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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도 흔들렸다 나도 흔들린다[마11:1-1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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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도 흔들렸다 나도 흔들린다[마11:1-10]

주하인 2023. 2. 14. 06:27

(펌) 도종환 / 흔들리며 피는 꽃
 

꽃도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요한님도 흔들렸다

 

다행이도

주님 말씀이 계시고

주님의 은혜가 있으므로

나 다시 돌아왔다

나 다시금 돌아오리라

 

그게 기쁘다

말씀으로 확인 받음이

내 영혼에 확신으로 쌓여가게 됨이....

 

그게 그들과 다름이 

그렇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예수님께 세례까지 주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되어지던 '세례요한'님 마져도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실 그분이...' 하면서 그의 혼란을 표시하였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다 알고 확신을 가지고 마주했던 그 분을

그래서 그의 일생 전부를 석청과 메뚜기만 먹으며 광야를 선택하는

특별한 인생을 걸으면서도

옥에 갇혀지고 바라던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며

어쩌면 세상의 관심이 도태되어지며 

자신의 역할이 감소된다 생각 되는 시점에서(어쩌면 지금의 나도... 세상이 AI, GP챗봇, 로봇.......으로 일자리 조차 빼앗기며 사회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할 세상의 많은 사람들도 ....ㅠ.ㅠ)

흔들려 버렸다. 

그래서 다시한번 확인하기 위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재차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것... 

불신의 일종이긴 하지만

그의 선택적 불신이라기보다는 

'광야'의 연단과정의 마지막 단계의 흔들림이며

혼자 어찌할 수 없는 것 

다행이도 예수 앞으로 나아와 

그 내면의 흔들림을 아뢰고 확인 받으니 

오히려 다행이 아니던가?

 

 그렇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어찌 되었든 

무슨 일이든

심지어 그 대단한 선지자 마져도 흔들림을 

부끄럽거나 죄로 여기기 전에

우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 앞으로 가져와 

주님 앞에 내려 놓는 게 중요한 것 같다. 

'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후10:5)'

 

 그리고는 그 흔들림의 실체에 대하여

마주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마주 하기 위하여서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 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다시한번 돌이키고 다잡아야할 것 아니던가?

 

그 답이 7절의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에 있지 않은가?

 

 나..

무엇을 보려고 

오늘 또 살아 있던가?

아니... 솔직히 '무엇을 보게 하시려고 날 살려 놓으셨던가?"가 맞는 질문처럼

내게는 느껴진다. ㅠ.ㅠ

 

 단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여기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고

주님의 허락하시는 매일의 만나,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그 에너지가 아니면 살아 있을 수 조차 없다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그 피동적 어찌할 수 없는 원천은 그리할 지라도

이제는 이 '광야의 막막함'을 허락하신 

그 이유에 대하여 다시한번 스스로 생각하고 

마주하길 슬그머니 권함이 아니시던가?

 

그렇다. 

분명코 이젠 확실히 안다 

나... 주님을 이유로 살아 있다. 

주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위하여

주님 기뻐하시는 것 하려 살아있다. 

그리고 그러함은 내게 주어진 매일을 

주님 말씀을 근거로 열심히 살다가 

허락되어진 이벤트를 거치며 '승리'의 기록을 쌓아가다가

영적으로 그토록 모질게 매달리던 '오류'들을 다 내려놓고 

마침내 '영적 성화' 된 자,

이긴 자의 영혼으로 소천하는 것... 

잘 안다. 

알고 있다. 

 

그런데...........앎을 알아도 

그게 매일 눈뜨고 변화없는 삭풍이 불어대는 광야의 막막함,

그 공허

그 매일 죽음 같은 되풀이........를 마주하면서 

'세례요한'처럼

흔들림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안다고 가슴 깊이 내려 오지 못하고 

가슴까지 내려와도 영혼 깊숙이 내려오지 못한

내 살아 있는 오늘 하루

이 광야에서 무엇을 보고 살까

더 담대히.. 흔들리지 않는 확신................말이다. 

 

 주께서는 나보고 그러신다. 

흔들리지 말거라.

흔들려도 당황하지 말거라

흔들림이 당연하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너는 광야에 서 있는 '요한' 과 같다.

그 모든 것 들고 내 앞으로 오거라

나만을 바라보거라. 

날 것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 

그 보혈.. 

그리고 기뻐하라 

안심하라....." 라시는 것 처럼 들린다. 

 

 

감사하다.

 

 주님.

알듯 알듯하면서 

제 마음은 아직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 충만할 때는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은 

담대함과 기쁨으로 차오르면서도 

허락하신 '광야'의 삭풍을 맞으면서 

그 공허하고 삭막함을 바라보게 되면 

막막함이 몰려옵니다. 

흔들립니다. 

사뭇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제게는 아침마다 마주하는 주님 예수 , 우리 주 하나님의 매일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러십니다.

 

주하인아.. 

네가 광야에 서 있구나

잠시 그 암담한 공허에 두려워 하고 있구나

흔들리고 있구나

하지만 잘했다. 

내가 그이다 

네가 바라는 그이다. 

네가 내 앞에 온 이상 잘 했구나

네가 바라보는 곳이 옳다. 

네가 걸어가는 길이 맞구나

잠시의 흔들림... 

그것을 통하여 '주님 예수'를 찾으니 정말 잘했다. 

힘내거라... 주하인아... 하시는 듯하게 느껴졌습니다 .

 

주여.

다시한번 이 광야 인생의 어려움을 고백합니다. 

그 암담함을 고백합니다. 

주 앞에서 그리합니다. 

에수 십자가 앞에 내려 놓고 

성령 하나님의 강한 임재를 기대합니다. 

 

주여.

힘이듭니다. 

왜 살아야 하는 지

무엇을 해야하는 지

지금 이것이 옳은 것인지

저처럼 사는 것이 맞는지

이 길이외 다른 방향이 이제는 더 이상 없는데

제가 후회없는 선택을 하고 있는지... 

너무도 어이없는 질문을 해대고 있습니다

제 뇌리에서.. 

그래서 잠시 잠시 요한처럼 혼란해하려 합니다. 

주여.

말씀으로 붙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광야에 나가 있는 네가 

주님 예수 

내가 아니면 

과연 무엇을 보려고 거기에 서 있단 말이던가?

그 이외 어디에 답이 있는가?
 잘했다. 

주하인아.. 그대로 가거라... 하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주여.

마음이 고요해졌습니다. 

 

다시 이전.. 은혜 충만하여 

주님 예수님을 제 안에 모시고 다니는 것 같던

그 절절한 감사의 시간

행복의 순간 들로 채워지는 듯합니다. 

그때 그 순간의 당당한 담대함이 

제 안에서 잡혀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여.. .

오늘도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펌,  아름다운 나의 집 /박병수님 블로그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도종환씨의 시다. 구절구절이 얼마나 공감되고 수긍이 되는지 모른다. 이 세상 모든 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으면서 피는 것을 누가 모를까? 사람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왜 우리는 부는 바람을, 내리는 비를 투덜대는가? 흔들림은 더 단단해지기 위한 시련의 바람인 것을, 비에 젖어 어깨가 무거운 것은 더 고운 빛깔이 속에서 우러나라고 주는 하나님의 손길인 것을 왜 모르고 아파만 했을까? 왜 우린 바람을 탓하고 내리는 비를 원망할까? 마태복음 11장에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침묵하고 마태와 누가만이 공유하고 있는 침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 하나가 나온다. 그것은 침례 요한의 흔들림이다. 요한은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를 취한 헤롯 안티파스의 죄를 지적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불의를 눈감을 수 없었던 요한을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요한이 감옥에 있을 때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소상히 그에게 전해 주었다. 친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언하였고, 자기 손으로 침례를 베푼 예수님의 행동이 제일 큰 관심사였을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보고는 신통치 않았다. 요한이 잡히자 예수는 갈릴리로 물러나신 것이다. 제자들의 보고는 옥중에 있는 요한을 흔드는 바람이었다. 저희 선생을 위한다고 늘어놓는 제자들의 불평은 그의 영혼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우박이었다. 원수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요한의 마음에 흔들림이 시작된 것이다. “아니,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지? 내가 자리 깔아주고 자기 길을 넓혀 주었으면 어느 정도 보답은 해야 하는 것 아니야? 파옥을 해서라도 나를 구해야지” 이런 생각까지는 너무 과격한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마음에 깊은 흔들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가 보낸 제자들의 질문 가운데 그 흔들림이 비치기 때문이다. 마 11:2-3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이 말은 바꾸어 말한다면 “우리가 사람을 잘못 본 것입니까?”란 질문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자기변명을 하지 않았다. 구질구질하게 변명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오히려 그분은 아무 말 없이 그분이 하던 일을 하실 뿐이다. 그리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즈음에 그들을 불러서 “가서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하였다. 제자들의 보고를 받고 흔들림에서 요한을 세운 것은 기적이 아니라 약속된 메시아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때문이다(사 61:1). 그랬다. 바람과 우박 같은 흔들림에서 우리를 바르게 세워주는 것은 다름 아닌 말씀이다. 요한은 말씀을 굳게 잡고 순교의 길을 갔다. 바람이 불면 우리의 영혼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하라는 율법적 정신으로 맞서고 싶어진다. 그때 우리를 지지해 주는 것은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그것은 말씀이다. 말씀, 결코 썩지 않을 말씀, 이 말씀으로 무장된 사람들만이 마지막 온 세상을 기만하는 사단의 미혹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위한다는 것이 해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을 위로한다고 한 것이 요한에게는 바람이 되었다. 좋은 말, 속삭이는 이야기라고 다 위하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의 길을 막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한다고 한 말이 오히려 “사단아, 물러가라”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요한은 아직 예수님 같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친구를 위하는 자인가, 해하는 자인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 흔들이지 않는 꽃이 어디 있을까요?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흔들림을 경험했는데…. 요한도 흔들리고, 엘리야도 흔들리고, 다윗도 흔들렸는데 우리라고 흔들리지 않을까요? 더 자주 흔들리고 또 흔들리는 우리를 주의 말씀으로 붙들어 주십시오. 더 단단해지고, 더 고운 빛깔로 물들여 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형상과 품성으로 꽃 피울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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