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믿음의 우선은 절박함이다[마9:1-8] 본문
속이 타들어가는
간절함이 있던 것이
그 어느 때 였던가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질 만큼
절절히 바란적은
또 언젠가
내 마음 모아
하나님 앞에
이처럼 뜨겹게
기도할 수 있길 원한다
주님 뜻 안에서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위가
그분께 영광돌리도록
그처럼 간절함 말이다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본 동네.
가버나움
그의 어린 시절, 인간 본연의 모습 ( 돌잔치 상의 고추 내놓은 사진...ㅎㅎ.. ^^; 죄송 .. 불경.. ^^;; ) 까지
다 아는....
그래서 믿음의 대상으로 '예수'님을 모시기에 힘든 곳.
배에 오르사 건너가..
예수님의 공생애는 늘 , 항상 주위에 사람이 들끓는 상황이다.
자신의 시간이 없으시게 늘 사람들은 모두 문제를 가지고 주님을 탈진할 만큼 모여든다.
그러시면서 '배에 오르사' 그 잠시의 시간을 쉬실 수밖에 없는
엊그제 묵상의 피곤한 삶이시란 이야기시다.
그 분이 '건너가' 가버나움에 이르자 마자....
그렇다 .
표현은 그렇지 않지만 분명히 이르자 마자
또 몰려드는 사람들의 뉘앙스로 느껴진다.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모여드는 사람들 주에
중풍병자를 태운 침상이 다가오고 있다 .
기다리고 있다가 '잽싸게... ' .
정말 위의 뉘앙스와 연결해 보면 '잽싸다'는 표현이 적절치 않은가?
예수님을 견디지 못하게 '자신'들의 문제 만을 가지고 몰려드는...
그런데 문제는 ' 본 동네'에 있다.
그들은 풍문에 들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는 어떠했다.
그 크는 모습이 참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너무나 '인간'적인 성장의 모습이었는데
그가 커서 '하나님'이라시면서 '기적'을 행한다.
아마도 개중에 많은 사람들은 '반신반의 '하면서
조금은 다른 지역보다는 힘이 빠진 모습으로 ,
즉 '믿음'의 크기가 타지역보다는 적은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한명이라면 그 자신의 몸만 이끌고 '터덜터덜' 구경하는 마음으로
안되면 말지.. 하는 마음으로 나왔을 것을
이 사람들은 다르다.
한 명의 병자를 싫고 오기에 최소한 네 사람 이상이 붙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 나오는 것은
하나로 된 마음이 되는 것도 놀랍지만
그들 모두가 '중풍 병자' 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도 놀랍다.
그렇지 않고야 그렇듯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올까?
아마도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침상을 지고 가려면 더 서둘러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예상했듯이 '터덜터덜'한 마음, 구경하는 정도의 마음 자세로
과연 그들이 그러하듯 한 몸처럼 서둘를 '심적 동기'가 부여 되었을까?
한 사람이라도 지척거리면 침낭이 질질 끌렸을지도..
그러함에도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알듯이 그들은 천장 지붕을 뚫을 강력한 무엇이 있었다.
거기에서 난. .,. 우선 '병자'의 건강할 시 했던
그 사랑의 크기를 우선 생각한다.
감동적으로 그들을 하나로 묶을 만큼 '사랑의 크기'가 컸던게 분명하다.
오늘은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랑에 감동한 그들은 그 당시의 의술로서 불가한 치료에 대하여
들은 풍문이 있을 거다.
'예수'
하지만 풍문을 따라 더해지는 '아는 자'들의 '의혹'.
갈등...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그 갈등을 밀고 예수님 앞으로 나올 하나된 모습은
'믿음'이다.
"그 분 만이 고치실 수 있다 "
그렇다 .
믿음이 있어서 그가 고침을 받고
그들은 기적을 목도한 것이다.
그런데 상황을 설명했지만
믿음이 생긴 이유가 무엇이던가?
사랑에 의한 절박함.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 아니시면 고칠 곳이 온 우주 아래 없다... 는 것.
그 사실을 모두 깨달은 것.
그렇다 .
믿음은 절박함이 있어야 한다.
절박하게 믿어야 한다 .
그래야 기적을 본다.
절박함.
그 대상이 어딘가가 중요하다.
하나님이 세상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이유.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삶을 보시고 기뻐하시기 위함."
그 놀라운 진리를 위하여 우리는 십자가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러나.. 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기쁘고 즐겁고 점차로 커지는 영적 기쁨이 있음은
잘 알고 그 사실을 기뻐함에도
난.. 저렇게 절박함이 있던가 다시 한번 반문한다.
기도원에 와서 나무 뿌리 몇개를 뽑고 가며
삼각산 - 그 옛날 유명했던 기도의 장소 ! - 산지가 흔들리고
밤새 내리는 눈이 온몸에 덮이는 줄도 모르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앉았던 자리만 눈이 녹아 있었다는 전설의
그 절박함들이 과연 나에게, 아니 오늘 날 우리 주위에 남아 있던가?
솔직히 기도원, 그들.. 을 보면
기도의 주제가 '병고침', ' 자식 잘됨', '.. .이다.
그것 .. 위의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보면 '믿음'도 아닌듯하다
예수님이 '밤을 쪽배에서 맞아가며' 다음날 가버나움에 내리면서
또 죽도록 밀려드는 군중들의 자기 이익을 위함을 보시면서도
그냥 병을 고쳐주시는 그 깊은 사랑의 근거도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것을 보는
그 한가지 바램으로 이 부족한 인간들을 참아내시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저들, 중풍환자와 그 친구들을 보면서
그들의 '믿음'의 단순하고 솔직함,
저급하지만 돌직구의 믿음을 보면서 그리 떨쳐내지 못하시고 받아들이심은
그들의 그 믿음의 바탕을 비록 '병고침'이란 단순함이지만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신다.
그래서 기적으로 낫게 하신다.
그렇다 .
정말 필요한 '믿음'의 첫 조건은 '절박함'이다.
오늘 나에게 말하시는 조건은 '절박함'이다.
그 내용이 조금더 고급스럽고 본질적이면 다행이겠지만
너무 이상만 높고 간절함이 없는 믿음은 실족의 위험이 높다.
밍밍하고 맹맹한 믿음이 되기 쉽다.
균형잡힌 믿음은 절박함의 우선을 동반한 하나님의 뜻대로의 기도다.
주님.
제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
이제는 주님 주신 입장에서 '청지기' 의 역할 감당입니다.
주여.
그러나 그 당위성을 이제는 앎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 자신으로서의 나를 찾는데만 몰두하여
제게 주신 직분자로서의 나에 대하여서는 약한게 사실입니다.
주님.
말은 이렇듯 거창하게 하지만
무슨 내용이신지는 주님이 너무도 잘아시리라 압니다.
주여.
아시지요?
이제 제 안의 격변을 받아들일 때입니다.
거꾸로 시작한 세상을 보는 눈.
남들처럼 직분과 위치 사이에서 나.. 를 통하여 세상을 보지 않고
본질의 나...
완전히 순수의 나에서 세상에 접근해 들어가니
주님...
그 얼마나 스스로와 세상에 당혹스러운 일이 많이 벌어졌는지요.
다양한 이유로 그리 하심을 이제는 압니다 .
나 같은 자도 있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영적 원리를 더 깊이 세상과 나 자신에 알게 하는
직관의 눈을 허락하심..
그러함을 감당하여 가고 있음을 알지만
이제 역으로 평범한 세상 속의 나로서 다시 위치를 스스로 가지길 원합니다 .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로서의 평범한 나.
그러기위하여 부딪치는 가치관들의 혼란들을 잡으소서.
그래서 아직 제대로 이루어 놓치 못한 평범한 가치들이
바로 잡히길 원합니다 .
주여.
간절함이 큽니다 .
주님이 아시는 바, 제게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존경받는 신앙인,
존경 받는 아버지
존경받는 남편,
존경받는 사회인이 되길 원합니다.
주여..
주님이 하셔서 그리 되길 원합니다.
이제 저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간절함입니다.
그리 귀한 진리가 정말 삶속에서 깊게 깊게 제 영혼에 뿌리 박히는 가치가 되어
더 이상은 흔들림이 없고
에너지의 빠짐이 없는
그러한 자 되길 원합니다.
이제 그러다가 주님 부르시면 하시라도 붙들고 있는 미련 없이 두손들고 할레루야 하고
갈 수 있는 제가 되게 하소서.
내 주여.
날 붙드소서.
두려움 없게 하시고
힘없음 사라지게 하소서.
제게 부닺히는 어리석음들을 만지소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제 잔이 넘치는 생이 되게 하소서.
간절히 빕니다.
절박하게도 빕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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