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모두 주께 가져갈 소리들[욥3:1-25] 본문
23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24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25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욥이 고통을 못이겨
드디어 부르짖는다.
얼마나 힘들면 여러 단어들을 통하여
그의 힘듦을 표현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앓는 소리' 라는 표현이다.
이를 악물고 참고 또 참았지만
스스로의 앓는 소리가 입을 뚫고 나오는 '끙끙'거리는 소리..
다른 거는 저처럼 아파보지는 않아서 모르지만
아주 어릴적 대퇴부 골절이 생겨 시골의 'D' 의원에 가
동네 방네 어르신들 모두 걱정스레이 모여들어
내 다리를 붙들고
의사 선생께서 내 다리를 맞추고 (지금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을... )
기브스를 한다음에 풀었다
유치원 다니던 그 시절의 난..
그 고통과 그 후의 한달여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또렷이.. .
아마 .. 그 때의 입을 비집고 나오던 소리..
그 소리가 '물이 쏟아지는 것'같은 비명의 소리들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앓는 소리'다.
참고 또 참는 잇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앓는 소리가 비명의 소리처럼
자기 귀에 들릴 정도라니............
다른 것은 모르는데
저 분의 저 표현이 수천년의 시간을 격(隔)하고
내 마음에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 아. 그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힘들구나.. '
그런데 그의 부르짖는 고통의 대상이
타인을 향하거나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소리들이 아니다.
그냥 아픔을 절규하지만
자신에 대함이다.
자신을 비하함이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외침이다.
이거.. 정말 정서상으로 중요한 포인트인듯 싶다 .
과거의 상처들로 인한 아픔인 경우
타인을 향하거나 할 때 강한 '화'로 변질 될 수 있으며
자신을 향하여 질타할 때는 자기연민이 쌓여 '우울'로 바뀔 수 있고
더구나 그러한 원망이
홀로인 경우는
그의 영혼은 참으로 변질 될 위험성이 있다 .
하지만
오늘의 욥의 고통의 소리는
그냥 자신의 상황에 대한 아픔 만을 철저히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들어주실 분이 있으심을 인식하고
그분, 하나님께 그냥 아픔을 있는대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참으로 건강한 외침이다.
오늘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고자 함이 이것인듯하다 .
"모두 주님 앞에 가져오라
주님께 있는대로 외치라
앓는 소리 조차도 들으신다'
욥님은 욥님의 성장에 따라
더 많은 시간과 큰 정도의 고통을 허락 받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주님이 주님의 시간에 풀어주실 것이시며
더 좋은 선으로 우리의 고통을 바꿀 것이다 .
그래야 한다 .
모두 주님께 가져가야 한다 .
모든 소리를 다 가져가야 한다.
단, 원망은 금하여야 한다 .
주님.
저도 아픔이 많았습니다 .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아픔의 원인이던
'원망'이 사라지며
대신 그들을 긍휼히 바라보는 여유를 허락하시었지만
아직도 남은 아픔이 있을 때마다
주님은 그것을 통하여
주님 앞에 다가오게 하시는 도구로
허락되었음이 서서히 인식되고
그럴 때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꾸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주여.
아직은 '앓는 소리'의 아픔이 있을 때 있습니다.
내 귀에 내 소리가 물처럼 흐르는 아픔으로 남아 있을 때
이제 다시는 원망의 메카니즘으로 돌리지 않고
온전히 주 앞에 '호소'하는 소리로만 바뀌게 하소서.
내주여.
저를 바꾸시고
얼른 환경 마져 바꾸시고
영혼의 온전한 순수로 바꾸소서.
내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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