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긍휼과 교만 사이[욥5:1-27] 본문
내 속에
이런 꽃도 피고
또 저런 꽃도 피어 있습니다
그 중 어떤 것은 이쁘고
또 어떤 것은 좋아보이나
다른 어떤 것은
만족스럽지 못해 보이기도 합니다
아직 온전히 피어나지 못해서 인지
시들거리기도 해 보이고
조금 보기 싫은 것도 있습니다
주여 비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영혼의 모든 것
주님위해
긍휼의 꽃 노래 부르는
그런 제가 되게 하소서
1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아멘이다.
당연하다 .
하나님은 그러신 분이시다.
심지어는 옳지 않은 친구의 모습을 보이는 이들의 입에서도
옳으신 하나님 이야기는 나온다.
27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
문제는 이들의 뇌리 속에는 ' 우리가 연구한 바.. ' 라는 소리처럼
'교만'이 있고
친구의 아픔을 '더 위로하고 ' 더 가슴아파 하고 ' 더 공감해주어야 ' 함에도 불구하고
참지 못하고 질 타하는 ' 교만' 이 있음이 문제다 .
어찌 '자기 자랑'이
타인의 극단의 고통 앞에서 나올 수 있을까?
그들은 일주일간은 잘 참았다 .
그러다가 결국 입을 떼어 '지도'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공의의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
인간의 본질적 결점을 이야기한다.
참 옳은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시작은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아니 , 안타까움이라고 착각된 '분석'이었을 것이다.
그동안의 인내는
교육과 훈련으로 익숙해진 '예절' 탓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는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욥'의 결점을 지적해내고있다.
그들은 그의 결점을 드러냄을 통해 자신들의 우월감을 드러내고자 했음이다.
그러던 결정적 단서가 '우리가 연구한 바.. ' 라 한다.
어찌 남의 아픔 앞에서 '자신'을 이야기 할까?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드는 생각이 이것이다.
'이들은 그렇듯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무결점으로 살았던가?'
정말 그런 사람들이 이 인간세상에 존재하던가?
예수님 이외의 그 누구가 죄에서 자유롭던가?
설령 그들이 그런 죄를 짓지 않은 것 같아도
그리 드러나지 않음은 '욥'같은 고난에 부딪치지 않아보았던가,..
자신들의 죄는 잊어 버리고 기억하지 못하던가...
숨겨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인간들은 그런 죄악성을 가지고 있다 .
타인의 불행이 내 행복,
남의 집 불구경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그것 원죄다.
나..
그렇지만 저들처럼 당연히도 자신에게도 있을.. 아니 넘칠 그런 죄를
욥,
그것도 처절한 고통 속의 욥을 향하여 질타함은
욥의 운명이 다했음을 느끼며
더 이상 욥이 힘있는 친구,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친구로서의 힘이 없음을 깨달아가며
어쩌면 자신들의 '금지된 빗장'- 이 이상 넘으면 안될 무의식의 선'- 을 넘어가는 것이다 .
그러면서 자신의 깊은 곳에 있는 죄성을
'투사' 를 통하여
그, 욥에게 쏟아 붓는 것이다.
그러면서 통쾌한 죄악적 쾌감을 만족시키고
그를 질타한 자신의 지혜로움에 '악한 전율감'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
그 본성은 어쩌면 '숨겨 놓았던 비교'의식이었을 수도 있다.
인간은 그렇다 .
그런 인간성은 수천년을 거쳐 나오고
그렇듯 세상이 발달하고
많은 심리적 지식의 발달과
도덕적 성찰과
철학이나
세상의 종교의 흥망성쇠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아니 이제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완전히 빗장이 풀어져
세상을 향해 사람들의 영혼 속을 횡행하는
악의 세력들이
온 세상을 관영하고 있다 .
'죄악이 관영한다'는 성경의 표현대로.. .
그래서 예수님이 오실 수 밖에 없으셨다.
참으로 십자가 아니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만한 영혼이 없음은
오늘의 말씀 묵상에서
그대로 들어난다 .
나..
오늘 주님이 나에게 들여보라 하시는 말씀은
'공의'를 가장한
내 안의 비교와 교만으로 나타나는 상대적 결핍감 등이
상대를 진심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누르지 못하도록
경계를 하심이다.
또 , 최소한 아픈 자를 위하여
같이 가만히 있어주는 하루가 되길 바라심이기도 하다.
비평을 말자.
나를 드러내려 하지 말자.
오히려 감싸고 사랑하자.
어려우면 예수님께 기도하고 성령을 간구하자 .
오늘 그러자.
주님.
요즈음 며칠 제 뇌리속을 떠도는 묘한 쾌감을 눈치 챘습니다.
주님 만은 아시리라 압니다 .
그것이 오늘 욥 친구의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나름..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의 공의를 눈치채고
주님의 사랑을 빌미로 자유롭다 생각하며
그러하지 못한 자들에 대한 차가운 비판의 칼.. 을 들이 대려는
내 속의 좋지 못한 쾌감 말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시고
올바른 맘을 허락하소서.
내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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