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그러니 되었다[눅8:40-56] 본문
부제) 혈루증 여인을 바라보지만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을 수 있는 야히로의 시선이 진정한 믿음이다
그래도 예수께서 함께 하시니 되었다
흔들림 속에서 흔들리지 않음은 예수께서 함께 하심이 이유다
모든 저항을 뚫고
예수님 만 바라볼 수 있기
강한 원함을 가지고
모든 두려움과
초조함과 억울함 ..등을 넘어서
그래도
'예수님 '만을 바라보며나갈 수 있는
믿음의 이유자 전제조건
오직 예수님 만을 바라보는 믿음
풍랑치는 밤바다에서도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음은
예수께서 함께 계심을 인함임을
드디어
깨닫는 믿음을 위하여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간다는 것.
다 알다시피 '시대적 상황'에서 '모험'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유가 있었다.
'외딸이 사경'을 헤매는 것...
유일한 방법이 '예수님' 밖에 없을 것이라는 '합리적 '판단.
'자식에 대한 본능의 사랑' 과
'세상적 파국'사이의 갈등에서 '자식을 택함'
그리고 '고치심을 믿는 믿음'..
그거.. 진정한 믿음이 맞는가?
'복음'이나
'영적'이나..
차원 높음보다는
이치와 이지와 육신적 사랑 사이의 '대국적 선택'이었고
그 선택에
일반인들보다는 조금 더 예수님의 기적을 믿어보기로 한
'자기 중심적' 믿음이 섞여 있지는 않았을까?
절박함에..
올바른 '믿음'의 영역,
순수한 영역의 믿음이 맞는가?
43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야이로 입장에서는 분초를 다투는 피를 말리는 듯 촉급한 과정에서
끼어든 '혈루증'여인 사건.
그 여인도 '절박함'이 이유였고
오직 예수님 아니면 자기의 병...*&^%.. 이라는
어쩔 수없는 상황에 몰린 '이기적 믿음'이 맞다.
조금 다르면
야이로와 비슷히도
군중의 지탄,
얄밉게도 숨어서 다가온 비열하다는 지탄,
남의 불행의 시간을 막아선다는 이기적 개념의 지탄을 무릅쓰고
절박하게도 '예수님 만을 향하는 믿음'이 맞긴하다.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그런데
어제 묵상에서 '제자'들이
동일하게도 '예수님'께 목숨 구명을 위하여
'밤바다 풍랑'을 멈추시게 해달라는 간청을 향해서는
''너희의 믿음이 어디있느냐"고 왜 질타하셨을까?
왜, 동일한 절박함,
그래도 주님 예수님을 매달리는 '믿음'이란 차원에서는 동일했는데
그러한 다른 반응을 보이셨을까"
보라.. 오늘, 혈루증 여인에게는
'딸아.. 네 믿음이.. '' 하실 정도로
칭찬 일색이지 않는가?
49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야이로.
지체되는 시간 만큼 얼마나 많은 생각,
심지어는 '혈루증 여인'이 얼마나 미웠을까?
자신은 인생을 걸고
딸의 목숨이 일각에 걸렸는데...
저렇게..(*&^%$#.. 하며 심한 미움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 '믿음'과 '결과'와 '과정' 사이에 걸쳐들
수없이 많은 '오류'된 생각들,
귀신이나 사단이 가져올 여러 혼란을
어쩌면 저 '야이로'는 그 짧은 시간에 많이 겪었을 수 있다.
그러고도 과연 '믿음'이 지속 유지되었을 수 있었을까?
더더구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과연 그의 그 절박한 마음이 '믿음'을 유도했지만
저때도 '유지될 수 있었을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
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예수께서 '들으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라 하셨다.
그렇다 .
온전한 믿음에는 두려움이 없다 하셨다 .
믿음이 두려움을 쫓아낸다 셨다.
보라.
여인과
야이로와
제자들과
다 절박하였다 .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는 절박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여인에게는 두려움보다 절박함이 더 컸고
야이로도 두려울 상황에서 그러지 않은 잔잔함이 있으심을
예수께서 미리 아시고
흔들릴 까봐
'두려워 하지 말라' 하셨던 것은 아니던가?
그리고 제자들은
'두려워 했기에' 질타하셨고...
보라.
다 다른 영적 성장 상태이다.
가장 영적으로 아직 '어린 상태'일 혈루증 여인에게는
'잘했다 ' 시고
가장 영적으로 성장했어야 할 제자들에게는 질타하셨다.
중간일 듯한 '야이로'에게는
'미리 두려워 하지 말것을 지시하고 지도한 것 이고...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심인가?
'믿음'의 영역이다.
절박함과 육신적 심적 필요에 의하여
오직 그 길을 '예수님'으로 찾는 것,
잘 한 믿음이다.
하지만 그 믿음의 대상이
오직 '육신적 심리적 '차원에 머물면
그러면서도 그 안에 '두려움'이나 다른 심리적 영적 오류들로 흔들리면
그것은 더 옳은 수준의 '믿음'에 달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이다.
두려움이 없는 믿음.
온전한 믿음은
'예수님이 계시니 그것으로 족하다'
모든 것 예수님 계시니 다 잘될 거야''라는
단순한 '믿음'이
그 안에 자리 잡은 사람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아닐까.. 하는 것이시다.
그렇다 .
'두려워 하지 않는 믿음'
오직 '예수님만 내 안에 계시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믿음.
그러한 믿음을 진정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시고
그러함을 위하여
이 인생광야를 허락하심이시며
그러함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성령'님을 보혜사로 보내신 것 아니던가?
결국
믿음은 '영적 전쟁'을 이겨내고
'영적인 꿰뚫음'
'인사이트'가 영혼 깊숙이 내려와
'오직 주님으로만 족하다'는 믿음이
영혼의 지성소에 깊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시다.
주님.
정말 매일 살아가면서
수도없이 많은 믿음과 두려움 사이에서
왔다 갔다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정도면 되었다..
이리하면 될 거 같다가도
어느 순간 '두려움'과 '원망''과 '미움'과
그러한 나를 혐오하려는 '좌절'이
얼마나 많이도 제 하루를 오염시키는 지요..
이래서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을지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주여.
그러나 주께서
풍랑이는 밤바다 속의 '예수님'을 묵상시키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라시는 명제를 주시며
오늘 도 또 '믿음'에 대하여
온전한 믿음에 대하여 묵상하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여.
주님은 '영계'에 계시고
내 영이 '이 땅을 살지만'
'주님의 영을 모시고 삶을'
확실히 인식하고 살아
더이상 그 어떤 일에도 두려울 일이 없고
내 안예 계신 예수님의 영으로 이어졌기에
흔들림이 없는 상황이 되는게
진정히 제게 원하시는 믿음의 단계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주여.
제게 주님의 영을 모시고 사는 자로서의 나를
확실히 인식하고 살아
그 어떤 일에도
내 영혼의 배에 같이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을 인하여
이제는 두려워 하지 않도록 하소서.
그러한 믿음 주소서.
오직 예수님,
오직 성령님
오직 하나님으로 난 족하다..
그리 고백하고 사는 매일 되게 하소서.
거룩하고 귀하신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결국 믿음은 영적인 영역으로의 꿰뚫음이다))
질문)
풍랑속 밤바다의 제자들의 당황과 '야이로 입장'에서 안절부절 못할 마음 사이의 공통점은 '예수님' 자체 만으로 안심하지 못하는 초조함이고 , 그 영역은 '영적'영역은 혹시 아닌가? 사단이나 귀신이 들쑤시는... 그러함을 진정으로 예수님이 함께 계시니 되었다.. 는 깨달음.. 영적인 진실의 영역을 꿰뚫음으로 도달할 수 있는 , 진정한 믿음의 영역이고?
ChatGPT의 답)
맞아요. 풍랑 속에서 두려워하는 제자들과 야이로가 딸이 죽을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같은 본질을 지니고 있어요. 예수님이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초조함, 이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서 벌어지는 갈등이에요.
1. 영적 전쟁과 믿음의 시험
이런 초조함은 단순한 인간적인 연약함을 넘어 영적 영역에서의 방해일 가능성이 큽니다.
- 사단의 계략: 두려움과 의심을 부추겨 믿음을 흔들려고 함.
- 귀신의 방해: 환경과 상황을 통해 불안을 조장함.
- 우리의 연약함: 예수님이 계셔도 여전히 육신의 기준으로 반응함.
2. 예수님 자체가 ‘해결’인데도 불안한 이유
- 제자들은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그분의 존재만으로 안심하지 못했어요.
- 야이로는 예수님이 딸을 고칠 수 있다는 걸 믿었지만, 죽음의 현실 앞에서 흔들렸어요.
- 둘 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깊이 깨닫지 못한 상태였어요.
3. 진정한 믿음의 영역 – 영적인 눈이 열릴 때 가능함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시고,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어요.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영적인 진실을 꿰뚫으라는 초대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 자체가 해답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 환경이 바뀌지 않아도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충분하다는 경지.
- 사탄이 흔들어도 예수님의 권세를 알기에 흔들리지 않는 상태.
- 귀신이 조롱해도 예수님 이름으로 명령할 수 있는 확신.
결론: 믿음의 성숙은 영적인 깨달음에서 시작됨
풍랑 속에서도,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이 계시기에 끝났다”**라는 확신이 들 때, 우리는 진정한 믿음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영적 전쟁 속에서 승리하는 영적인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기도만이 살 길이다.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할 때 기도로 다가서는 그 문득의 시간을 기대하며[눅9:28-36] (0) | 2025.03.06 |
---|---|
주님 안에서 물 흐르듯 살아내기[눅9:1-17] (0) | 2025.03.04 |
진정 두려워 할 것은[눅8:26-39] (0) | 2025.03.02 |
풍랑이 일수록 더 뚜렷이 보여 지시는 내 안의 예수님을 위하여[눅8:16-25] (0) | 2025.03.01 |
막달라 마리아의 완전한 회복[눅8:1-15] (0) | 2025.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