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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육체까지 드리리다 (출 27:1-21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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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육체까지 드리리다 (출 27:1-21 )

주하인 2009. 6. 3. 10:58

제 27 장 ( Chapter 27, Exodus )

 

 

하나님이 주신

이 흰피부

이 큰 눈동자

이 천진한 표정

이 부드러운 피부.

 

아름다운 육신을 살면서

얼마나 많이

왜곡시켰는가?

배는 나오게 만들고

허리는 아프도록 방치하고

혈압은 올리어 놓고...

그래도 정신 못차리고

식욕은 절제 못하고 ^^;;;

 

주여...

죄송합니다.  

 

 


1.  너는 조각목으로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의 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고는 삼 규빗으로 하고   
8.  단은 널판으로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
 

 단(壇).

기도하는 곳.

주님이 보여주신 규격대로 만들어야 한다.


 
9.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을 향하여 뜰 남편에 광이 백 규빗의 세마포장을 쳐서 그 한 편을 당하게

    할지니 
 
 성막의 뜰.

성전인 나의 뜰은 '육신'을 의미한다.

그곳도 동서 남북 모두 주님의 뜻대로 꾸미길 바라신다.    
 

16.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 놓아 짠 이십 규빗의 장이 있게 할지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 
 

 뜰 문.

육신의 입구.

눈빛은 아닐까?

얼굴 표정은 아닌가?

태도는 혹 아닐까?

그곳도 이쁘게 꾸며야 한다.


    
18.  뜰의 장은 백 규빗이요 광은 오십 규빗이요 세마포장의 고는 오 규빗이요 그 받침은 놋이며 
 뜰, 육신의 길이를 이렇게 하라..신다.

키를 똑같게 할 수도 없고...

아마도 주어진 육신의 모습을 잘 가꾸라시는 것은 아닐까?

배나오지 않게 하고

개기름 덜 흐르게 하고..^^;;

주님 본래 주신 모습을 최대한 잘 가꾸길..

 
    
20.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으로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되  
21.  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
  외부적으로 나타나지는 모습.

남에게 보여지는 것이 꼭 외식일 일은 아니지만

주님을 믿는 자로서 남에게 보여질 기준이 있다면

거기에 맞추어 살 수 있도록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고

표정과 말투를 조심할 일이 있다.

 또한 ,기도와 예배시간을 최대한 열심히 지키고...

그것을 지키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제 눈감은 내 내부의 모습을

묵상을 통하여 조명하였다.

 이제 그 내부를 나와 내 외부를 하나하나 들여다 보았다.

물론 눈감고 상상으로..

우선 얼굴을 따라가 본다.

 얼굴은 늘 흥분을 잘하는 씰룩거리는 근육이 발달 되어 있다.

눈은 잘 유지되다가도 갑작스레이 올려지는 눈꼬리 근육이 두껍다. ㅎㅎ

팔, 다리.. 길게 잘 유지는 되는 데  근육에 힘이 없다.

가슴... 아직은 그냥 틀은 유지하는데 조만간 흘러 내릴 듯 역시 힘이 없다.ㅎㅎ

배...

아랫배는 아니지만 윗배가 도톰하다.

허리..제법 굵다.

36인치에서 35인치 왔다 갔다 한다.

아이구.. 이 통짜 몸아.

골반.

허리가 아픈 관계로 자꾸만 아래로 뻗친다.

운동부족이 곳곳에서 들통 나지고

많이 먹는 것이 들어난다.

 엊저녁

곳 가족끼리 여행갈 장소 물색하며 - 처음이다.  모두 가기는.. 장모님도 모시고 가련다.- 인터넷을

써핑하느라 늦게까지 헤맸다.

 12시 넘었다.

요새 유난히도 궁금하다.

자제를 하지 못하고 냉장고를 뒤지니

어... 설탕 많이 들어가기로 유명한 '도너스'가 있는게 아닌가?

아내가 '왈'

'고만 배 나오도록 자제좀 해...요......'

맞다.

주님이 주신 몸인데 함부로 할 수 있나?

그래도 입이 멈추질 않는다.

겨우 반은 남겼다.

강력한 의지를 발휘해야만 했다.ㅎㅎ

 자고나니 배는 더 나온 듯하다.

아침 늦게야 일어났다.

난, 이토록 불규칙하다.

열심히 살 때는 열정적으로 하다가

얼마후 리듬을 잃고 한없이 게을러 진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수년간 거의 목숨바치듯이 수요예배, 금요예배 , 주일예배 드렸다.

그러다가 이제는 수요 예배 빼먹기는 예사.

금요일도 가끔..

일요일은 다행이도 열심히 나가려 노력한다.

 

 묵상을 집중하려지만 쉽지는 않다.

계속 성막에 대한 것이다.

어제는 눈을 감고 들여다 본 내 내적 상태였다.

눈을 감고 가만히 내 팔다리를 내려다 보았다.

푸석거리는 게 조금만 더 지나면 무너질 듯 하다.

배는 마구 나온다.

 인격을 표현하는 내 표정은 엉망이다.

주님은 오늘  성막의 뜰에 대하여 묵상시키신다.

그것은 내 외부적 상태에 대하여 점검하시는 듯하다.

'단'으로 표현되는 내 신앙의 외적인 모습.

'뜰'로 표현되는 내 육신의 모습.

'뜰 의 문'으로 표현되는 내 자세나 태도등 외부적으로 인격을 표현케 하는 부분.

늘 불을 켜고 지켜보고 감시해야 하는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외부적 소양들.

 이 모든 부분에 점검을 하고

하나하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조금은 외식적으로 보일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외부적 덕목을 다짐으로써 내적인 충실감을 더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려 하는 듯하다.

 

 외부와 내부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고

외부와 내부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반장을 시키면 착해지는 경향도 있다.

아주 힘든 아이들은 위로하고 공감해주고 마음을 달래주면 좋아지기도 한다.

 심리적으로 행동을 교정함으로 인격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도

그 당위성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

 '심리 분석'을 통하여 인격을 변화함으로 외부적 행동거지의 올바름을

나타내어 온전한 인격으로 나타내려는 정신 분석학도 있다.

 그런데 어느 것도 효과가 없지 않으며

또한 어느 것도 효과가 온전히 있지 않다.

 

  그럼에도 오늘 묵상 만을 뚝 떼어 

외적인 부분을 신경쓰라 하는 것으로 묵상하면

외적인 것으로 어느 정도의 인격정 성화가 가능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그렇듯

바리새인들이 그랬듯 '딱딱한 외식적 ' 사람들로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 자신은 거룩한 듯 착각할 수도 물론 있고....

 반면, 오늘의 외부적 다져짐을 무시한다면

그것 또한 주님의 뜻하고는 거리가 멀며

머리만 커다란 기형적 신앙인이 되고 말 것이다.

자의식이 충만한 괴팍한 자들.

 

 주님은 어제의 묵상을 통하여

내적인 부분에

자신의 의지와 양심의 등불을 밝혀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며

육신 안쪽 , 영혼의 깊숙한 곳에

커튼으로 가려진 속죄소 즉, 지성소에서

날마다 내려오는 은혜의 말씀,

'성령의 검' 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돌아보는

생명의 떡상에서 떡을 집어 에너지로 삼는,

그리고 나서

오늘 묵상에서처럼 자신의 외적 경건함도 추구하는

신앙의 모습을 취할 때에야

그것이 온전한 것이다.

 

그런데 외적 내적 추구가 쉬운가?

위의 예처럼

심리적 추구 방법을 동시 할 수 없다.

외적과 내적의 통합은 어렵다.

 

단,

주님의 지성소에서 나오는 말씀을 순종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우리 기독교인은 쉽다.

 우리가 등불을 밝히는 순종의 노력과 지혜만 있다면

넘치는 지성소의 에너지가 나온다.

그것은 영혼의 샬롬을 의미한다.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이해가 되는 기쁨이 샘솟는다.

주님의 기쁨이라면 무엇이든 준행하고 싶다.

그 기쁨이 좋아서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싶어진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세속의 더러운 것을 버린다'는

어떤 목사님의 말씀처럼,

어제 저녁  식사하던 병원 주변의 Y 중국집 안주인의 고백처럼

기도하던 중 '너는 내것이라'는 소리와 더불어

30분 이상을 땅바닥에 붙어 일어나지 못했다는 체험의 간증이후

자신이 '점'처럼 느껴져 세상의 어떤 것도

자신을 묶지 못하고 의미없이 허허로운 기쁨을 산다는 고백처럼,

그리고 그후 특별한 중국음식 개발 후 장사가 번창한다는 간증처럼..

주님의 말씀이 들려지면

나머지는 다 알아서 되어가는

주님의 지성소로 부터 나오는 내적인 정화 이후

자연스레이 외부적 현상도 따라 준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믿음의 원리

믿는 자의 따라야 할 순리인 것 같다.

그것이 '내려놓음'을 주장하시는 모 선교사님의 의미와 일치하는 것이다.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예배를 열심히 지켜라.

살을 빼라

눈에 힘을 빼고

말을 줄여라.

........

 

주님 예수님.

오늘도 말씀 묵상은 했지만

말의 거침을 자제하지 못했습니다.

단언적 말투.

한마디라도 더해서 제 자신의 똑똑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외적인 표출의 욕구.

눈빛에서 사나운 빛을 제거하지 못한 하루.

주님... 그랬습니다.

용서하소서.

우리 주님은 절 보고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내적인 추구는 깨달았으니

외부적 규격도 필요하다... 라고요.

외부적 외식적 믿음을 극도로 싫어함도

내부의 왜곡탓인 듯 싶기는 합니다.

외부적 꾸밈도 필요한 것을 인정합니다.

이제 오늘 수요 예배 참가하겠습니다.

저녁 굶겠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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