적용에서 '논문'을 쓰는 것을 영적인 결정으로 받아들였지만

역시 부담스러운 것............등등.

 나뿐일까?

나이든 남녀는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고

겉으로 느끼지는 못할지 모르지만 그 심리의 부담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떨림이 움킴이 심하고 슬픔이 잡음'이 오래되고 심하면

'우울증' 등의 영적 심리적 병이 오는 것 아니겠는가?

 이 표현.

특별히 다메섹을 '찬송의 성읍', '즐거운 성읍'이란 표현을 썼다.

그 안에 있는 기도하는 유대인들이 있기에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들에게 드디어 오래참으신 주님이

칼을 빼드신 것이다.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는 일어나 저 평안하고 염려 없이 거하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거하는 국민을 치라 
  하솔.

얼마나 태평한지 문빗장이 없다 한다.

홀로 거하는 국민이라 한다.

세상에 필요한 게 없는 상태의 평안함 같다.

 뉴질랜드나 캐나다가 이럴까?

자연환경이 너무나 좋고 국민소득 높으니 무엇이 더 필요할까?

 우리 집 맞은 편 집 사람들이 너무 착하다.

그 분들은 외국계 회사에서 특별한 기술로 상당한 고봉을 받고

외국을 자주 다니시며 씀씀이도 여유로우시다.

늘 웃으시고 우리 가정을 그리 좋아하신다.

불신자 시다.

그 분들은 주님의 필요성을 전혀 못느끼시는 것 같으시다.

며칠 전 부인께서 상당히 아프시다.

처음 겪는 부부의 고통이시라 하신다.

아내가 링겔을 가서 놓아 주니 상당히 좋아 하시며

그 아픔의 정도에 비해 너무 심한 심적 부담을 호소하셨다.

 캐나다 재작년 가서 록키산 그 좋은 환경의

적은 마을에 남자 아이들이 대마초에 취해 '동성애 제안'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나로 모두를 해석하려함은 무리가 되겠지만

유럽이나 서구가 겪는 인륜파괴적 감성의 팽배는

모두 너무 편해서 겪는 게 아닌가 싶다.

그들은 그들 만의 평화에 취해 누구하나 그들 영혼에 필요한 존재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다가

실은 영혼이 공허해 진 것이다.

 하솔이 그럴 것이다.

다메섹이 그럴 것이다.

 

 
 
39.  그러나 끝날에 이르러는 내가 엘람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나, 주님은 세상 끝까지

다시 인간의 세상은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

그것은 그들 모두 조차 주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나.

생각할 바가 이것이다.

예수님 믿어가면서도 아직 손발에 식은 땀 나는 두려움도 가끔은 있다.

슬픔이 밀려오는 어려움도 있다.

그러면서 믿지 않는 착한 사람들의 평안한 발전을 보면

속이 상할 때도 있다.

그리고 끝까지 그들의 평안이 유지될 것 같은 모습을 볼때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내 하루의 일상을 보면 아직도 변화가 없는 모습에

당혹해하면서 슬픔이 밀려오려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주님은 무조건 선이심을 안다.

위의 구절도 그렇지 않은가?

주님 안계신 평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평안하다고 어찌 그게 주님의 뜻이고

고생한다고 그게 어찌 주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어떤 상황이든 주님의 뜻이면 그게 옳다.

짧은 인간의 머리로 어찌 판단할 수 있겟던가?

나.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내 어리석은 결점으로 날 비방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님 앞에 서 있으려는 노력을 하는 한 나는 옳다.

나는 옳아질 것이고 더욱 주님 모습 닮아가게 될 것이다.

상황의 힘듦으로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돌아보면,  남을 보아도

고개를 들어 우주를 보아도

결국은 '선'으로 날 이끄시고 세상을 이끄실 것이다.

그러면서도 세상은 그 분이 계심을 느끼지 못하도록

또 그냥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는 불현 듯 주님이 오실 것이시다.

 

주님 만이 진리다.

 

난, 주님 안계신 평안 보다는

주님 계신 고난이 너무도 당연히 기쁘다.

 

 

주님

귀하신 주님.

살아계신 주님

그 주님을 경배하고 살아가는 하루 되길 원합니다.

이제 당직도 끝나고 휴가 하루 내어 쉬려 합니다.

오늘도 변함없는 하루가 될 것이 초조하려 하지만

그럼에도 주님이 날 사랑하심과

날 선으로 인도하심을 알기에 가만히 기다리렵니다.

걱정되어 오려는 슬픔이나  날 움켜 쥐려는 떨림을 막아 주소서.

그게 내것이 아님을 그냥 받아 들이고

주님의 뜻 안에서 그냥 흘려 보낼 수 있길 원합니다.

주님 나에게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한

그것은 나에게 그리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임을 기뻐 받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다메섹)

 

뜻:활발

현재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Damascus)이며 때때로 이곳이 수도였던 국가를 말하기도 한다.
다메섹은 삼면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2,200피트 높이의 평지에 있다.
다메섹이란 지금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커스의 히브리식 발음이다. 본래는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아람의 수도였지만 주전 732년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다가, 주전 64년부터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다마스커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240Km나 떨어져 있었지만, 오래 전 아브라함 때부터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어온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로마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주후 66년 네로 황제의 대 박해 시에 다마스커스에서 학살당한 유대인의 숫자만 1만5백 명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렇다면 그보다 30여 년 전인 본문의 시기에도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사울이 이 먼 도시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사도행전 8장 1절이 밝힌 바, 스데반의 순교로 촉발된 대 핍박으로 인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진 사람들 중에 다마스커스를 행선지로 삼은 그리스도인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울은 그들을 색출하여 예루살렘으로 연행해오기 위해 자진하여 대제사장의 공인을 받은 뒤, 일행을 거느리고 다마스커스를 향하고 있었다.

(1) 수리아의 수도(창15:2)

(2) 다윗이 정복(삼하8:5-6).

(3) 다윗 죽은 후 다시 수리아 왕조의 수도가 됨(왕상11:23-25).

(4) 바울이 다메섹에 도망했을 때는 아레다 4세 총독이 지배했던 때(고후11: 32).
이곳에서 있었던 바울의 회심은 유명하다.

(5) 신약 시대에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행9:2).

(6) 직가라하는 거리는 이중 동에서 서로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행9:11).

(7) 동문 근처에 아나니아의 집터가 있다(행9:10).

* 동문 성벽을 끼고 돌면 바울의 문이라는 곳이 있는데 바울이 이 문에 매달려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