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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렇기 위해(적신과 적신 사이)[욥1:13 - 1:2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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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렇기 위해(적신과 적신 사이)[욥1:13 - 1:22]

주하인 2014. 7. 10. 09:06

내 모습 가리워져

 지금 보이지 않더라

 

 서 있는 곳 낮아

앞을 바라보기 힘들다 해

 

아무리 애를 써

엄습하는 것

절망 뿐이라 할지라도

 

나 그래도 

내가 피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리라

 

나 그러기위해

오늘도

주만 바라 보고

또 바라보리라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평안 중에 연속 일어난 상상하기도 힘든 모진 일..

얼마나 힘들면

겉옷을 찢고 .......저랬을까?

 

그래도 믿는 우리에게 다행인 것은

(정~말 ~ 다행이다.

 나도 돌아보면 건너기 힘든 과정들을 거치면서

 매달릴 곳이 없었다면 아마도 ......ㅜ.ㅜ;;  성치 않거나

 존재치 못했을지도 모른다 ............ )

기도할 수 있단 것이다

그 기도의 대상이 '진실'이고 '진리'이고 '현실'이고 '실제'인 것이

너무도 다행이다.

그래서 내 속의 모든 진액을 다 짜서

그 분 앞에 토해낼 수 있고

결과적으로 내 인생의 그 모진 과정을

결국은 이해해 낼 수 있게 됨이

너무도 다행이란 이야기다.

 

 욥님이

욥기가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고난 투성이의 장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장(場) 중의 하나임은

그들의 인생, 거의 모두가

누구와 비교할 수도 없는 '고난 투성이'이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을 관통하시며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그들은 인정함 탓이다.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옛날 개역 한글 시절

알몸을 '적신 赤身' 즉, 붉은 몸

산부인과 의사가 애기를 받아 들어 엉덩이를 두드릴 때

아이는 첫 고고성을 지르면서

온몸에 산소가 돌고

몸이 '발~개 '지는 그 순간,

오늘도 또 한생명을 건강히 받았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같이 내쉬게 되는 데

그 붉은 몸,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태어난 그 경이의 순간,

그것을 '적신'이라 표현했던 바

난.. 이 표현들이 좋다 .

 

솔직히 '개역 개정'은 너무 쉽게 표현하려 애쓰다 보니

'詩적'인 표현들의 감흥이 줄어든게 사실이고

찬양의 가사도 마찬가지다.

한문이 줄 수있는 그 '비디오적, 멀티미디어적, 시적'인 표현은

한글 만으로는 좀 그렇다.ㅎ

 

 각설하고

적신으로 태어나

돌아 갈 때도 역시 적신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게 사실이고 그게 진리이고

거기에서 벗어난 그 누구도 없다.

히틀러도

박정희도

칸트도

법정도

교황도

정주영도 그랬고

이제 곧 '이건희'님도 그럴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

이 짧은 80여년의 삶속에서

어찌 그리 많이 움켜 쥐려 노력들 했던가?

 영원 속의 티끌이고

적신의 너무나도 정확한 원리를

우리는 보면서도

왜 그리 손을 펴지 못하는가?

손을 펴자고 소리지르는 철학자들이 어쩌면 그리 대단해 보이는가?

이 너무도 대단하고 확고 부동한 진리앞에서

오늘 욥은 또 왜 그리 대단하던가?

 

무엇이 그를 그처럼 아무것도 아닌 확실한 사실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한 시점 부터

성경이 언제 없어질 지 기약이 없지만 ㅎㅎ .. 그 때까지

조금이라도 깨어 인생의 현실 ^^;; 앞에 눈을 뜨려 하는 자들 모두에게

오늘 처럼 또 묘한 감정을 가지고

그들의 심성을 흔들어 댈까?

 

왜 그럴까?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적신으로 오고 가는 그 사이의 과정을

저리도 눈멀게 하고

이 인생에서 벌어지는

온갖 '희로애락'에 대하여

울고 웃고 화내고 사랑하려 하고  몸부림 치려하며

왜 어이없고 잡신 투성이의 논리인

'포스트 모더니즘'

"네가 옳다, 네 하고 싶은 대로 하라........' 고 떠들어대는

그 영적 혼탁의 시대가

기승을 부리며 그 안에서 흔들려야 한단 말인가?

주하인.. 마져..........

 

 무엇이

욥을

저렇게

고백하도록 만들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무엇이

그 가슴아픈 절대의 고통 앞에서

욥을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는..

그 분의 그 온전 무구 하심을 의심하지 않게 하던가.. ...............

 

아..

만일 내 아들 KJM과 KJH가 저리 되었다면

만일 내가 지금 이자리에서 쫓거나

월급 제대로 받지 못하고 푸대접 받는 늙은 의사로서 쫓겨난 다면..

아내와 떨어지고 온통 사방이 절해고도의 외로움으로 몰려난다하면..

갑작스레이 나나 내 식구나 가까운 분들이 '암'이라는 선고라도 받는다면............

 

나 그토록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살려 애썻고

나 그처럼 기쁨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찬양을 드렸으며

나 그래도

내게 주어진 '좌절' 조차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약함을 기뻐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동참하는 자로 나를 맞추려

도저히 심사상, 내 심령상 어울리지 않는 자리로 까지

나를 낮추고 깍아가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발견한

이 귀중한 '자유'로움의 원리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는데

과연

저런, 욥같은 현대의 고난에 부딪친다면..

과연 그때도 저런 '온전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쩌면 겉으로는 설령, 그럴수 있더라도

내 심사 깊은 곳에서도 온전히

이 짧은 인생, 적신과 적신 사이의

허망한 인생 중에서

그래도 하나님의 뜻은 선하겠지........하며

이 너무도 당연하지만 너무도 유지하기 어려운 믿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왜 적신 과 적신 사이의 원리를 알면서도

그 허망한 인생의 고민은

또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니지 않게 하고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그랬듯

또 똑같이 고민하고 갈등하고 원망하고 흔들리다 가야만 하는가?

 

그게 사람이니까...

그게 원죄의 결과니까..

그게 믿음의 낮음이니까.. 함은 안다.

 

그런데 왜 원죄를 넘어설 예수 십자가의 온전한 혜택과

왜 앎을 넘어서는 고통으로 여지없이 넘어지냐 말이다.

 

여기에 깨달음이 있게 하시는 것이시고

정말 믿음의 성장을 원하심이시다.

 

누구나 '욥'처럼 될 수있는가?

하지만 누구나 욥처럼 되어야 만 하는

성장의 필수불가결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 엉터리 인생'에 허락하신 이유시다.

그게 '광야 사십년'을 돌리신 이유시다.

 

다시한번 적신과 적신 사이로 나를 돌아다 본다 .

그 사이의 혼란에서 흔들리지 않고

이 짧고 유한한 인생의 광야에서 담대할 수 있기 위하여서

우리의 눈이 '영원까지 ' 펼쳐져야 한다.

 

하나님의 가장 선하심

우리의 결국의 승리

적신과 적신 사이의 아무것도 아님이 자연스러움을

나름대로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관심은

이 땅에 국한되지 않음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귀신들이나

세상의 모든 종교를 가장한 '잡신'들의 관심은 결국 '이 땅'이다.

기복주의 적 기독교인들도 그렇다.

이땅의 복이 '기준'이다.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

윤회를 주장하고 다른 논리를 펴지만

그것은 논리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

 

 오직 '하나님' 만이 '영원'을 주장하시고 보장하신다.

그러기 위하여 '예수님 십자가'를 우리에게 주셨다 .

그 십자가를 타고만 우리는 영원의 삶, 영생을 허락 받았다.

그게 '복음' , Gospel , 가장 복있는 소리이며 가장 귀한 진리다.

 

 그러한 우리의 관심은 당연히도 이땅이 아니란 것이다.

영생이다.

그러고 보면 이해가 좀 가지 않는가?

그것 마져 소망이다.

이 땅의 것, 그렇다고 도외시던가?

우리는 안다.

욥이 결국은 더 큰 축복을 받았단 것을..

 

 이땅의 먼저 죽은 자식들..

영생에서 같이 .. 아닐까?

우리가 그것을 어찌알까?

이 미련한 강아지 들에게 computer와 clauding을 이야기 해도

그들이 이해할까?

성서에 나오는 '영적 '비밀 만 가지고도 머리가 터진다 .

영원과 '지옥' 이야기는

하나님이 그냥 흘려서 느끼게 하시는 정도는 그런 이유지 않을까?

 

오늘

내 눈을 더 넓히란 말씀을 하신다.

적신과 적신의 100% 원리가 사실임을 다시한번 깨달아

욕심을 내려 놓고

이 사이, 인생에서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모든 현상조차

시간이 지나면 흔적조차 없어질 별~것 아닌 것이기에

불교에서 소위 말하는 백팔 번뇌에 얽힐 이유가 없을 것이며

결국은 우리의 모든 것은 '승리'이고

가장 선할 것이기에

오히려 '감사'로 받아야 한다 .

약한 것을  기쁨으로

압박과 곤란을 감사로

예수님 십자가를 생각하며 참으면

그게 강함이라고

이 적신과 적신 사이의 '생활 강령'으로 주시고

그렇게 결심할 때

내 노력을 넘어서는 '성령의 보혜사 '로 은혜를 퍼부어 주신 후

이 인생광야 사이 반석을 뚫고 축복을 주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채우시다가

결국 요단강 넘어 축복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심이

그 원리 아닌가?

기뻐해야할

적신과 적신을

슬퍼하지 말라

당황하지 말고

혼란하거나 원망하지 말라..

하나님은 그리 모습을 드러내시는 아침이시다.

 

감사하다.

 

 

주여.

오늘..

욥님을 통해서 다시 '원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주여.

알지만 문제에 묻히면 다 잊어 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저 올시다 .

모르면서 파묻히는 자 보다 더 죄된 느낌으로 주님 앞에 서지만

주님은 또 말씀으로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성령의 은총으로

이렇듯 깨우시고 바꾸십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 나를 돌아봅니다.

아직 세상의 변화에 따라 더 나아지지 못한 듯 하지만

내 머리는 더욱 팽창되어가고

내 마음은 지평이 넓어지며

이제 마음은 점차로 더 평화로와 집니다.

샬롬입니다.

자유입니다.

그처럼 바라는

이 인생 광야의 내 삶의 기조가

평화이고 평강이고

궁극적 주님 안에서 자유입니다.

주여.

당신께서 저에게 , 세상모두에게 주시려고

십자가 지셨음을 믿고 감사드리며 고백합니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하나님이시여

저와 제 가족과 저를 아는 모든 분들이

주님의 임재 가운데서

어서 어서 적신의 감사를 누리게 하소서.

그 당연한 인생의 원리에서

손을 감사로 놓을 수 있는 자들 되게 하소서.

 

내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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