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회개로 준비하는 하루[눅3:1-14] 본문
3.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죄'는 처음엔 달콤하나 그 끝이 무섭고 무겁다 .
죄의 가장 큰 무서움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결국은 사망이다.
그 사망이라 함이 죽고 끝나고 마는게 아니라
살아도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것을 의미하고
살아도 사는게 아닌 것을 의미한다.
부흥하고 잘나가는 자들 같은 분들의 마음 안에
항상 기쁨 만 있을까?
복을 그리도 원하는데 복의 궁극적 바탕은 무엇일까?
돈 많이 벌고 사회적 경제적으로 잘 나가는 것이 다 일까?
복이란 '육신적 ' 물질적 뿐 아니라 마음의 잘나감도 포함되는 개념이 아닐까?
정말 하나님을 모르고 복이 존재할 수 있을까?
온전한 마음의 평화가 하나님을 모르고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P'전 시장님은 왜 그러셨을까?
마약을 쓰고 느끼는 잠시의 황홀함에 '평안의 기쁨'이 있을까?
그 엑스터시가 정말 '행복'일까?
아무리 건전한 삶을 열심히 살아
결과적으로 얻어지는 '행복'이 잠시일 뿐 얼마나 갈까?
오래가야 몇년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항상이 항상 기쁠까?
그렇다면 '복'은 무엇이고 '불행'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깊이 알고
하나님의 임재를 아는 자들.
그리하여 이땅 위의 삶의 어떠함.
우주에 한점 먼지도 되지 않는 지구 상의 유한한 삶과
영원처럼 끝이 없는 시간과 공간,
그 안에서 결정지어지는
우리네 한순간의 삶 속의
'복'과 '불행'의 해답은 과연 무엇일까?
결국,
답은 하나님께 있지 않은가?
당연히..
우주를 통틀어도 사유하고 연구해보아도
그들의 인식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무신론적 유신론'을 주장하던 누구들과 달리
(수년 만에 또다른 이론이 나와 그들이 틀릴 가능성이 나와도 인정하지 않던 헛 똑똑이 인생들. ㅠ.ㅠ;;)
우리들은 우리의 눈에 맞추어 내려 오셔서
그 실체를 보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알 수 있는 자들이 아닌가?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못느끼고
하나님의 임재가 안계신 것 같은 것 이외의
불행이 어디있는가?
그러한 상태는 죽음과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몸부림 치고 기도 하지 않는가?
그래서 허락되어진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그 영원의 궁극에 계신 하나님의
가히 감당할 수 없는 '에너지'가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에 느껴지면
전율하듯 깨달아지는
그 기쁨을 에너지 삼아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알 수 있고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몸부림 치는 것이다.
그리 사는 것이고..
그런데..
죄...........는
그러지 못하게 하는 게 가장 나쁜 기본 이유고
그러하기 때문에 죄사함(아... 예수님 때문에 '사함'이라는 단어가 너무 자연스럽다.. ^^*)이 이루어지면
4.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주님이
내 영혼,
이 세상에 오시고
그의 임하심을 통해
우리는 또
온전한 삶의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
그 분의 오실길을 곧게 하는 것.. .
죄사함을 받는 것..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회개'는 정말 중요하다 .
나.
오늘.
너무도 당연한 '회개'에 대하여
다시 말씀하심은
무엇을 회개하라 심이시던가?
주님 나라를 곧게 하지 못하는
아직도 내 안에 남은
'죄'들 말이다 .
다행이도 '죄 사함'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고
그러함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기도하는 삶의 행태가 아직은 내게 있으니
더 회개하여야 한다 .
주님.
오늘은 '회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오실 주님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하여
내 죄를 사함 받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주여.
이 부족한 자.
이 물질 세계에 살면서
자꾸만 잊고 또잊습니다.
그리도 미련하여 보여 답답했던 구약시대의 죄짓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등 다름없는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미련함으로
죄에 탐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련함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식을 하지 못하고
또 아무렇지 않은 듯
옳은듯 살아가려 한다는 것 입니다.
주여
죄를 사하여 주소서.
그래서 옳으신 예수님
진정한 진리이신 예수님의 오실 길을
저로 인하여 구부러지지 않도록 하소서.
제게 죄사함의 은총을 퍼 부어 주소서.
성령으로 그리하소서.
기도하게 하소서.
기도하는 제 머리에 '죄'를 깨닫게 하는 지혜를 부어주소서.
내 주여.
거룩하신 주님.
성령으로 그리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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