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말씀으로 담담함(행27:12-26) 본문
(행27:12-26)
13.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환경이 풀어져 남풍이 불어오는 것 같아도
그게 꼭 '주님의 축복'은 아닐 수도 있다.
20.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거꾸로 힘든 환경이 꼭 '주님이 안계신 것'은 아니란 이야기다.
환경에 의하여 일희 일비 하는 내 마음의 변덕을
또 주님의 뜻으로 착각치 말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 님은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 뜻대로 행하다가 겪는 이 고난의 상황에서 어찌 생각할까?
어떤 마음일까?
나 같으면 미워할 수도 있었을 수 도 있겠고,
최소한 그들을 '무시'하고 픈, 비웃음을 웃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님은 '담담함'이 정답이다.
어찌 그럴까?
내가 바라는 저 담담함.
상황에 상관없는 저 담담하고 담대함.
환경과 상관없고
타인들의 잘잘못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 잘나고 못남이 그리 큰 관심의 영향 권 안에 있지 않는 것....
그 담담함.
그 담담함을 난 배우고 싶다.
21.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
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오늘 주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내 레마로 받아 들이게 된다.
'말씀' 하시는 것을 '말씀'으로 듣는 것.
말씀을 내 환경이나 내 특질로 왜곡시켜 듣거나
아예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은
타격과 손상을 의미한다.
인생의 그 크고 다양한 변곡점에서 올라갔다 떨어졌다하며
어지럽지 않을까?
난... 담담함이 간절하다.
흔들리지 않길 원한다.
상황은 어쩔 수 없어도
난.. .안그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영혼은 '말씀'으로 가득차길 원한다.
말씀을 말씀으로 받길 원한다.
로고스를 레마로 받길 원한다.
그래서 '담담'해지길 원한다.
성장을 원한다.
현실을 보면 답답하다.
가지고 있는 것 얼마 되지 않지만 마구 널뛴다.
내 나이 52, 얼마나 더 현역에 있을 수 있을까?
사고는 나지 않을까?
더 이상 열심히 해도 재주 좋은 분들과 비교하여 제자리 걸음이다.
권력(?) 의 중심에서 멀고 ㅜ.ㅜ;;
권력의 중심에 다가갈 능력도 없고 관심도 없다. ^.^;;
그러면서도 세상은 권위와 권세자를 친하고 싶어한다.
친한 친구들도 비슷한 나이들.
가정으로 회귀하고 힘없어한다.
모여서 얘기를 해도 노인정 아류를 보는 듯하다.
자식들.
마땅할 만큼 성공의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ㅜ.ㅜ;;;;;;
내 마음을 내려 놓을 만한 의지처가 없어 보인다.
외로워지려 한다.
나.
산부인과 의사로서 진료실에 앉아 있다 보면
많은 분들, 비록 남자를 볼 기회는 보호자 이외는 거의 없지만..ㅎ
우리 연세 주위에서 겪는 혼란들을 많이 본다.
아니.. 점점 더 젊은 사람들에게서도 번져간다.
그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하나같이 그 깊은 원인은 '외로움'이다.
어차피 '유한한 인간',
외로움이 숙명이다.
거기에 '경쟁', '비교', '나쁜 말'... 에 의한 부담은
우리의 삶이 그냥 '지옥'과 다름없도록 도 만든다.
'유리굴라 '광풍이 꼭 남들이야긴가?
어리석은 인간들..
어차피 죽음이 숙명인바 잊고 열심히 살도록
이 인생에서 프로그래밍 된 것처럼
순풍이 다가오면 그게 다 인것 처럼 처절히도 열심히 살지만
결국은 또 유리굴라가 오면 당황하고야 만다.
그 외로움은 환경을 빌미로 더욱 강하게 그들의 심령을
불로 짖이기듯 한다.
그게 되풀이 된다.
그러면서 점점 광풍에 의한 아픔이 커지고 상처로 남는다.
중년의 나이가 되면서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살던,
그들 안에는 공통적으로 '행복'보다는 '광풍'에 의한 상처와 아픔만 남고
'본질적 외로움'은 더욱 커진다.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속성..........
나.
그 나이다.
그 나이의 깊은 한 가운데 와 있다.
광풍이 불면 더 큰 곤란을 겪을 나이란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흔들릴 때, 휘~청 한다.
그러나 곧 일어난다.
일어나고 점차로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럼에도 아픔은 아프다.
조금 조금 덜 아파지지 만...
힘들고 손을 놓고 싶은 깊은 어려움이
때로는 좌절감으로
때로는 외로움으로
때로는 무기력으로
수시때때로 밀려온다.
그럴 때 어느땐 아침에 자다가 일찍 일어나 벌떡 앉아 있기도
어느땐 저녁에 잠이 안와 뒤척이기도
또 어느땐 머리가 복작이기도
또 다른 때는 기절하듯이 피곤에 잠들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다행인 것은 이전처럼 그리 오래 그런 광풍에
내 몸과 영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들리되 덜 흔들린다.
난..........
그 시초의 시작점을 안다.
'말씀'이다.
그래서.. 난 늘 묵상을 할 수 밖에 없다.
내 영적 든든함.
바울님의 그 담담함을 사모한다.
바울님은 그 '유라굴라,' 수일간의 어둠과 폭풍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정체는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 들이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사자를 늘 느끼는 것이다.
어제 ..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하던 중
말씀의 적용도 없었지만
그냥 사모가 되어서 기도원에 갔다.
내 퇴근 길 중간에 있다.
난.. 이게 감사하다.
내 광풍은 어제도 여지없이 날 치려 했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내 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온해졌다.
깊은 기도와 함께 다시 내 마음은 평정이다.
이제 정말 필요한 것이 이것이다.
더욱 '담담함'
더욱 기뻐함.
나의 조삼모사함이 사라지고
늘 말씀안에서 기뻐함이다.
오늘 주님은 사도 바울님의 담담함을
내 담담함으로 사모하길 말씀하신다.
적용
1. 말씀 세장 읽겠다.
2. 광풍은 있을 수 있다.
믿는 자 , 주님을 열렬히 사모하는 자에게도 있을 수 있다.
말씀대로 따르면 덜 생기는 것이다.
지금의 혼란에 흔들릴 필요 없다.
3. 담담하자.
상황과 마음은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
단 , 사실은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이고
말씀을 붙드는 순간 난 무조건 '선'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죽어도 '천국' 아니던가?
세상에 별.. 인데 ..무엇으로 미련을 열심히 가져야 하는가? ^^;; 죄송
4. 내 끝은 무조건 선이다.
주님은 나를 기뻐하신다.
내 주위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라도 기뻐하자.
기도
내 주님.
내 귀한 주님.
날 광풍에서 조차 함께 하시는 내 주님.
주님으로 인하여 난 흔들림이 덜합니다.
그게 감사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점차로 담담해져가는...
사도 바울님의 그 온전한 담담함이 사모됩니다.
주여.
절 붙드소서.
난 주님 붙듭니다.
담담함을 허락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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