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나의 멜리데(행28:1-15) 본문
(행28:1-15)
주여
나와 동행하는 자들을
위해서라도
담담한 제가
되길 원합니다
인생의 멜리데가
날 흔들려 다가와도
주의 빛 때문에
중심 잡히게 하소서
비 바람 몰아쳐도
이제 제 영혼은
늘 고요한 담담함으로
흔들리지 않게 도우소서
1.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멜리데.
고난 후의 위로.
연단 과정 중의 쉼.
특별히 주님 만을 쳐다보며 겪은 고난 후의 승리.
3.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그리고 그 후의 예상치 못한
또다른 '고난'.
엘리야님도 대 승리 후 왕비 이세벨의 위협에 광야로 도망하며
깊은 우울에 빠졌다.
멜리데는 어쩌면 열심을 다한 믿음의 싸움 후에 기대되는 '축복의 기대'일 수 있다.
그러나, 멜리데의 본질은 기대하는 축복과는 반대로 오는 작은 고난이 아니던가?
사도 바울님.
정말 당당하고 담담히 유리굴라의 고난을
오직 하나님 만 바라보면 이겨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응답, 죽지 않으리라는 말씀에 합당한
멜리데라는 섬에 도착했다.
그 감격은 얼마나 대단했을까?
얼마나 푹신하고 든든한 모래 해안었을까?
머리속에 그려지는 그 지중해의 하얀 모래 밭에 내려
둥글둥글 둥글기도
누구는 영화에서 보듯이 모래 한줌 집어 하늘 높이 집어던지며
야호.. 하고 외치었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편안함이었을 것인 상태다.
그런데, 그 멜리데.
그 축복이어야 할 곳에서 '사도 바울'은 뱀에 물리게 된다.
사람들의 악한 질책이 쏟아진다.
물린것도 서러운데 '악하다'고 한다.
그것도 하나님을 같이 경험한 자들 마져 그런다.
그럴때, 엘리사처럼 그도 그리 가라 앉아 버려야 함이 당연한 것 아닌가?
우리.
삶 속에서 멜리데는 어떠한 의미인가?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 하던 분들이 '주저 앉아' 늙은 닭 신앙이 되어 버리는 것.
끝없을 듯 하던 고난을 잘이겨 나와 이제는 되었다 싶었는 데
또다른 고난이 밀려와 '하나님이 안계신 것 아냐? ' 라는 의혹으로 괴로워할 때,
'왜 나만 그래......' 라는 생각이 짓누를 때.....
사도 바울님은 어땟는가?
그냥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렇다 .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고난이 없고 축복이 넘치기만 하는 것만도 아니요,
열심히 주님 보고 달려 갔을 때 놀랍게 성공만 하는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멜리데 현상이 왔을 때
아무렇지 않는 툭툭털어버림이 당연히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 안,
그 영혼의 움직임에는
' 그러함에도 , 그러심에도... ' 라는 강한 흐름이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은 그래도 살아계시고
지금은 이래도 주님의 더 큰 뜻이 계실 것이다' 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고
'그 끝이 무조건 선 임을 확신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을 보라.
뱀에게 죽지 않았다.
멜리데로 인하여 더 기뻐하지도
멜리데의 뱀으로 더 죽지도 않는 게 그다.
아파도 일어나고
죽어도 죽지 않는게 우리다.
오히려 그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우리 영혼에 믿음으로 인한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하여
더욱 담담하고 감사한 평강으로 채워져 가고
우리의 일상은 어느새인가 모르게
주님의 축복으로 단단하게 되어가는 것이다.
그게 멜리데의 허락된 이유다.
그 것을 봄으로 그들이 믿지 않는자,
믿지만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를 드러내게 하심이
우리를 그렇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마치 나사로 죽은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영광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그 뜻의 본질처럼..
11.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배에 진절 머리가 났지만 다시 '배'를 탔다.
비록 봄이 왔지만 그 기억이 잊혀지랴.
나.
진저리나는 인생의 고난을 몇개 건너왔다.
늘 의사로서 나 혼자만이 아닌 삶 속에서
더욱 큰 좌절감을 맛보면서도 ..
그러면서 여기까지 왔다.
독사가 물려도 조금은 면역이 생긴다.
이 삶 속에서 탈출하고 싶어 그토록 몸부림치며 기도도했지만
주님은 그냥 머물게 하셨다.
또 떠나게 하시고 또 떠나게 하셨다.
15.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이제..... 다시 떠날 때마다 점점 담담한 나를 느낀다.
마비되지 않고 담담한 평강...
그게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이제는 고백한다.
그렇다.
진정이다.
나.
아직도 힘들고 어려울 때 휘~청하고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고
매일매일 변하지 않는 다람쥐의 쳇바퀴를 느껴질 때
또 다리에 힘이 풀리고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지만
어느새인가 그러함에도 '감사'함이 내 영혼을 채움을 느낀다.
감사함이 입의 소리보다는 먼저 가슴에 채워진다.
그럴 때 내 눈망울은 나도 모르게 '사슴'의 그것 닮아 간다 느껴진다. ㅎㅎ
그게 감사하다.
내 삶은 축복이다.
점차로 난 담담해져 간다.
적용
1. 멜리데를 묵상하자.
지금의 고난이 꼭 나쁜 것인가?
고난이 겹칠 때 꼭 나 혼자의 잘못 탓인가?
고난이 영성의 지표만은 아니다.
내 잘못과 어쩔 수 없는 허락된 고난은 어찌 구분할까?
주님의 말씀을 놓치지 말자.
2. 고난도 중요하고 축복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고난'에도 담담하고 변치 않는
주님의 선에 대한 믿음의 태도다.
선을 믿는 내 믿음이다.
그때가 되면 내 주위는 흔들리지 않게 된다.
3. 주님은 무조건 선이다.
믿자.
믿자.
일희 일비하지 말자.
4. 성경 세장 읽자.
기도
오늘은 의인에게 허락된 고난,
쉴새없이 몰아치는 고난,
그리고 그 안에서 유지하는 믿음을 보시는 하나님.
그러함으로 담담한 바울님.
그리고 그로 인하여 주위가 알게 모르게 큰 축복을 덩달아 받게 되는
정말 올바른 믿음의 원리를 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생에서 만나는 수도 없는 멜리데,
이 정도면.. 하다가 다가오는 또다른 혼란에 무너져 버리는 곤란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주저 앉아 버리는지요..?
또 얼마나 많이도 내 속에서는 흔들흔들 거리고 있는지요..
그러함에도 다행히..
저는 말씀을 통해,
말씀에서 보여지시는 올바른 믿음의 예를 통해
성령의 공감해주시는 '울림'에
다시 또 제 자리를 잡아갑니다.
감사합니다.
그게 감사합니다.
앎이 감사하고
알게 해주심이 감사하고
그 것을 알게 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제 영혼이 느낌이 감사하고
제 길이 옳게 나가고 있음을 확인 받는 듯함이 감사하며
아니... 웬지 모르게 이런 상황에서도 소롯이 돋아나는
희망의 느낌이 제 육신의 따스한 변화,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 뒤가 촉촉해지는 변화를 인지함으로
주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하게 해주심도 감사합니다.
주님.
정말 더욱 감사함은 이전에는 '암담함'만 보았을 상황에서
이제는 '소망'을 보고 '희망'을 본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감사합니다.
그게 주님의 뜻 가운데서 마땅히 우리 믿는자가 나아가야 할 바임과
비교적 일치해간다는 사실을 깨달음이 감사합니다.
그래서 제 인생은 점차로 희망적이여가고
보람이 있어지고 의미로 차게 됩니다.
주님.
그리보면 , 주님이 안계신 세상은 온통 어둠 뿐이었음이고
주님 아니고는 세상의 살 의미가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금..
참 감사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 주님이 내 자식들의 주님이 되시길 다시한번 기도합니다.
주님 때문에 담담한 나로 인하여
내주위가 아주 선한 영향을 받도록 하소서.
뱀독에 영향 받지 않듯,
제 환경이 그래도 저와 제 주위가 인지하든 못하든
강한 주님의 보호하심으로 축복받게 하소서.
오늘은 금요일.
성령찬양 집회에 찬양자로 섭니다.
주님.
영광올려 드릴 때 함께 하소서.
바라옵건데 깊이 함께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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