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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 두려움 그리고 선택( 렘48:36-47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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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 두려움 그리고 선택( 렘48:36-47 )

주하인 2010. 5. 19. 15:39

제 48 장 ( Chapter 48, Jeremiah )

 


36.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피리 같이 소리하며 나의 마음이 길헤레스 사람들을 위하여

      피리 같이 소리하나니 이는 그 모았던 재물이 없어졌음이니라 
 
   마음이 피리 같이 소리내시다.

무슨 뜻이신가?

NIV에서는 'lament' 즉, 슬퍼하며 피리를 불었다고 나오신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39.  아하 모압이 파괴되었도다 그들이 애곡하는도다 모압이 부끄러워서 등을 돌이켰도다 그런즉

      모압이 그 사방 모든 자의 조롱거리와 두려움이 되리로다
  모압이 파괴됨.

그들이 무너진 것은 강한 자가 망하는 것을 지켜보는

약한 자들의 '고소해 하는 ' 인간의 악의적 심성으로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하며

한편으로는 그들의 '두려움'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나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은 ' 그 강한 자도 넘어지는 데 자신 같은 약한 자들 쯤이야.. .'하는

어쩌면 실제일 수도, 어쩌면 실체가 없는 '불안한 두려움'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진짜로 저들이 '하나님의 하신 큰 일로 인한 결과 물'로서의 모압의 멸망을

두려워 하였더라면 그것은 옳은 두려움, 

즉, 경외감으로 표현될 수 있는 진실한 두려움이 겠지만

위의 실체없는 괜한 불안감에 의한 두려움이라면

그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진실한 두려움.

 거짓의 두려움
 아직 더 들여다 보아야 하겠지만

두려움은 모두 '선택'의 문제이긴 하다.

 조이스 마이어란 분의 언급에 의하면 인간이 두려워 하고 힘들어 하는

대부분의 두려움은 '거짓 두려움'이라 하며

그 안에는 '존재적 불안감'이 바탕이라 한다.

존재적 불안감은 '내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강력한 자기 정체감이 완성되면 사라지고

그에 따라 삶은 너무나도 기쁨으로 변하고 평강으로 바뀐다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에는 '선택'이라는 자기의 결정이 전제가 된다.

즉, 내가 두려워할 것이 하나님이지

세상이 아니란 것을 알고 명심하는 과정이 '선택'에 속하는 부분이다.

 쉽지 않다.

 그러나 주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하여

기독교인이 되고 영생의 자격을 얻은 우리는

두려워 하지 않고 경외할 자격이 있고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

선택은 매사다.

매일 말씀을 선택하고

주님 십자가 앞에 내려 놓고

주님 뜻안에서 살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은 자유를 의미한다.

상황이 어떻든 그것은 '두려움'이라기 보다

'경외로운 자유'다.

 


4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그가 독수리 같이 날아와서 모압 위에 그 날개를 펴리라 
 ' 모압 위에 날개를 펴시다'

이 구절을 보며 난 영화에서 그림자 짙은 새의 형체가

땅을 덮어가며 어두움과 두려움이 짙어가는

'미이라'라는 영화의 사막을 어둡게 물들여 가는 어두운 그림자나

만화영화의 여러 장면들이 연상된다.

동시에 '날개'라는 단어에서

그 펼쳐 덮어가지는 것이 '독수리 날개짓 치며 올라가는 ' 성경구절이 연상되며

오히려 두려움 보다는 힘찬 기상이 연상되기도 하고

' 암탉의 날개아래 끌어모아지는 주하인 병아리'가 연상되어

두려움 대신 '따스한 평안함' , 평강이 연상되기도 한다.

 왜 이 구절에서 이리 사뭇 다른 장면이 연상되어 오는가?

그 연상과 더불어

잠시 두려운 마음이 내 심장을 두근 거리게 하더니

곧, 어두움이 옅어지고 대신 잠이 올듯한 편안함과

아바타 영화의 날아다니는 공룡 같은 독수리의 날개짓이 연상되어

'힘과 자신감'이 솟아 나오는 듯도 하였다.

 

 그 차이는 무엇이던가?

잠시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 하는' ,

자신이 하나님의 제자인 줄 모르고 풍랑이는 바다 위의 뱃속의 사도들 같이

주님 예수님의 멀리 보이시는 물위의 실루엣을

기쁨 보다는 '유령'으로 착각하는

자신을 모르는 ,

즉 마이어님의 '자기 정체성'을 잃고 살아가는

불안한 대부분의 현대인 같은 선택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고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깨어 있는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것이

그 원인이 아니던가?

 

 그러나 다시 잠시의 시간 후 

난 다시 내가 주님의 자녀 이고

난 약속 안에 있는 자임을 명심하며 

아니,명심이 되며 (- 이것이 중요하다 , 명심이 되는 것이다 .  주님의 이유다.. )

말씀이 상기되고

그 날개짓 치며 모압을 덮어 내리시는 그 그림자가

하나님의 도우심임을 깨닫고 독수리처럼 힘이 돋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주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기뻐할 선택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점점 더 말씀이 내 삶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다.

그리고는 '암탉의 날개 밑' 그 따사로운 '감성'의 포근함이

내 영혼을 자극하는 것이 느껴진다.

 

 어제 마이어님의 동영상을 보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 분 , 여 목사님은 아버지의 지독한 성폭행 속에서 커오며

오랫동안 마음고생 많이 하며 자라다가 드디어는 하나님 안에서 깨닫고

아주 많은 영적인 글을 써가며

드디어는 목사님이 되고 마이어재단을 설립하며

전 세계에 좋은 강의와 35권의 책을 통하여 선한 영향을 끼치시는 분이시다.

그런 분이 설교 중 이런 이야기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러게 느끼지요.

 느끼지요.

 느끼지요...

 그리고는 요.. ?'

      

  느낀다는 것.

감정이 아프다는 것.

감정이 상했다는 것.

그것이 사람을 우울로 몰고 죽음으로 몰아갈 위험한 것이고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이긴 하지만

그 것은 실은 느낌 이상의 것 ,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말씀에 집중하여 말씀을 선택하고

그 말씀이 해결해 주시는 경험을 체험하고

삶이 폭이 자신도 모르게 넓어짐을 느끼는 게 중요하며

지금 어렵고 두렵고 힘들어도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러함을 인정하고

그냥 말씀을 '선택'하는 훈련을 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이 증인이라 하였다.

 

 나.

 주하인 .

 월하랑..이었다.

상처 투성이 , 아픔 투성이 , 분위기 어두운 달아래 울부짖는 , 건드리지 않으면 착한  늑대.

그러다가, '월하인'

달빛아래에서 외로움은 사실이지만

점차로 사람답게 변해가는 나를 그리 칭했었다.

그게 '생명의 삶' 큐티에서 수년간 활약하던 내 닉이었다.

그러다가 '주하인'으로 바뀌어간다.

그것은 모두 '말씀' , 주님의 말씀,

즉, 주님을 느끼고 명심하려는 약간의 선택으로 빚어져가는 결과였다.

아직도 과정은 틀림없다.

 

 그러면서 이 블로그에 수년간 올리던

내 모든 글의 주제를 요약하라면 이렇다.

' 주님의 말씀을 선택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그 놀라운 평강, 즉 샬롬'을 느끼고

결과물로 주어지시는 '성화'와 '천국 백성의 자격'을 누리며

주님이 원하시는 한도에서

내 달란트에 맞는 이 땅의 축복을 누리며 살다가자' 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을 가까이 하는 선택'을 놓치지 말자는 것이다.

나머지는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다.

 

 나.

오늘 늦잠잤다.

주님 말씀 몇분 들여다 보지도 못했다.

그리고는 굉장히 바빳다.

오랫만에..

겨우 점심 시간에 블로그에 글을 옮기려는 데

전화가 여러차례 울린다.

이런 경우 두 가지다.

급하지 않은 병동에서의 물어보는 전화... 기다려도 된다.

정말 급하면 핸폰으로 온다.

또 하나.

실크로드 연습하러 가자는 독촉 전화 - 요때만 전화한다 ㅜ.ㅜ;;- 다.

그래서 그냥 안받았다.

블로그에 글 옮기기 전, 환자보면서 틈틈히 정리해가던

며칠간 찍었던 사진을 마구 디렉토리에 담아가는 순간.

문이 확  열리며 실크로드 총무 인 K과장이 얼굴을 드밀면서

왜 전화... 한다.

어이가 없다.

꼭 받아야 할 일이 없음은 위에 설명했다.

그리고 조금 늦음은 괜찮다.

늘 그렇듯 먼저 모인 사람들 먼저 연습한다.

그런데 이 친구.. ... 캐릭터가 좀 묘한 구석이 있다.

먼저 가라고 하고 내 하던 작업 마져 했다.

속이 뒤틀리려 한다.

괜히 이렇다.

요 수개월 동안 묘한 캐릭터가 날 자극함을 말씀 가운데 인내 하면서도

조금 삐닥히도 내 아픈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지 말까.. ? 하는 생각이 들려하고

가서 어찌 내 흔들리는 마음을 들키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얼른 기도했다.

두려움이나 미움은 사라진다.

그냥 믿고 내려 갔다.

샘누리홀.

강당.

자연스럽다.

가만히 차분히 그러다가 올라왔다.

 

 오늘.

두 두려움 사이에서 '선택'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계셨다.

주님의 날개 그림자.

비바람 치는 호수 배위의 사도가 쳐다보는 풍랑 속의 예수님 그림자.

그 그림자를 어찌 바라보는가는 모두 자신의 선택이었음을

난 깨달았다.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하신 것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께 받은 것중 정말 좋은 것이

바로 이러한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 것이다.

 그 선택의 과정 과정을 통하여

주님 앞에 나가는 것을 보시며

그 분이 안타까운 마음과 사랑하심으로 보내주시는 '성령'의 충만한 도움으로

이 삶 속에서 '예술과 같은 작품'을 만들어 냄으로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

그리고 그것을 보시는 ' 내 삶의 작품의 PD'이신 하나님께서

매겨주신 '작품성'에 대한 점수를 통하여

상급이 결정되는 것이다.

 

 두려움.

두려움을 두려워하기보다

두려움의 진실함을 먼저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 두려움이 주님을 경외하기 위한 두려움이 아닌 이상

모두 사단의 것이다.

아니면 치유해야할 두려움이다.

그럴 때 '말씀'을 선택해야 하고

기도를 해야 한다.

주님의 임재를 기다려야 한다.

 오늘 하루.

날 흔들려 다가오는 '감정의 왜곡'을 단호히 거부한다.

주님의 말씀 가운데 '사랑'을 선택한다.

적용

1. 말씀을 세 장 읽겠다.

 깊이..

 

2. 말씀을 선택한다.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하다.

 

3. 기도한다.

 올바른 말씀이 , 지혜로 떠 오르도록..

 내 감정에 휘둘리지 말도록..

 감정은 감정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임을 믿도록..

 

4. 난 주님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 받은 자다.

 잊지 않는다.

 

5. 선택은 나의 상급을 결정한다.

 선택할 기회를 주심을 감사드린다.

 두려움 조차 기회다.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주님이 계시지 않는 다면

전 어떡해야 했을지 소름이 끼칩니다.

주님.

주님을 모를 때 제가 자꾸 싸나워지고 드세지고

세상을 바라보던 그 악한 심사를 기억합니다.

늘 불만이고

세상에 다 부족한 자들 뿐이고

믿을 사람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절해 고도의 외로움과 세상에 대한 원망도 있엇습니다.

그럼에도 이 엉터리를 구원하셔서

지금껏 인내하시고 관심과 사랑과 평강으로 인도하셔서

이제 주님의 사랑을 깊이 명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허락하시는 '선택'안에서

제 자유의지 가운데서의 주님께 영광드릴 기회가

저에게 있음을 알게 됨이

너무나도 감사드리나이다.

 주여.

주님의 날개.

그 크고 웅장하고 두려운 경외의 현상이

세상에 펼쳐질 때

그들이 갈곳 몰라 두려워 할 것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기도 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저로 하여 늘 지혜가운데 거하게 하소서.

두려워 할 것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경외할 것을 두려워 하지 않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시여.

제 자식들 그리하게 인도하시고

제 아내 그리하게 하시고

제 가족 그리하게 하시고

제 아는 모든 분들 그리하시고

특별히 이 땅의 외로운 '사도분들 ' 그리 인도하소서.

주님 갈길 잠시 흔들려 어려워 하시는 모든 분들 지키소서.

지혜와 사랑과 쉼과 여유를 허락하소서.

흔들림은 주님을 위해서 그리하게 하시고

이제 곧 다시 말씀 가운데

그 약속 가운데 중심 잡히신 평강으로 서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또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합니다.

그리 될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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