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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와 공감[삼하1:1-1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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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와 공감[삼하1:1-16]

주하인 2016. 7. 12. 16:29




10.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하니라 
   그 논리가 맞다.

사울은 생물학적으로도 죽을 상황에 와 있음이 분명하였을 것이고

그가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상황이 맞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원리 가운데서도

때가 된 것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저런 아말렉 젊은 군인에게 죽음을 부탁할 정도지....


 그런데 문제는 그 '논리'에 맞는 상황,

누가 죽여도 언제죽어도 당연히 맞을 그 상황에서

그가 '내가 알고'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다.


인간의 목숨이 논리와 이치만 가지고 아무런 감흥없이 저렇듯 죽일 수 있는가?
아버지... 죽을 나이가 다 되었으니 조금 빨리 죽이고

자식들 편하게 나누어 갖는 유산의 나눔이 맞다고 하여

많은 후레 아들녀석들이 나오고


돈 있는 사람들 편에서는

세상이 더 발전하고 경쟁력을 가지려면

민초는 '개 돼지'로 보고

'상 하 계급'을 유지하는게 

어쩌면 효율성 있는 나라의 유지를 위해서는 필요한 논리일지 모른다....

.... 이거.. 어디에서 들은 소리 같지 않은가?

'나 ' 모씨가 어제부터 이 소리로 검색어 1위로 뛰어오른 소리다.

 

싸이코 패스들.

그들의 소리는 아주 일목요연, 논리 정연하다.

틀림없는 소리다.

그런데 그들은 무섭다.


 상위 , 소위 금수저를 문 그들이

고생을 하지 않고

예수님을 어려서 믿으며

나름 정결한 신앙교육을 받고

리더의 자격에 올랐을 때

그들은 아주 큰 , 하나님의 일들을 많이 한다.

엄청나다.

그 스케일이...

그리고 술담배 딱끊고 아무런 유혹이 목에 들어와도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멋진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리더가 되어 아버지 어머니의 가업을 이어 받았을때

아주 많은 잡음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일로세워 두었던 업적들이 이곳저곳 문제를 일으키고

그들의 손에서 키워졌던 많은 신앙인 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들고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는 그들을 향해 욕한다.

그들은 옳은 논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다.

그들은 그런다.

"'내가 알기'에 저건 옳았다.

 그런데 왜?....."


싸이코 패스랑 잘못 큰 큼수저들과 

금수저 귀족 신앙인 들과 그리 차이 있음을 발견하지 못한다.

너무 논리적이고 당당하다.


무슨 차이인가?


거기에는 '논리'만 그득하고

이론만 가득하다.

그들에게는 타인을 공감하는 능력이 없다.

그들이 아는 세상에

다른이 들을 공감하는 능력이 없음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으며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새 계명을 예수님을 통해 주셨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를 사랑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높이고

나를 귀히 여기는 게 실은 맞다.


그런데....

이 사람.... 내가 알기... 에 하면서

죽어가는 사울을 불쌍히 여기는 한톨의 아쉬움이나 불쌍함,

하나님을 의식함으로 하는 주저함이 전혀 없다.

그러니.. 그는 논리적으로 맞으나 괴물같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여 사울 등의 물건을 다윗에게 가져다 주고

큰 상급을 기대하였으나

진정한 자신을 위함은 타인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기 사랑이고

그것은 파멸에 이르는 자기애일 뿐이다.



  
12.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

    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다윗 등은

요나단의 죽음이 마음 깊이 서글펐을 것이기도 하지만

사울의 일생이 죽음으로 맞이함이

어쩌면 자기 인생에 또다른 획을 의미함을 깨닫기에

사울을 객관적으로 추모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이 명하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란 큰 진리 안에서 이루어진

옳은 안타까움이기에

그의 슬피 울며 금식함이

참으로 경건하게 공감되는 구절이다.


그렇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묵상하고 설교하시는 수많은 가르침을 통하여 

사울에 대한 그의 진정한 슬픔을 깨달을 수 있었지만

그런 공감 능력이 다윗에게는 있고

사울 들에게는 없었음이

하나님이 그 다윗을 애지 중지하는 기본 심성이기도 할 지 모른다.

사울도 잘생기고 똑독하고 생각을 잘하는 자이지만

그는 '논리'와 '자기애' 만 충만한 사람으로

남을 공감하고 남의 아픔을 긍휼히 여길 줄 모르는 자였다.


그런 이들은

세상을 악하게 만들 뿐이다.


이 세상.

포스트 모더니즘이 지배하는 이 마지막 시대.

인륜 도덕이 무너지고

존경하는 세대가 단절이 되어 더 이상 없는 시대.

오직 자기애에만 충만한 자들 만이 그득한 시대다. .

그것을 시대는 더욱 부추키지 않는가?

그러니 세상에는 싸이코 패스와 그 무리들 (IS 같은.. ) 만 득실댄다.


이곳이 지옥이다.

이 땅의 세상이 지옥이 되어간다.

세상은 준비가 되어가고 있다. 

하나님이 보좌에서 일어나실 시간 만 남아 있다.


나.

오늘 나를 돌아 본다.

잘 모르겠는 구절이라서 늦은 시간까지 묵상을 뒤로 미루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에게 주시는지 하나도 감이 앉잡혀서 그렇다.

이제 '공감'에 대하여 다시금 강조하신다.

내가 더 이상 세상에 이루려고 해서 이룰 틈 하나 남아 있지 않다.

내가 무엇을 이루어도 

이 늙어가는 나를 향해 누가 박수를 쳐줄 것인가?

글쎄; 간증 거리 몇개 남기고 떠들어 대며 집회하며 나를 내세워야

영혼없는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지?

그렇다면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해 세상을 통해 기쁘게 해드릴 무엇이 남아 있을 것인가?

나에게...


공감이다.

논리만 그득했던 내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아.. 가까운 주변에..

내가 마음대로 휘둘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내 힘없는 주변에

더 긍휼한 마음으로

내 논리를 접어 놓고 바라보는 것...

그 결심하나 만을 가지고도 하나님이

오늘하루 내 인생을성고한 인생으로 바라보시지 않겠는가?

 이게 쇠퇴해가는 자의 변명일까?

아니다.

'성을 경성하는 장군보다 마음을 지키는 자가 더 위대하다. '라고 분명코

성경어디에 나와 있다.

말씀을 붙들고 그 하루만 사는 것,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빛이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고

무엇을 무서워 할까... 라신다.

말씀에 '공감'하라니

내 얼마 남지 않은 하루의 시간에

내 논리를 내려 놓고

조금은 가슴아파할 주변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리라.

비록, 가진 돈 다 내놓지 않아도

구휼과 선교에 비록 나 열심이지 못해도....



주여.

어렵게 붙든 묵상구절.

레마로 이끄시니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끌리지않는 하루는 제게 얼마나 고욕이고 불안한 시간인지요.

그래서 잘 들어오지 않도록 사단이 방해를 하지만

붙들고 말씀에 이끌리기 위하여 글을 잡았습니다.


오늘은 '공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논리만 앞서지 않는 공감...

상황이 내 이전의 삶의 방향과는 혹 달라도

주님이 말씀하시니

주님이 인도하시니

그리 한번 그들 입장에 나를 맞추어 보려 하나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어렵지 않고

오히려 그런, 나를 부인하는 작은 연습을 통하여

주님이 나를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그 기쁨이 어떤 것인지

오늘도 느낄 수 있길 원합니다.

바라옵기는

그 논리의 주체는 나고

내가 앞서기에 어떤 명분도 결국은 더 악한 개악으로 갈 수 밖에 없고

오늘 이 병상처럼 그런 것은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뿐임을

저도 알게 하시고 특별히 기독리더분들 알게 하소서.


내려 놓음이란 단어가

세상에 한참 주가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 내려 놓음의 표현이

정확한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여.

논리가 앞서는 것...

내가 주님을 앞서는 것은

아무리 합리적이고 멋드러져 보여도

결국 하나님을 가로막고 자아 충만한 것임을 알고

그런 앞서가고자 하는 욕구를 내려 놓고 말씀을 먼저 보게 하소서.

오늘 공감하라니

되지 않지만 아말렉의 원수 사울을 목전에 놓고

잠시 그 왕에서 시체로 변할 사나이를

객관적으로 불쌍히 여길 수 있을   그 상황의 진실함을 제대로 보아

공감할 수 있는 자 되ㅏ게 하소서.

분명코 어려운 일이지만

주의 원하심이시면

성령으로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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