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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레네 (8:1~ 13)

주하인 2007. 1. 25. 08:26

  2007-01-25 마가복음 (Mark) 8:1~8:13
 

 

1.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3.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 )

 

 

 어제 수요 예배 설교 시간에 목사님께서 기도의 방법에 대하여 설교를 하시면서

화살기도, 주기도문을 집중적으로 되풀이 하는 기도 , 감사의 기도와 수도원에서 하는 '미제레네'라는 짧은 기도를 되풀이하는 방법에 대하여 설명하시었다.

연약한 우리의 심령을 사단의 끊임없는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의 기도문을 되풀이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아침에 묵상에 아니나 다를까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라는주님의 말씀이 나온다.

이걸 버스 안에서 읽으면서 난 속으로 '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바꾸니 더 깊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가만히 묵상을 계속하다 보니 어제 저녁 목사님의 입을 통하여 설교하신 그 미제레네가 바로 이 말씀이 아닌가?

 주님은 이렇게 나에게 조금씩 조금씩 더 힘있게 다가오신다.

 

 상황은 이렇다.

무리가 3일간 먹을 것이 없음에도 그 분의 말씀에 집중하다가 헤어지는 길이다.

 그 중에 무엇을 했을까?

당연히도 주님께서 육신이 약한 자들도 고치셨고 기적으로 다양한 축복도 허락하셧지만 그게 그 무리의 전부였을까?

주님이 불쌍히 여기고 가련히 여기실 어떠한 일이 있으셨지 않을까  당연히?

만일 무리가 자신들의 육적인 관심, 세상 사의 해결로만 모여들었다가 돌아가면 3일 동안 배고픔도 잊고 한사람 같은 마음으로 뭉쳤을 수가 있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돌아가는 그 길에 주님께서 애처러운 마음이 덜 했지 않았을까?

 

어제는 다른 때 보다는 조금 일찍 수술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다.

저녁에 일요일 오후 찬양 연습을 할 악보를 정리하고 -급히 - 교회에 갔다.

예전과는 다른 시간의 촉박함으로 가며 급조된 악보라서 속으로 걱정을 했다.

이렇게 되어서도 은혜가 따를까?

 그러나 , 걱정은 결국 아무 이유도 없는 사단의 장난임이 또 들어 났다.

비록 연습 찬양이지만 어제 호산나 찬양대는 주님의 성령으로 달 떴다. 

한마디로..

어제 11시 다 되어서야 연습이 끝났다.

아무도 가자는 소리를 하지 않했다.

 

 주님께서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것이다.

물론 사이 사이 기적을 보이시고 연약한 나같은 자를 위해 여러가지 위안을 하시기도 하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3일을 - 그 큰 무리 중에 반드시 아이들도 끼어 있었을 것을.. .- 식사도 잊을 정도로, 물론 먹을 것도 없었지만  배고픔도 불사하고 그처럼 집중할 이유와 그 이후 예수께서 오늘 표현될 감정의 뉘앙스를 가져오시기에는 어제 있은 우리의 집중과 성령감동을 확대 시켜보면 쉽게 이해가 가능한 부분이다.

 

이 큰무리에게는 '세상 사의 관심'보다는 훨씬 더 크고 뜨거운 무엇으로 하나가 되었단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의', 그리고 그 분이 허락하시는 '평강'의 기쁨으로 하나가 되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이런 주님에 대한 집중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분의 긍휼을 더욱 자극하여서 그 분께서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기회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

문제는 순서다.

항상 주님이 말씀하시지만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의'를 구한 후에야 그 분이 우리에게 가지신 긍휼하심이 더욱 커지고 그리하여 세상의 축복도 오게 되는 것이지 절대로 무리에 속하여 - 기독교인 이라는- 세상의 관심사만 가지고는 , 물론, 다양한 축복이 열정적으로 간구함으로 들어주시는 역사도 있지만 진심으로 그 분의 사랑과 더불어 큰 축복이 오지는 못할 것이라는 얘기다. 

 간구하고 비는 그 문제는 틀림 없이 주실 테지만.. .

( 닭이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이랬을 겁니다.   " 미제레네 !!!")

 

 

 이제 오늘 주님이 가르치시려는 것은 확연하다.

기다리라.

아무리 아무 것도 이루어진 것 없는 것 같아도...

그냥 그 분의 원리와 진실을 가슴을 열어 놓고 기다리며

틈틈히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며 기다리면 된다.

'미제레네, 미제레네, 미제레네'

그러면 그 분이 내가 가진 거 훨씬 더 큰 원리로 날 축복하시고 이끄신다.

최근에 조금씩 느껴진다.

 

그리고 또하나

3일간 굶은 무리 중에도 '칠병'과 '이어'는 남아 있다.

주님의 축복의 근간이 되는...

항상 부족감에 드는 마음은 난 아무 것도 못할 자라는 자괴감 같은 거 였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내 가지고 있는 것을 아신다.

그것을 가지고 주님은 축복을 하실 것이다.

차고 넘치는.. .

어리석은 바램과 세상적 머리 굴림은 놓아야 한다.

 

 

 

 

 
12.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표적을 구함.

이것은 세상적인 관심사가 대부분이다.

앞으로 할 것을  보여 달라는 것이니 전향적일 것이 틀림없다.

'주님... 이거를 할테니 이걸 보여 주세요.'

가끔은 어린 신앙인들에게는 표적이 필요할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이런 것인 것 같다.

늘 그 분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고 사는 삶.

그래서 환경과 상관없는 평안이 유지되는 삶.

그리하여 더 이상 그 분이 계신 지 안계신지 의구심을 조금이라도 가질 필요와 이유를 못느끼는 삶.

실은 표적을 구한다는 것은 그 분의 임재하심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이유이다.

 늘 아버지가 곁에 계심을 알면 그 이상 무엇을 더 필요로 하겠는가?

혹시 가끔 삶의 질곡으로 , 본인의 어리석음으로 , 아니시면 주님의 우리의 성장을 이유로 잠시 모습을 보이시지 아니하셔도 후향적으로 돌아보아 우리 인생의 곳곳에 그 분의 흔적이 계셨음을 돌아 볼 수만 있고 다시금 마음을 주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그 분을 쳐다 보려는 노력을 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의 표적이 무슨 이유가 되겠는가?

마치 오늘의 큰 무리가 주님의 진실한 기쁨으로 달떠서 3일간의 배곯음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 처럼 그냥 기다리고 주님을 바라기만 하면 될 것을...

그분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표적처럼 전향적이고 세상적인 갈구보다는

주님 나라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그분의 평강에 대한 열렬한 기쁨을 향유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그 기쁨을 놓치기 싫은 소원으로 인한 세상적 어리석은 일체의 노력을 포기할 줄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거기에  살아계신 표적을 후향적으로 살펴보고 만족할 수 있는 흐뭇한 미소 정도가 필요할 뿐이다.

 

 

적용

 

1. 나에게도 七餠과 二魚는 있다.

  좌절할 이유가 없다.

 

2. 주님은 나의 가진 것을 들어서 주로 쓰신다.

   나의 장점은 무엇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묵상한다.

 

3. 주님의 살아계심을 느낀다.

 

4. 미제레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를 자주한다.

 

 

기도

 

절묘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어찌 생각하면 모조리 다 제 얘기를 매일 아침마다 쓰시는지요?

주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늘 살아계셔서 날 인도하시는 하나님 부족한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소서.

모든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 뜻대로 하소서.. 하는 고백 할 수 있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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