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감동을 넘어 말씀 만으로[눅11:27-36] 본문
부제) 말씀 듣고 당연히 행해지는 믿음을 위하여
예수님 안에서 말씀 만으로 말씀 따라
하나님의 말씀 듣고 감동하고 행할 수 있는 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감동입니다
성령을 통해 흐르시는
은혜의 물결입니다
아닙니다
그 은혜와 감동의 본질은
예수님 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주님의 감동
주님의 은혜로 초대를 하십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주님 안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
주님과 교류하는
매일을 원하십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대로 살아가며
말씀이신 그분과
하나되길 권하십니다
그것
귀신 설교를 통한
여인의 놀라운 감동을 통해
다시금 권면하고 어루 만지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감사합니다
내 주여
살아계신 하나님 찬양합니다
그리될 수 있길
간절히 원하고 기도합니다
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드는 의문점들...
#1. 음성을 높여.. 라는 표현은
순간적인 감동, insight , 전율에 의한 탄성으로 느껴지지만
한편으로 예수님 설교 중 찢지어는 고음의 여성의 소리가 주는
생경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2. 그런데 그 감동의 대상이, 뜬금없이 '귀신'에 대한 설교다.
어제 내내 말씀 구절은 귀신에 대한 것이었다
#3. 예수님에 대한 칭송이 분명히 맞지만
어머니 마리아가 복이 있다 한다.
#4.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여인이 그것도 말씀 도중에
'음성을 높여' 말을 잘랐음
위 몇가지에서 깨닫게 하시는 포인트가 있다.
'감동'이 그것이다.
성령의 은혜 가운데 있는 분들,
예수님 구원의 첫사랑의 순간들
성령체험으로 표현되는 그 순간들을 분명히 기억하는
우리 모두의 공통점은
'감동' 아니겠는가?
기쁨, 감사, 감동... 으로 표현되는
'천국백성의 기본 심사'.........가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
천국 자체이고...
그러한 감동이 얼마나 강했으면
'소리를 높여' 예수님을
말씀 도중에 끊어가며 칭송을 했을 정도로
여인은 외치게 되었을까?
아..!!!.. 할렐루야... 하는 느낌 아닐까?
그러면서 드는 의문이
왜 하필이면 예수님 본인을 칭찬하지
'잉태한 어머니'를 칭찬했을까.. 다.
여러가지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한다.
그래서 아래에 역시 긁어다 놓았다
정리하면 '문화'였다한다.
그러나, 그러함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칭송하고 영광올리는 것이
어찌 차이가 있을까?
공통되는 점은 '감동'.. 인싸이트가 놀랍게도
그 여인의 영혼을 전율시켜
그 어떤 제한점과 눌림을 통하여서라도
'하나님께 영광'올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왜 괜히 '귀신'에서 감동하였을까?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기적들, 복음, 예수님이 하나님이심... 등
감동을 할 포인트들이 많았을 텐데...
역시 깨달아지는 바가 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이럴거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 내용의 어떠함에도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고 있다는 사실...
예수님 말씀 자체가 중요하고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그녀를 감동시키는 포인트가 겨우 -겨우라는 거, 고상하고 과학적 합리주의로 가려진 현대인이라 자부하는 우리의 고정관념 아닌가? 하나님은 영, Spirit이기에 영,spirit에 속한 귀신을 인정하는게 너무도 당연한 건데도 불구하고... 이런 미련한 논리적 어리석음을 가리게 된 표현이 '겨우' 일 거다 .. ㅠ.ㅠ- 귀신 이라 할지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귀신'이라는 말못할 'Issue'나 터부가 있거나
가족의 누구가 귀신들림에 있거나
아픈 상처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었을 것... 등 수없이 많은 이유가
그녀에게 '해결하지 못하는 답답함'으로
평생의 짐으로 지고 살았지만
마침내 '예수님'으로 인한 통찰을 얻게 된..
그게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거다 .
예수님 안에서는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고상함, 어떤 이슈..어떤..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님 안에 서 있다는것,
말씀 앞에 서 있다는거..
그것만 중요하다.
그것을 '여인의 귀신 설교로 감동하는'
우리의 기준의 '놀라운 현상'에 대하여 묵상하며
깨닫게 하시는 바다.
확인차 역시 '챗GPT'에 확인해달라했다 .
동일한 내용이다.
더 깊다
그래서 가져다 아래에 붙혀 놓았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그런데 '예수께서 이르시'는데
'오히려' .. KJV에서는 'yea rather'라 나온다.
NIV에는 없는 단어.
그런의미에서 때로
'현대인의 성경'이나 풀어서 설명한 쉬운 성경보다
고전의 '개역개정'이나 '개역한글'의 성경이
더 깊은 내용을 담을 때가 많다는 느낌이다.
한점 한획도 바꾸지 말고.. 라시는 성경의 표현대로..
yea..감탄, ..하는 감탄사다.
그러면서 rather 라신다.
역시 '감탄'하는 분위기로
'그보다는 오히려 '.. 라시는 거다.
기뻐하시며 첨언하는 뉘앙스라고 사전에 나온다.
그거...
예수께서도 놀라고 기뻐하시면서도
분위기 전환하여 진실을 직시하고
진리를 가르치고자 하시는 '의욕'이 담긴 표현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주께서 내게,우리에게
정말 주고 싶어하시는 본질을
'여인의 감동'..
우리네 '은혜 가운데 ' 열심을 보이는 것이
귀하고 사랑스러우나 -아.. 말씀을 이렇게 묵상하고 따르는 우리를 주님은 아주 아주 기뻐하신다 . 그게 비록 우리의 취향이 ^^;; 귀신으로 상징되는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저급하다 느끼는 분야일지라도 ..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는 자체만으로 주께서 아주 기뻐하시며 'yea rather' 라시며 흐뭇해 하신다..^^* - 한걸음 더 성장하기 위한
'키포인트', 레마가 있다는 말씀 아니던가?
나.
나에게는
여인의 감동이 예사롭지 않다 .
나..
예수님 구원의 첫사랑.
그 감동이 너무 커서
하루 아침에 '인생관'.. '가치관'이 완전히 뒤바뀌어
그 처음의 감동이
점점 말씀을 근거로 '증폭'되며
은혜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허겁허겁 여기까지 온거다.
그리고 내 인생은
가끔은 '사단?, 귀신?.... ' 의 많은 영으로 의심되는 ^^;
부가되는 논리적, 심적 흔들기에
당혹할 때가
내 버거운 인생 중에 너무도 많았지만
그러할 때마다 날 세우고 또 붙들어 세우신
그 것은 '말씀'을 통한 '레마'시다.
레마..
깨달음..
꽂힘을 통한 ^^; ..
영혼의 인사이트..
꿰뚫리는 듯한 깨달음과 전율..
그 남은 '하루하루의 감동의 잔향 (殘香, Resonance), 울림(echo) ' 으로
난..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진하고 깊은 끈이 될 수 있었다.
그러한 거다 .
여인이 강력하게 느낀
저 뜬금없는 ^^; 감동이
하나님앞에 붙들리게 하는 깊은 인사이트란 거다.
그런데
그러함에는 반드시
제대로 된 인식과 더불은
성장이 필요하다.
소위 2차 중생이라 말하는
당연하고 귀한 '성장'을 통한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을
말씀을 통해 한마디로 정리하심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당연하고 당연하다.
말씀 자체로 복귀해야 한다.
말씀 통해 누리는 감동과은혜.. 귀하고 놀랍다.
그러함을 통해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
하나님
성령님 앞에 제대로 서는 것이
감동을 통해
감정의 이차적 이익보다는 훨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직시시킴이시다.
감사합니다.
내 주여.
벌써 출근 벨이 울려서 서둘러 마무리 합니다.
말씀이신 하나님.
말씀이신 로고스 하나님.
하나님 앞에 말씀으로 서게 하시니
감동입니다.
여인처럼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매일의 깨달음의 순간이
여기까지 이어짐을 감사합니다.
거룩하신 주여.
마음을 추스리고 또 말씀 앞에 차분히 섭니다.
오늘 하루도 지켜 주소서.
예 ㅅ에 내려가서
오늘 봄 농사 준비하려 합니다.
도우소서.
아내와 저의 결단과 열심을 귀히 여겨 주소서
거룩하고 귀하신 내 주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Chat GPT 친구, 허벗과의 대화(반말...그래서..^^; )
(( 당시 시대에 여성의 인권에 대하여.. 여자가 목소리를 크게 냄에 대하여))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성이 공적인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았어.
1. 유대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위치
- 1세기 유대 문화는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였고, 여성의 사회적·종교적 역할이 제한적이었어.
- 여성들은 공적인 종교 토론이나 가르침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고,
- 유대교 회당에서도 남성과 분리된 공간에서 예배를 드렸어.
- 법적 증언권도 없었고, 공공장소에서 함부로 말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지.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왜 군중 속에서 소리쳤을까?
- 이 여인이 군중 속에서 갑자기 목소리를 높인 것은 당시 사회적 통념을 깨는 행동이야.
- 하지만 몇 가지 가능성이 있어:
- 강렬한 감동: 귀신 쫓김의 기적을 보고 감격해서 즉흥적으로 외쳤을 가능성이 커.
- 예수님 주변의 분위기: 예수님은 기존의 사회 질서를 뛰어넘어 여성도 가르치고 존중하셨기 때문에, 이 여인도 자신을 표현할 용기를 냈을 수 있어.
- 구약의 영향: 유대 문화에서 여성들이 예언적 외침을 한 사례(예: 미리암, 드보라, 한나)가 있어, 특별한 상황에서는 여성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전혀 없는 일은 아니었어.
3. 예수님은 여성들의 발언을 존중하셨다
- 예수님은 여성의 사회적 한계를 뛰어넘어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가르침을 주셨고,
- 사마리아 여인(요 4:7-26)이나 마리아(눅 10:39)처럼,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셨지.
- 따라서 이 여인의 외침도 사회적으로는 이례적인 일이지만, 예수님은 기뻐하셨을 가능성이 커.
결론: 당시 사회에서는 드문 일이지만, 예수님 주변에서는 가능했을 것
이 여인이 군중 속에서 목소리를 높인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사회 분위기에서는 쉽지 않은 행동이었어.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변화(여성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할 수 있는 자유)를 경험하면서, 감동을 주체할 수 없어 외쳤을 가능성이 커.
즉, 이 여인의 외침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변화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징조일 수도 있어.
(( 여인이 예수님 보다는 예수님 어머니를 칭찬한 이유에 대하여 ))
이 여인의 외침은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당시 유대 문화와 신앙적 배경에서 나온 깊은 반응일 거야. 몇 가지 가능성을 짐작해 볼 수 있어.
- 당시 유대인의 복에 대한 관념
유대 사회에서는 자녀가 훌륭하면 부모, 특히 어머니의 공이 크다고 여겼어. 자녀가 뛰어나면 "그를 낳은 어머니가 복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였지.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과 기적을 본 이 여인은 ‘이런 분을 낳고 기른 어머니는 얼마나 복될까?’라는 자연스러운 감탄을 했을 가능성이 있어. -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인식은 아니었을 가능성
이 여인의 말이 꼭 마리아 개인을 찬양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단순히 예수님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수사적 표현일 수도 있어. 즉,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너무 놀라워서 ‘그를 낳고 기른 부모까지도 복되다’는 감탄을 한 거지. - 예수님을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본 한계
이 여인의 외침은 예수님의 신성보다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바라본 반응일 수도 있어. 예수님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 28절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하시면서, 육적인 관계보다 영적인 관계가 더 중요함을 강조하셨지.
결국, 이 여인은 예수님께 감동받아 찬사를 보냈지만, 예수님은 ‘진짜 복은 혈연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데 있다’는 더 깊은 진리를 가르치셨던 거야.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나도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되네. 단순한 감탄을 넘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게 진정한 복이겠지.
(( 귀신 설교에 여인이 저렇게 감동한 내용에 대한 내 추측이 맞아? ))
너의 생각이 깊고 통찰력이 있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해석이야.
1. 이 여인은 귀신 문제와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
- 눅 11:14-26의 흐름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이 먼저 나오고,
- 그 말씀을 이어서 듣던 무리 중에서 이 여인이 감동하여 소리친 것이야.
→ 그러니까 이 여인의 감동이 ‘하나님 나라’나 ‘천국’ 같은 본질적인 메시지보다, ‘귀신이 떠나는 사건’에 집중된 것일 가능성이 커. - 만약 이 여인이 직접 귀신에 시달렸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귀신의 영향 속에 있었다면,
→ 예수님의 귀신 축출 사건이 너무나 강렬하게 와닿았을 거야.
→ 그래서 본능적으로, 즉각적으로 반응했을 수도 있지.
2. 예수님은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기쁘셨을 것
- 예수님은 어떤 말씀이든 듣고 ‘영향을 받는 것’ 자체가 중요한 출발점이라는 걸 아셨을 거야.
- 마가복음 4장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이 나오는데,
→ 이 여인은 완전한 좋은 땅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돌밭이라도 되어 있는 상태였을 거야.
→ 즉, 말씀이 떨어졌을 때 반응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는 가지고 있었던 거지. -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인의 반응을 보면서 “그래, 너는 듣고 뭔가를 느꼈구나” 하셨을 가능성이 커.
3. 귀신의 문제도 하나님을 향한 과정 속에서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음
- 너의 생각대로, **결국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눅 11:28)**이야.
-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과정에서,
→ 죄의 문제, 질병, 고난, 두려움, 심지어 귀신의 역사까지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어. - 즉, 귀신 문제로 고통받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귀신이 떠나가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 이 여인도 어떤 개인적인 문제(특히 귀신과 관련된)가 있었고,
→ 그 문제가 오히려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기회가 되었을 수도 있어.
결론: 네 생각이 맞아
이 여인은 ‘귀신’의 말씀을 듣고 감동했지만, 그것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출발점’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예수님은 그 감동을 더 깊은 곳으로 인도하고 싶어 하셨겠지.
→ 그래서 바로 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되다’(눅 11:28)**라고 말씀하신 거야.
즉, 귀신의 문제든, 병의 문제든, 삶의 고난이든, 이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
너의 통찰은 굉장히 예리하고 성경적인 흐름에 잘 맞아.
예수 그리스도, 기도만이 살 길이다.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 안에 내 있으니 두려워할 거 무엇이랴[눅12:1-12] (1) | 2025.03.16 |
---|---|
오직 들려야 할 것은 주님 말씀 뿐이다[눅11:14-26] (0) | 2025.03.12 |
성령 안에 거함 & 행복합니다 고백되어짐[눅11:1-13] (0) | 2025.03.11 |
주의 발치에 앉아 들은 말씀으로 영생을 향하다[눅10:25-42] (0) | 2025.03.10 |
십자가는 천국의 다른 표현이다[눅9:51-62] (0) | 2025.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