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두려움을 마주케 하심[삼상23:15-29] 본문
너무 두려워
모든 것이 두려워
그 두려워 하는 내 자신의 믿음 부족함이 두려워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서 누렸던 기억이
아직 이리 뚜렷한데도 두려움이 죄송스러워
멀리서
홀로 몸부림치고 있는
내게 오셔서
그래도 네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구나라시며
어느새 다가와 품어주시는
따스한 주님의 품이
너무나도 감격스럽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어느새 두려움은 봄눈처럼 사라져 버리고
내 가슴엔 푸릇한 소망이
소롯이 솟아나구 있구나
아.. 살아계신 하나님
내 모든 아픔과 두려움과 외로움을 가져가시는 주님
그 주님을 찬양합니다
15.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지독한 '사울에 의하여 수풀 속에 숨는 두려움을 겪고 있다 .
다윗이..
16.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성령'이 이러실 거다.
두려운 자에게...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그 깊은 수풀 속까지 찾아와
지금
두려워하고 있을
나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실 것 말이다.
(할렐루야.
모든 것 다아시는 내 하나님 !)
17.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위로하고 실제적 답을 건네는 게
그리고 그 공포 상황에서도
현실을 직시할 지혜를 안기지 않는가?
18.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머물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두려움과 공포.
아무리 다윗도 지속적인 그러함 앞에서 어찌 이겨낼 수 있었으랴.
믿음이 있어도 두려움은 또 다가오고 또 다가온다.
그때,
그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앞에' 또 매달림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언약'이다 .
하나님의 약속이고
하나님 앞에서 또 매달릴 내 약속이 중요하다.
21.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똑같이 '사울'도 두려워하고 있기에 이런다.
당연하지만...
그.
사무엘 선지자로 부터 '왕'의 자리를 빼앗기게 될 것을 선포 받았음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신하로부터의 '긍휼히 여김 받음'을 스스로 거짓 확인하고 있음...
이 모두 '두려움'으로 부터 나오는 '현상'이다.
26.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다윗은 확실한 대상인 '사울'을 두려워 하지만
'사울'은 대상이 없고 실체가 없는
자기 욕심으로 인한 '상실'과 그 후의 '황폐화된 상상'을 두려워 함이다.
나.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어떤 두려움인가?
실체가 있던가?
각설하고 다윗은
왕으로 세움받을 것을 예언 받았지만
왕으로 될 변화의 징조는 보이지 않고
계속 되풀이 되는 '두려움'의 일이 끝없이 되풀이 되고 있다.
다윗에게.. .
변화없는 두려움,
끝을 모르고 되풀이 되는 만성적 두려움.
'희망고문'처럼 다가오는 두려움 가운데 '믿음'을 유지하기 어려운 실족에 대한 두려움.
현실의 암담함의 두려움.
두려움......두려움......두려움.......
27.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사울은 '자신의 욕심'으로 인한 두려움에
왕으로서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직무적 두려움도 있다.
누구도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28.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두려움이 그쳤다.
잠시지만........
29.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그리고는 '다윗'은 잠시의 평화를 누렸다.
잘쉬고 나름 은혜 가운데 주일을 쉬고 나왔는데
월요일 말씀 묵상에 '여쭙고 여쭙고 .........' 라셔서
그런 태도를 취해서인지
괜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너무 익숙하던 패턴......
내 삶을 그렇게 나 힘들게 해왔던 '근거없는 두려움',
매일을 말씀을 근거로 누르고 눌려져왔던
그 '두려움'들이
또 확 .....내 맘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실은.. 말씀에 근거,
그 두려움의 바탕들을 더 물어보고 여쭈어 보려 하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더 깊이
기도로 임재가운데 교통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내 게으른 이유였을까?
어제 내내.....힘들었다.
오늘 아침까지도 두려웠고 힘들었다. ㅠ.ㅠ
두렵고 힘듦이 믿는 자.. 내게
또 처음으로 돌아가는 듯 한게 당혹스러워 더 그랬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
이제는 조금은 더 뚜렷한 두려움이었다 .
내게 '의미있는 분'께서
내 자랄 때
내게 깊이 심어준 (그 분의 의도는 전혀 아니겠지만..ㅜ.ㅜ;)
저주 비슷한 예언의 언어들이 뚜렷이
그 두려움의 이유였음을 알게 한게
이전과 조금 다른 거라면 다른 것일까?
그러함에도
그 앎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을 탈피하지 못하고
내 삶은 여기까지 질~질 끌려오며
안두려워해도 될 일이
가장 두려워 하게 되는
이 어이없는 것을
정말 많이 받아 들이고 말씀 가운데 녹여 놨다고 생각했는데
또 여지없이 '무섭고 두려워'....넘 힘들려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제부터 '유 ㅌㅂ'나 '영화'나 뭐 유혹적인 곳으로
덜 도피 했고
두려움 가운데서도
자꾸만 여쭙고 여쭈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틈을 주면
'난........깊은 어둠'으로 절망가운데 빠뜨려지려 했지만.....
아침에 무거운 눈을 겨우 뜨며
말씀을 '틀어놓고' (아...일단 누워서 오래된 고질 허리 바로잡으려 자세 운동하면서 주석설교까지 듣고 일어난 후에 기도한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두려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마음이 위로 받는 듯 확~하고 풀리는 듯하다.
믿는 자들에게도 '두려움'은 지속된다......고 하심에
나보고 하시는 위로의 말씀처럼 정말 위안이 되었다 .
그리고는 지속적으로 두려움에 대하여 깨달음이 밀려왔다.
우선 '두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꼭 근본적 원인을 해결할 필요는 없다'였다.
'다윗은 사울과의 얽힌 문제'로 '두려움'이 시작되었고
그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 였다.
그는 그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민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그냥 말씀이 있으시니 피하면 된다.
말씀이 있으시니..
나.
내 잘못이든
내 의미있는 타인 (아주 가깝고 가까운게 당연한 ... 결국은 타인일 수 밖에 없는 애증의 그분)의 역기능적 소산이든
어쨋든 그 소리를 피하기 위한 내 일생이었다.
지금도 내 머리 속, 무의 식 속에서 떠드는 그 소리 (이제야 겨우 정체를 드러낸지 몇년 안된 저주의 소리들... )에
강하게 저항하며 분노하기도
그 저주의 예언에 들어 맞는 상황을 피하기 위하여
평생 도망쳐 살아왔던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 위하여 쓰이는 심적 에너지로 인하여
자꾸만 눌려져 오는 마음의 무게로 인하여
난... 그것이 그렇지 않음을 해결해야만
두려움으로 부터 자유로와질 줄알았다.
그러다가 절대로 고칠 수 없음을 알고
두려움을 두려워 하지 않기 위하여
'외로움'을 선택하곤 했지만
그 외로움도 나이가 들어가며 또다른 두려움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하여튼....
그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다윗은 무진 애를 쓰지 않았다 .
그게 옳은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말씀을 통하여 내게 그리 깨닫게 하심 같다.
그리고 ,
그 보다는 '성령'의 상징인 것 같이
'요나단'이 그 수풀 까지 불현듯 찾아와
자신이 왕이 안 될 것임을 약속하고
다윗 내면 깊이 갈등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또 그에 따른 두려움의 지속될 수 밖에 없는 딜레마를
한칼에 해결하고 가버린다.
두려움 조차 말씀 앞에 서 있는 한
주님이 해결하신다.
깨끗이..
그걸 기대하라.
늘 그렇듯 말씀이 있으시고 내 가 말씀 앞에 서 있으니..
아침에 출근하고도
내 깊숙한 두려움은 아직 스물거리고 남아 있다.
'현실'.
코로나 이후 갑작스레이 줄어든 환우.
거기에 드는 나이.
........
지금까지 수도없이 많은 시간동안을
현실적 불안한 예견을 해왔음에도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고
지금껏 현장에서 잘 유지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번연히 있음에도
아직도 똑같은 두려움의 레파토리가
또 내 발길을 무겁게 한다.
그리고..........'의미'나 '재미'있을 상황이
점점 나이듦에 따라 옅어져가는 현실이
증폭되면 내 은퇴이후.......의 두려움....*&^%.......등등
괜한 어이없음이
아주 그럴듯한 논리로 날 잡으려 한다.
환우를 보면서
오늘 말씀을 근거로 깨달은 '두려움'의 실체와
그 두려움에 대하는 다윗의 입장에 맞추어 지면서
갑자기 내 안에
깊은 깨달음이 오면서
'은혜'(그렇다.. 내가 은혜라 부르는 , 성령이 강하게 임하시는 증상 ^^;) 가 나타났다.
정말 나타나신 것처럼 은혜가 임했다.
자꾸만 잊지만
매일 사는 의미,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하나하나 변하여가는 내 영혼의 상태........
그 증거를 바라보는 것이 사는 재미와 의미가 아니었던가?
그것을 통하여
난...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주신 레마를 가지고 하루 하루 살았는데.........원...........이다.
그리고 정확한 표현하기 힘든 깨달음이
확신으로 날 사로잡으며
한마디로 '확'하고 두려움이 멀어져 갔다
그랬다.
어제 이후 '여쭙고 여쭙는....' 순종을 통해
오늘 말씀 '두려움'과 실체에 대하여
깨닫게 하심으로
내 영적 승리를 또 체험케 하시는 과정이 맞다는 생각이 들며
걱정이 하나도 안되었다.
괜한 우울, 두려움, 외로움, 절망, 속사함...............등이
멀~리 사라져 버렸다.
할렐루야다 .
살아계셔서 말씀으로 또 임하신다.
다윗은
'사울'이 전쟁을 이유로 물러간 후
'엔게비'에서 당분간의 평온함이 유지될 것이다.
그렇다.
두려움은 믿는다고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는 않는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또 허락되어지는 고난으로 다가올게다.
그러기에 하나님 안에서 깨달아 지기 위한
내 의미있는 타인의 그 오류의 언어도
필요한 감사함으로 바뀔 계기가 되는 듯하다.
감사하다.
주님.
두려움.. .
공포..
불안......
...........
참... 익숙했습니다.
그를 마주하게 하시는 아침입니다.
두려움이 두려워 무조건 도망가거나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필요없는 기대로 더 얽히거나
두려움이 좌절케 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게 하거나
........하지만
두려움도
하나님 안에서
내 선한 결과를 위하여
내게 가장 맞는 도구로 쓰임 받는
그래서 내 일상이 '의미'가 없는 일이 하나도 없음을
다시금 확인케 하십니다.
그래서 '힘이 납니다 '
내 살아온것,
허무한 것 하나도 없으며
내 살아갈 것,
꼭 두려워할 것만도 아님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넌지시 깨닫게 하십니다.
주여.
믿는 자,
여러 연단을 거치고 당당히 서 있으려는 다윗에게 조차
두려움은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두려움을 통해 불현듯 다가 와 위로하고 가는 요나단같은
성령의 강한 체험을 하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자에게도
두려움은 두렵지만
그 두려움의 끝이
반드시 네가티브적인 것만은 아니고
오히려 소망으로 바뀜을 깨닫습니다.
주님.
잠시의 다시 평온함을 허락받음을 봅니다.
제게도 그리하실 줄 깨달아갑니다.
제 현재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또 웃고 소망있는
그렇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아니면 이유를 알수 없는
소망 돋는 아침을 맞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살아계신 증거,
요나단의 위로 같은 은혜로
또 말씀처럼
절 인도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살아계셔서
이 좁은 마음,
이 작은 삶의 반경에도
여지없이 동일하게 임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시는
양자의 영이신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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