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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와 안 믿는 자 (행5:12-2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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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와 안 믿는 자 (행5:12-26)

주하인 2007. 9. 13. 08:38

제 5 장 ( Chapter 5, Acts )

 

( 주님 향한 내 마음, 가을 하늘 대추처럼 싱싱하게 열매맺기 소원합니다. )

 

 

 믿는 다는 것.

 

아침의 묵상의 명제는 그것이다.

 

12.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믿는 사람은

마음을 같이 해야 한다.

공동체의 구성원끼리

혹여 혼란이 있을 여지가 있어도

주님을 공동의 선으로 모인 지체들이므로

무조건 마음을 같이 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모여야 한다.

믿음은 홀로 떨어져 있는 독불장군일 시

필시 넘어지고 실족하기 쉽상이다.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참고 인내하고

용인하고 감싸고.....

 

믿는 자로서 나와야 할 현상이란다.

의지로 앞서서 노력하기 보다는

주님께 의지하고 내려놓고 고백하고

주님이 좋아하시니까

주권적으로 남들과 같은 마음이 되길 선택하고

주님의 그리해주심과 기뻐하심을 믿음으로

나타나는 현상.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모든 자들이

다 나처럼 즐겨하지는 않아도

그 길이 옳기에 외롭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것.

 

 그 믿음의 길은

고독해도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끄덕일 수 밖에 없는

선의 길.

 

 오늘은 전인치유의 날.

돈 안되고

시간 남아도는 자만 하는 것이라고 손가락질 하던 사람이 많을 것 만 같은

조여드는 마음에도

홀로 외로이 무대에 서는 일이 많았어도

시간이 지나니

동조하는 분들이 나타나고

원치 않는 '라파팀'이 구성이 되며

동역자들이 나타난다.

사내 게시판에 올려진 글을 통해서

동조하고 격려하는 분들이 많다.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는 증상이 위에 나온다.

상종하는 자가 그리 많지 않아도

칭송하는 자가 나타난다.

 

좁은 길.

 

 

 

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믿음은

주께로 나오는 것 만이 유일한 길이다.

 주 이외에는 어디에도 길이 없다.

곤란과 현실을 이유로

세상을 먼저하고

주님을 뒤로 하는 모양은

아무리 주님을 명분으로 해도 믿음이 아니다.

믿음의 모습과 행위도 뒤로 밀려서는 되지 않는다.

 

우선은 주 앞에 나와야 한다.

주님 앞에 겸허해야 한다.

자꾸만 큰 무리를 이루듯이 믿음의 행위가 커져야 한다.

 

 

 

16. 다 나음을 얻으니라 
 믿는 자들은 회복이 있게 된다.

기적도 있게 된다.

치유가 있게 된다.

무엇보다 영혼의 왜곡이 나음을 입게 된다.

시기와 질투와 고민과 갈등... 의 지옥의 감정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화와 온유, 기쁨과 열정이 회복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외적인 조건에 있지 않고

주님으로 인하여 절대적으로 경험되어야 만 한다.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그러나,

이러한 믿음의 조건과 증거들이 이론 대로 쉬운가?

 

 

 어제 고백한 대로

습관적으로 일요일 이후  주중까지는 마음이 멍하다가

다시 회복되기를 되풀이 한다.

 그래도 예전에는 엉터리 처럼 멍하게 살았던 게 거의 대부분이 것을 그나마 다행이기는 하다.

( 풀 꽃 같은 날 맞아주신 하나님이 난 참 감사합니다.) 

 어제는 수요일

오랫만에 일찍 퇴근하여

펑크난 타이어를 고치고

정말 마음과 몸이 피곤하여

어떻게 할까 - 친구 통해 피곤해소할까... 등 - 기다리는 중 망설이다가

힘을 냈다.

 얼른 들어가 옷을 갈아 입고 헬스를 향했다.

운동하고 땀을 뺀 후

더 피곤 했지만

걸어서 갈 수 있는 유원지 안의 기도원 - 이걸 주님은 나에게 축복으로 선물하신 거 같다.

세상의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육적 영적 동시 축복이다.  ㅎㅎ  걸어가면서 눈을 쉬고, 도달해서는 영이 맑아지니... - 으로 가서 앉았다.

 가는 동안

가서 앉아 있고 얼마동안

머리에서

눈 안쪽에서 지진이라도 난 듯

힘이 들다.

피곤하여 견디지 못할 것만 같고

머리는 깨질 듯하다.

눈 감으면 잠이 들어 버릴 게 무섭다. 

 굳이 집중하려 하지 않았다.

성경을 보려니 눈이 빙빙도는 것 만 같다.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의 손이 그를 가려서 잘 지냈다는 구절이 들어온다.(삼상 7절 어디..)

나도 그랬으면..

 

목사님의 설교가 이어지신다.

가슴이 열린다.

 피곤한 육체 위에 놓인 머리가 맑아지며

눈 속이 촉촉해진다.

마음이 텅비어진다.

눈물이 나려 한다.

슬프지 않은데 눈물이 나는 것은

주님의 특기다.

 

나 처음 영접할 때도 그랬다.

은혜 받을 때 꼭 그러신다.

목사님의 설교는 은혜를 배제하고 들으면 '도덕책'읽는 것 같다.

말씀은 잘하신다.

자신의 지식 자랑하는 것만 같다.

물론, 믿음의 귀로 안들으면...

그런데,

문제는 그런 설교와 그런 불신적인 귀의 현상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변화는

진한 사랑의 영화를 보았다거나

깊은 영감의 음악을 들었다거나

감동이 있는 휴먼 스토리를 읽었거나

나를 깊이 위해주고 공감해주는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닌데도

눈물이 나고

마음이 열리고

깊이 기쁨이 스물거리며 찾아오는 것이 신기하다.

 

그러면서

육신이 나른해진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온다.

설교 중에

들릴 듯 말듯

'할렐루우우우 ~이~야  하알알~레~엘~루~~우~우우우~~우 ~우 ~야 ♬ ' 하고 나온다.

중얼 중얼.

이게 하고 나서야 정신차리고 보니 하고 있었다.

 " 내 영이 주를 찬양합니다. "

이 고백이 그 고백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 혼자 만의 체험이 아니지 않는가?

만인이 공감하는 찬양.

만인이 느끼지만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힛트치는 찬양이 아닌가?

그것을 나는 콧노래로

이 피곤한 몸에

이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앉아 있다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세미하게 그렇게 보이신다.

 

이게 믿는 나에게 나타나는 믿음의 현상이다.

이게 내가 믿을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믿는 다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하는 절대적인 것이다.

머리로서

합리적으로 이해되고

아버지나 어머니의 교육에 의하여 형성된 습관이고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따라가는 대세가 결코 아니다.

 

믿음은 그렇게 해야만 하기에 하는 것을 당연하게도 믿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결핍이 있는 존재가 그 결핍을 인식하고 하나하나 벗어내고서

나를 만드신 자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다가

때가 되면

그 분이 계신 곳으로

이전 보다는 훨씬 정결한 영혼이 되어서 가는 길이다.

 정결해지는 것은

우리 주님이 계심을 믿음으로 만 가능하다.

주님이 믿음과 그에 따른 우리의 간구를 통하여 하신 응답으로 가능하다.

 

 난 기쁘다.

힘들지만 기쁘다.

시간이 지나면

경제적 환경과

육신적 환경과

관계적 환경은

조금씩 나를 조여 오겠지만

고난이 커진 만큼 주님으로 부터 오는 위안은 커진다는 성경의 고백이 내 고백이 될 것을 알고

그 체험을 자주 시켜주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난 기쁘다.

 

 

 목사님의 말씀이 절묘하게 이어지신다.

' 은혜 받아도 내려가서 까지 유지가 될까?

  편안과 평안은 다르다.

  ...........................'

 

사단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란 것이다.

 

당연하다.

오늘 묵상 구절에서도

시기하는 무리가 반드시 있지 않은가?

 

믿는 초기에는

믿음이 무조건 모든 걸 다 이룰 것이고

전혀 거기에는 혼란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란

막연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다가

은혜 후의 더 큰 사단의 공격에

좌절하고 주저 앉는 경우가 많다.

또, 많았다.

 

 어제의 나도

오늘 아침에는

잠시 흔들린다.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하지만

믿음이 깊어지면서

사람들의 참여가 적어도

사단 들의 환경을 통한 , 다양한 방법으로 흔들어도

깊은 밤처럼 어두워도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말씀하고 인도하실

그 분 하나님의 말씀이 계실 것을 알기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어제 같은 기쁨이

어제까지의 혼란과 힘듦 사이 사이에

자주 자주 경험이 되어 진다.

시간이 지나면

주의 사자가 직접 기적을 보이듯이

내 영혼의 평강의 기적은 보이시리라 생각한다.

흔들리지 않는..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주님은

때가 되면

이들 사도들에게 처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이러한 요구를 하실 것이다.

 

" 이제는 때다.

 흔들릴 이유가 없다.

 가라.

 성전에 서서 하듯이

 어디에서든

 이 살아있는 하나님을 전하라.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 "

 

그게 앞서지 않아도 될 것을 이제는 안다.

주님은 때가 되면 날 일으키실 것이다.

내 의욕이 그 분을 앞서길 원하지 않는다.

내 떨어지는 헌신이 날 열등감으로 , 안절부절로 가라앉히기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지도 않을 것이다.

그냥 기쁜 마음으로

주님이 시키시면 하고

주님이 자격이 안된다 하시면

기쁨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콧노래 부르면 된다.

 

주여

한가지

세상의 고민을 속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네요.

주님이 해결해 주시던가

내 속에서 받아들일 여유를 주소서.

주여

그로부터 자유케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믿음주신 걸 감사하고

주님 뜻대로 따를 수 있는 제가

들르시는 모든 분들이

내 주위의 모든 자들이 되실 수 있도록 도우시길 간처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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