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感謝에 대하여 ( 욥 9:14-20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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感謝에 대하여 ( 욥 9:14-20 )

주하인 2008. 9. 16. 08:52

제 9 장 ( Chapter 9, Job )

 

 

 먹을 것 주니

눈에 빛이 난다.

엄마가 아이에게

'기도하고 먹으라'는 말을 듣고

얼른 안수하는 흉내를 냈더니

조 아이가 저리 순박한 얼굴로

머리를 드리댄다.

머리가 동그란게 얼마나 이쁜지..

 

주님은

아이들의 그 천국 백성의 모습을

나에게 자주 보이셔서

내 심성이 맑아질 기회를 주신다.

행운아다.

그렇지만

이런 축복이 없는

고난의 연속이어도

주님 만으로 기뻐해야 만 한다.

하지만..

아직은...

잘 몰겄다. ^^;;

 

아기의

양쪽 뺨의 점이

돋보이는 사진이다.ㅎㅎ

 

 


14.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무슨 말을 택하여 더불어 변론하랴  
 

 감히

정말

어떻게

주님께 변론할 생각을 할수 있을까 ?

그럼에도

정말 그런가?

자주 주님께 뗑강을 피지 않았던가?

지금도 그런 마음이

내 영혼

잔잔한 바닥

저 아래에

흐르고 있지는 않는가?

 순간

기회만  주어지면 올라오는

이 불만쟁이

죄악덩어리 주모야..

 

 

 

15.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심판하실 그 에게 간구하였을 뿐이며 
 

  욥이 말한다.

다른 자가 말하면

말장난이나 철모르는 변론이라고나 하지.

그는

깊은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이리 말한다.

 

 하지만 느껴진다.

처절히 인내하면서

입으로

겨우겨우 신음하듯이 쏟아내지만

그 마음 속에 충돌하는 갈등이 얼마나 클 것인가?

그럼에도

그는

주님께 감히 대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의 일생에

그 하나님의 동행하셨던

놀라운 기억이

그 영혼을 잡고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18.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 
 

 그럼에도

그는 고통스럽다.

하나님이 직접 고통이야 주시겠느냐 만

그 허락된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바로 위의 고백 후에

탄식하듯이 터져 나온

그의 '苦聲'인 것이다.

 

 

 당직섰다.

어제..

당직서면서

다행이도

TV의 유혹에서 많이 벗어나

책한권을 떼었다.

 '전광 목사님의 '평생감사'라는 책이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우리 기독교인이 마땅히 취해야 할 기본자세가

감사'라는 것이다.

거기에 나오는

수많은 예화 속에서

'욥'과 '사도 바울'의 고난에 대하여서도 나온다.

욥은 고통 중에서도 감사했다.

'적신으로 나와 적신으로 갈지니 ... 그래도 감사하리라'는

놀라운 고백도 나오고

사도 바울께서

그 어려운 고난 - 수십번 태장, 죽을 위험.. - 중에서도

감사에 대하여 놀랍게도 고백하는 모습 등이 나온다.

가볍게 읽을 책이지만

기초 부터 다시 확립시키기에

좋은 내용들이 많았다.

은혜로왔다.

 

내용 중 일부에

감사에도 3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그 첫째가

자기 보다 나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온전하게 주어져야 하는 감사.

그 감사는 실제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감사로

현대인의 '~ 하면 감사하리라'는

조건 부적 감사로

유아적 감사.

 

둘째는

자기 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여

그래도 낫다.. 하는 마음으로

그제야 드리는 감사.

 조금은 성장했지만

이것도 온전한 감사가 되기는 어려운 감사. 

 

셋째는

조건에 상관없는 감사.

'욥'의 감사.

다윗의 쫓기는 시절의 '감사'.. 처럼

여호와 하나님 자체로서 감사하는

그 감사를 말한다.

 

 하나님이 임하시고

예수님이 동행하시는

그 놀라운 체험으로 인하여

느껴지는 영혼의  흔들리지 않는 '평강'으로

감사드릴 수 밖에 없는 감사.............

 

 오늘

욥이 신음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나타낸다.

감히

이렇게 고통스럽지만

주님께 원망할 수 있겠느냐..라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훈련만 받았더라면

과연 그 고통 속에서

그러한 고백이 가능했을까?
그가

너무나도 정의롭고

불의를 참지 못하지만

주님의 사랑하심을

영혼 깊숙이 체험하지 못하시었다면

이를 악물고 참지만

저런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

그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받고

그 사랑 안에서

감사로 익어가는 자다.

그는 절대적 감사를 아는 자다.

그러기에

그의 고백이 이처럼 호소력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고자 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 분은

일상에 흔들림이나

축복 여부에 상관없이

늘 똑같은 '감사'하는 마음을 보고 싶으신 것이다.

 

 감사를 받고

기뻐하시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그 감사하는 자의

선함을 나타낸다.

악한 자가 어찌 감사할 수 있겠는가?

감사도 감사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만족의 표현일 뿐이다.

온전한 감사에 가까울 수록

그 사람의 영혼의 온전한 성화에

가까움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과연

늘 감사할 수 있을까?

 

 어제 책을 읽고

오프라 윈프리가

14세에 미혼모가 되고

아이를 잃고 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감사일기'를 쓰기 시작하고 나서

대 성공을 이루는 과정의 예화를 읽고

나도 그리 한번 해보았다.

예전 보다는

감사의 거리가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가장 기뻤다.

그럼에도 자꾸만 슬금거리면서 다가오는

부정의 감각들이

나의 감사의 요건들을 흐리려 한다.

주님께 기도하면서

생각나는 대로

감사거리를 되뇌어 보았다.

 마음이 여유로와 진다.

깨달음이 많아진다.

 

아..

그렇다.

감사하다 보니 행복해진다.

행복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었다.

책에 나왔던 내용이다.

그게 느껴진다.

 

아..

그렇다.

이 감사의 기쁨이

성령 충만한 기쁨과 비슷한 느낌이다.

주님은 기쁨이다.

감사는 주님의 원하심에 다가가는

필수 요건이었다.

 

 난,

아직도 불충분한 자다.

온전히 주님 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가?

나에게 주어진

지금의 환경이 순식간에 빼앗겨 지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핍박과 곤란 만 짓쳐오면

난 정말 당황할 것만 같다.

식구들에게 눈치를 살피느라

마음이 졸아들고

날 아는 자들의 조롱이 두려워

마음이 좁아져

감사의 여건은 남아 있을 것 같지 않다.

그게

지금까지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환경에 상관없는

감사한 체험이 많았다.

성경에서

종말의 때에도

예수님을 옳게 믿는 자들에게는

'그날이 감해질 것이다'라는 체험과 비슷한 체험들..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주님의 인도하심이 뚜렷이 느껴지던 시간들..

그 시간이 있어서

난 감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암울해 보이는

그런 상황에서도

'감사'는 할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나름대로의 실낯 같은 기대를 해본다.

 

적용

 

1. 주님께 감사한다.

 주님 만으로 감사한다.

 

2. 저녁마다 '감사 일기'를 써 본다.

 

3. 성경 여섯 장 읽겠다.

 

4. 나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감사한다.

   불평은 멈추겠다.

 

5. 말씀이 내 원함이 되길 원한다.

  그래서 기뻐지고

 그래서 감사할 수 있기를 원한다.

 주님 말씀대로 닮아가니...

 

 

 

 

기도

 

주님

참으로 어려우면서도 쉬운 일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려는 마음.

그동안 어리석게도

자기 연민에 자주 빠져

주어진 놀라운 흔적들을 잊고 살아왔었음을 고백합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것이 참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주님의 감사하는 마음 허락하심이

더욱 감사했습니다.

제 자식들이

착한 것도 감사합니다.

큰 건강의 이상이 없어서 감사합니다.

주님

특별히 금번 추석에

어머니가 교회에 나가신 것 감사합니다.

앞으로 주어질 축복도 미리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시여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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