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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에 충만한 성령의 임재를 위하여[눅4:14-3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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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에 충만한 성령의 임재를 위하여[눅4:14-30]

주하인 2025. 2. 17. 00:13

부제) 세상의 폭압 가운데 성경을 읽고 성령으로 흐르다

      성령의 능력은 일상에서의 자유로 이어진다

      하나님 안에서 자유로움, 그게 복음이다

      말씀을 근거로 나를 내려 놓게 되는 자유, 성령의 능력

29절과 30절을 근거로 Chatbot AI로 그린 그림

꼭 이리 기적을 보여야

'성령의 능력'이실까

 

오히려 훨씬 더 큰 능력은

평범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

그러한 시간에

왜인지 모를 감동으로

'성경' 읽음을 사모하게 되고

그리함으로 한번이라도

주님의 임재의 확실함을 깨닫는 것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게

주변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

 

이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이

말씀을 근거로

성령이 충만하신 결과임을 인정하고

자유로와지는 심령이 되는것.

 

그것이 진정 

성령의 능력이고

성령의 임재 안에 머무는

그러한 옳은 삶이 아닐까

 

할렐루야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시니'

벌써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 한다. 

'성령의 능력'을 이전보다 훨씬더 크게 놀랍게  품으시고 돌아가신 것을

벌써 사람들이 다 아는 거다. 

 

 하지만.. 

'가르치시매'가 제일 먼저 나온다. 

가르치시는 것도 당연히 '성령의 능력' 중 하나이다. 

어느 것 하나 주님의 성령의 능력이 아닌 것이 없지만

첫 구절 부터의 표현 '성령의 능력으로 ' 라는 표현이 강조된 것을 통하여

우리는, .. 나는.. 

기적과 힘과 알지 못하지 못하게 하는 놀라운 은혜의 감수성의 변화 ^^; 등이 먼저 떠오른게 문제다. 

그게 .. 주님의 성령을 대하는 

막연한 기대고 

그렇지 않으면 '실망하거나' .. 앎에도 불구하고 흔들리는

이 어리석음을 언제까지나 되풀이 해야 하는가?

 

 어제 말씀에는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이끌림'으로 

'시험'에 들어가는 것을 말씀하시더니

오늘은 고향의 모든 자가 다 아는 

다 아는 사람-죄송.. 예수님을 친구나.. 지인이나 친척으로 아는 사람들이 투성인 그곳..  선입견, 인간의 한계의 틀에 가두려는 그곳, 그 아는 사람'-  투성이인 그곳에서

성령의 사역으로

가르치시고 

늘 하던 '안식일'에 '성경'을 읽으시며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는 

그 평범한 일에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은혜'를 말씀하신다. 

 

그렇다. 

다시 돌아본다. 

평범 - 어찌 구원받은 일이 평범하고 어찌 말씀을 근거로 성령 충만한 일이 범상한 일이던가?  그 비범하고 놀라운 은혜의 행운을 어찌 이리 값없이 받았다고 값없이 대하는 삶을 살았던가?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은혜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성경 읽을수 있음',   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살수 있도록 하는 이 특이하고 특별한  삶의 행태가 가장 큰 축복의 일이 아니던가?  할렐루야- 하다고 생각한 

내 매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사는 것이니

그 모든 것이 '예수 님의 구원과 내려주신 성령의 인치심과 하나님의 긍휼하신 시선' 안에 사는 

온전하고 완전한 축복의 증거들이 아닌가?

 

 평범한 것?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임재와 성경을 읽음으로 

난.. '자유'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되었고

이것이야 말로 '은혜의 해'가 아닌가?
복음.. 

Gospel.. 말이다 

할렐루야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이 구절들은 늘 '의문'이 었다 .

그래서 내 생각했던 바를 아래처럼 질문하니 

아랫처럼 답을 주었다. 

 

((질문))

29절과 30절에서

 '산 낭떠러지 '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고자 할 정도 사람들의 물리적 힘이 예수께 가해지자 30절에서는 그들가운데 지나서 가셨다고 하셨는데 그 것이 그 물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다른 신비한 현상을 통하여 스며들듯이 빠져나왔다는 이야기던가? 설명좀 부탁해요

 

((ChatGPT의 답))

주하인님, 좋은 질문입니다!

누가복음 4:29-30 해석

[눅 4:29] 그들이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눅 4: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며 자신이 메시아임을 선언하셨을 때(눅 4:16-21), 동네 사람들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던 상황입니다.


1. 물리적인 위기와 신비한 탈출

(1) 사람들의 강한 적대감과 폭력적인 행동

  • 예수님을 물리적으로 끌고 갔다고 표현되므로, 단순한 말다툼이 아니라 실제적인 물리적 위협과 폭력이 가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당시 나사렛은 산지에 위치해 있었고, 마을 외곽에는 절벽이 있었기에, 그곳에서 예수님을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어떻게 빠져나가셨는가?

  •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사람들이 길을 터주어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도와 행동을 초월하는 신비한 방식으로 빠져나가셨다는 의미를 내포할 수 있습니다.
  • 원문의 헬라어를 보면 "디엘쏜 메소우트온" (διελθὼν μέσον αὐτῶν), 즉 "그들 가운데를 통과하여"라는 뜻으로, 단순한 도망이 아니라 그들 한복판을 자연스럽게 지나갔다는 뉘앙스입니다.

2. 신비한 현상이 있었던 것인가?

이 구절을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성령의 역사로 인한 신비로운 보호 (초자연적 현상)

  • 예수님께서 물리적으로 포위당한 상태였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군중이 순간적으로 예수님을 놓쳤거나, 예수님을 막지 못하게 되는 신비한 일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구약에서도 엘리야와 엘리사가 위험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있었죠(왕하 2:11, 왕하 6:17).
  • 예수님이 부활 후에도 문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는 장면(요 20:19)과 유사하게, 공간적 제약을 초월하는 능력이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2) 사람들의 의도가 갑자기 꺾인 자연스러운 상황

  • 예수님께서 그 순간 군중의 분노를 압도하는 초월적인 위엄을 보이셨거나, 평온한 태도로 그들을 응시하시면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물러서도록 하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 예수님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때에 따라 사역하시기에, 아직 십자가의 시간이 되지 않았음을 뜻하며, 따라서 하나님이 보호하신 것입니다(요 7:30, 요 8:20).

결론: 초자연적 보호와 하나님의 주권

  • 예수님이 단순히 군중의 빈틈을 이용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셨다는 해석이 더 적절합니다.
  • 이는 하나님의 보호와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강조하는 부분이며,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예수님께서는 어떤 인간의 시도에도 해를 입지 않으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 붙잡히는 분이 아니며,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서만 행동하신다는 점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주하인님, 깊이 있는 질문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더욱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기도만이 살 길이다.

 

(Chat GPT)

그리고 그림을 부탁하니 '윗그림' 을 그려 냈네요.

 

 그렇다. 

세상의 어디에 '완벽한 천국'이 이 땅에 있던가?

 아는 사람들의 '멸시와 핍박'이 

예수님께도 있었다. 

 

바야흐로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이끌리어 

시험 40일간을 거쳐내고 

마침내 이글거리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내려오셔서

말씀 묵상을 게을리 하지 않으시며

이땅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계신 그 분께... 

이들, 사단 악다귀 같은 일들이 

한몸처럼 하나되어... 군중으로 해하려 달려들고 있는 모양새다.

 

아... 

ㅇㅅㄹ .. 이 악다귀 만 남은 자의 

세상에 가장 악한 '오직 자기, 자아'의 발로로 ㄱ엄을 행하자

목불인견, 

도저히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들이 

'광풍'처럼 세상을 둘로 갈라 놓고 

수개월째 나라가 엉망이다. 

 

꼭.. 이 현재의 모습에 있는 

그 '공중의 권세잡은 '자.. 

하나님 허락하사 잠시 세상의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무색하게 

성령이라는 생각도 못하게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이 어지러운 세상에 

그냥 물흐르듯이 군중 사이를 빠져나오시는

가장 '기본' 의 능력만을 발휘하시고 마시는 거 아니신가

 

 그렇다. 

조금만 멋드러진 모습으로 위용을 발휘하시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유도 아니실텐데.. ㅠ.ㅠ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

 

평범한 세상?

사단이 권세 잡은 것 같이 마구 치달리는 세상?

그 안에서 '믿음'을 유지하고 

주님 만 바라보고 나가려해도

우리의 인식과 의식에는

자꾸만 '하나님의 위용'이 너무도 작은 것 같이 느껴진다. 

심지어는 '은혜의 해'.. '성령의 능력'... 을 아무리 외쳐도

우리의 감성과 감정에 못 미치는 거 같다. 

 

그런데.. 

정말 그런데.. 

이 평범한 일상에 

하나님의 '복음'.. 

'성령의 능력'이 깃들어 잇음을

어찌 우리는 잊을 것인가?

 

어디까지 우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우시고 고치시고 나타나게 하실 것인가?

그냥.. 

예수님께서 그러셨듯

물흐르듯.. 

이 '불합리' 투성이인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잃지 않으려 

성령의 은헤를 사모하고 

'성경'을 읽고

때되거나 기회되면 여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하나님 만이 함께 하시면

그 어느 곳과 어느 것도 다 '은헤의 해'의 장소가 될 것임을 

인정하고 살아가다가

때되면 주님께서 '넘어질 때 일으켜 세워주시고'

'고난이 허락은 되지만'

'고난이 유익인 원리'.. 

밤바다 풍랑은 여전하나

그 안에 함께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배 안에 동행하심 만으로 

그냥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자연스러움으로 

오늘 도 또 살 수 있길 기도하며 살라신다. 

 

 

주여.

어렵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알만도 합니다. 

주여.

성령의 능력은 

성령의 충만하심은

오직 주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더 기도하며

모든 것 맡기고 사는 것이라 십니다. 

 

평범한 일상이 

가장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충만할 기회라 십니다 .

 

주여.

믿습니다. 

 

또 한주가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

도우소서.

주님 뜻대로 살, 

민감한 영적 깨어있음의 상태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성령 충만하게 되어

어떤 상황에서도 

그 것이 주님의 능력이 넘치는 시간이 될 것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초연히 살다가 

부르실 그날에 홀연히 물흐르듯이 주님 나라 갈 수 있도록 하소서.

거룩하고 귀하신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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