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내 죄를 주님의 십자가로 바꿀 때(눅 23:26-43) 본문

신약 QT

내 죄를 주님의 십자가로 바꿀 때(눅 23:26-43)

주하인 2008. 3. 21. 10:28

제 23 장 ( Chapter 23, Luke )

 

 이 작은 꽃도

주님의 만드신

찬란한 빛 아래에서

자신의 적디 적은 꽃망울을

최대한 펼치기를

선택함으로써

참으로

아름다운

이 세상의

한 귀퉁이를 장식하게 되었고

얼마 전

제 디카에 불러 읽혀

이 블로그에 올려짐으로

많은 자들에게

주님의 놀라우신 피조의 능력을 나타내고

오는 모든 자들에게

잠시나마 위안을 허락하는

한 개체가 되고야 말았답니다.

드디어요.ㅎㅎ

^^**

 

 

 


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구레네 사람 시몬은

무슨 생각을 하며

십자가를 지게 되었을까?

 쪽팔렸을까?

분노 했을까?

그러다가 훨씬 더 힘들어 하는

예수란 인물을 보며

궁금해 했을까?  
 궁금을 넘어서며

흘끗 쳐다본

피와 땀으로 범벅되신 그 분의

평화를 보며

그의 영혼에

각인이 되어 버릴 어떤 전율을 얻지는 않았을까?

그의 일생은

그 본의가 아니었지만

본의로 지게된

예수의 십자가를

자신의 십자가로 나눔한 선택을 하지는 않았나?

그 결과

그 무거운

그 엉터리 같은

그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갑자기

은혜와 격정의 이름으로 바뀌지는 않았던가?

 알렉산더 루포와 그 어머니의 이름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데

이들이 구레네 시몬의 식구란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면..

어마어마한 섭리 아닌가?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세상에 죄인이 아닌 자가 어디 있는가?

자신의 죄로도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그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라는

성경의 멋진 표현은

우리의 죄로 인한

고통일 때는

아직은 온전한 의미의 십자가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통이 있을 때

그 주위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십자가로 승화시켜주시기 위해

같이 곁에서 고통을 받고 계셨던 것이다.

 

보라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되어 있지 않은가?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이 사실을 모르고

다수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거나

주님의 손내미심을 차갑게 거절함은

이 행악자와

절대로 다름이 아니다.

 

 그렇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매시..매분.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비록 죄인이지만

이 분은

이때

이런

선택을 하게 됨으로

행운을 잡았다.

예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은

그가 십자가에 죽을 죄인에서

십자가로 인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대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가?

 그렇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순간에 놓여 있다.

옳은 선택은

영원을 좌우하고

그 선택의 쌓임은

천국의 상급을 결정하고

일생의 평강을 초래하게 되어 있다.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오늘

몇 차례나

이 말씀을 되풀이 외워야 겠다.

'주님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세요."

'주님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해 주세요."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

 이 죄인은

순간의 현명한 선택으로

자신의 죄에 의한 십자가의 고통을

주님의 허락하신 십자가로

일 순간 바꾸었고

그 선택은

그 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영적 통렬함으로 바뀌어

고통은 사라지고

감탄이 남고

애절한 호소가 남아 버렸다.

"주여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생각하소서."

 

아마도,

옆 죄인은

"아~~~~~~~~~~~~~~~~~~~~~~~~

 꺄~~~~~~~~~

 이 XXX~~~~~~~~~~~'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찢어지는 고통을

그대로 몸으로 받았을 것이 분명하며

그 고통은

영혼의 삭막함으로 인하여

지옥으로 떨어지는 처참함에 몸부림 칠 게 분명하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신약에 세번이 나온다 한다.

'낙원'이라는 표현은..

낙원은

영어로 paradise , '이상향'

어쩌면

천국의 그 황홀함을 상징적으로 표현 했을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행악을 한 자가

행실에 대한 판단의 경중을 묻지 않고

무조건 '천국'에 간다면

문제가 있지 않을 까 하는 개인적 의문이 든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자식이 죄를 졌어도

스스로 자식임을 인정하고 돌아오면

천국의 백성으로 자격을

즉, 아들의 자격을 인정해주고 쓰다듬어 주면서

행동교정을 해

온전한 가정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일반적 사람들의 원리에 맞추어 짐작하고

그 따스한 가정을 상징하는

낙원같은 곳에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는

의미로 그에게

낙원의 말씀을 하신 듯  하다.

 돌려 말하면

반드시 카톨릭의 '연옥'의 개념은 아닐지 몰라도

일정기간

이 세상의 죄가

마치

검은 먹물이 들은 옷감이

물 속에 들어가 있으면

그냥 하얗게 풀어져 나와 버리는 것같은

그 일정한 장소

거기에서

영혼의 상담과 치유, 그리고 쉼을 허락받는

그래서

원래 주님이 목적하셨던

흰옷 입은 자들이 되기 위한

그러한 고귀한 장소가

낙원으로 표기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영계.

중간영계.

상층부...

 

 

 각설하고

이 죄인은

주님의 허락하신 십자가로 를 짐으로 

고통은 사라지고

감격의 장소가 되어지고

자신의 죄는 잊혀지고

그는

천국 백성의 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주님의 축복을 받는 그는

얼마나 기뻣을까?

"주하인

 네가 오늘 나와 함께 ... "

 

 이러하신 위로와 축복과 사랑의 말씀이 날 뒤덮기 위해서는

난 고백해야 한다 .

난 선택해야 한다.

난 올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내 죄를 잊어야 한다 .

주님이 더 크시니까..

 

감사하신 주님.

 

 

적용

 

1. 난 늘 행운아임을 느낀다.

 내 죄에도

 내 잘못 살아온 후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늘 내곁에 있으셨고

 내가 주님을 선택하길 안타까이 기다리셨고

 드디어는

 그 분의 귀중한 사랑을 체험케 해주시고

 내 삶의 미래를 보장해주실 것을 알기에 이다.

 

2. 성경 여섯 장 읽겠다

 

3. 어제 수술 후경과가 좀 안좋았던 환자가 있었다.

 부리나케 수술 방에 올라가 수술 장면 찍어놓은 비디오를 찾아다가

분석하려던 분주함에서

갑자기

죄스러운 맘이 들어

주저 앉아 기도했다.

 긍휼한 마음이 쏟아지고

의지 하지 못했던 마음이 깨달아진다.

 저녁에 집에 와서 분석해 보아도

기술적 잘못은 없는 듯하다.

아침에 오니 많이 좋아 졌다.

 난 주님을 선택하니

마음이 열리고

걱정은 덜해지고

여러가지 늘어났다. (실은..지식도, 자신감도..ㅎㅎ )

 

4. 선택이 중요하다.

 모든 선택의 기준에는 '주님의 뜻'이 있다.

 

5 . 고난이 있을 때 '주님의 뜻' 먼저 고려 해본다.

 내 잘못이면 회개한다.

 주님의 애매한 허락하신 고난이라면 달게 받겠다.

 힘주소서 주여...

 

6. 오늘 있을 수술에 겸허히 기도하고 대처하겠다.

 

 

 

 

기도

 주님

오늘도 생각이 많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의

놀라운 체험과

행악자 중 올바른 선택한 자의

멋진 고백을 보고 있습니다.

 

고난이 와도

고통이 있어도

그게

주님 안에서 허락된 것인 줄 알면

알지 모르는 놀라운 평안을 선택하게 될 것이고

내 잘못으로 인한 것이라면

회개함으로

차분한 안정을 되찾게 하소서.

주님의 영광을 보이길 원합니다.

주님

주님의 영광을 느끼길 원합니다.

주님

주님의 영광을 이 땅에 나타내소서 .

주여

주님 나라 계실 때에도

절 잊지 마시고

주님

제 안에 게실 때에도

늘 느끼게 하시고

주여

저로 하여금

천국의 삶을 늘 누리게 하시고

무엇보다

주님의 뜻이라 짐작되는 일을

미련하게 용감하게 밀고 나가지 않도록 하시고

주님의 뜻을 올바로 짐작하는

지혜를 주시고

주님의 뜻을 순종하여 나갈 용기를 주소서.

저의 자손을 기억하소서.

제 아내도 기억하시고

이 주위에 저와 관계되어 마주치는 모든 자들을 기억하시고

오늘 수술에도 함께하시고

늘 나를 기억하소서

축복하소서.

잊지 마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밑의 글은  다 읽어 보지 못해

가 부를 표명하기는 그렇지만

참고의 의미로 긁어다 놓았으니

참조 부탁드립니다.

************************************************************************************

 

 

 

낙원과 천국 (펌)

              http://cafe.naver.com/anyquestio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590

 

천국과 낙원


낙원과 천국은 그 의미가 좀 다르다.

알기쉽게 말하자면 낙원은 천국의 영역 내에 포함되어진다고 하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천국은 재림 후의 영원한 거처를 말하며, 낙원은 죽은 자들 중 의로운 자들의 영혼이 예수님의 재림까지 시한적으로 머무는 곳을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낙원도 천국, 하나님나라의 영역이며 천국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낙원이란 카톨릭이 주장하는 중간 장소적인 개념과 같은가?

정확히 표현하자면, 낙원은 사후영혼이 가는 영적개념(靈界)으로서, 장소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태적인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낙원이 지구 상 어느 장소나 지역에 실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낙원은 카톨릭이 말하는 연옥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그곳은 부자와 나사로의 경우와 같이 회개의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낙원은 구체적으로 신약에 세 번이 언급된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후 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우리는 먼저 낙원에 대한 정통신학적인 견해를 살펴보자.

물론 성경적인 개념을 외면하면서, 교리와 신학을 우선적으로 살펴보자는 뜻은 아니다.

이 용어적인 개념을 정통신학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함이다.

먼저 아가폐 성경사전을 본다.


"또한 낙원은 의로운 자가 죽은 후에 사는 거처로 간주되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낙원과 반대되는 곳은 악인들이 죽은 후에 가는 음부(스올/하데스)로 간주되어 있다. 예수님과 함께 처형을 당하는 강도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예수께 요청하였다. 그 때 예수께서는 그 날 그 강도가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241쪽)


다음 신성종목사(전 충현교회 담임목사)의 저서를 살펴보자.


"개신교에서는 각 개인의 육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계속 남아서 자아를 의식하며 활동한다고 믿는다. (전 3:21. 12:7) 중요한 것은 믿는 성도들의 영혼은 축복의 장소인 낙원에 머물며, 불신자의 영혼은 형벌의 장소인 음부에 일시적으로 머문다. 그러다가 새하늘과 새 땅인 천국과 영원한 장소인 지옥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신성종목사, 교리도 재미있다. 160 쪽)


“낙원은 영계이며 <천국의 한 장소>로 성도들의 안식처이며 대기하는 장소이며 영이 거하는 장소이다.”(원세호, 성경조직신학, 149쪽)


다음 데일리 성경 교리연구를 보자. (38쪽)


<중간기 상태의 개신교의 견해>

중간기 상태는 역사 이래로 죽은 자들의 모든 영혼들이 그리스도에 의한 최후의 심판 때까지 대기하는 시간, 혹은 그 기간의 상태를 말한다.

(1) 인간은 죽음과 동시에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며 그 영혼은 중간기 처소인 '낙원'과 '음부'로 각각 들어간다. (눅16:23-25)

(2) 최종심판은 죽음 직후 이루어 지지 않는다. 세상 끝 날에 각인에 대한 최종심판이 있다. (계20:12-15)

(3) 영생과 영벌의 장소는 세상 끝날 이뤄질 천국으로서의 신천지와 영원한 지옥이다.(계20:10) 지금의 중간기 상태는 완전한 영생과 영벌의 상태와 족히 비교될 수 없다.

(4) 중간기 상태에서는 최종심판에 영향을 줄 회개의 기회가 일체 없다.(시6:5. 눅 16:25-26. 히9;27)

(5) 중간기 처소인 낙원과 음부에도 각각 축복과 형벌이 있지만 새하늘과 새 땅에서의 행복과 형벌에는 비교될 수 없다.(계20:10)


즉 낙원은 죽은 자의 영혼이 거하는 영적인 장소이며, 예수의 재림 후에 신체적인 부활을 하게 되면 천국에서 영원히 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이 가장 잘 묘사된 것이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성경구절일 것이다.

다음은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이다.


"이 비유에 나오는 사후생활에 관한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은 사후생활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적어도 사후생활에 관하여 되돌이킬 수 없이 좋은 가능성과 바꾸어질 수 없이 악한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덧붙혀 말해야 한다."(도널드거스리, New Testament Theology 820 쪽)


크레그 볼룸버그의 "비유해석학"을 인용한다.


"그래서 이 비유의 중요한 교훈이 이런 경향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1) 나사로처럼 하나님이 도우시는 사람들은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 이끌려 갈 것이다.

(2) 부자처럼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는 형벌을 맛볼 것이다. (263쪽)


즉 정통 개신교는 분명히 심판이 세상 끝날 때에 예수님 재림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십자가의 강도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십자가 강도는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며, 그렇다면 그 강도는 예수님 재림이전에 심판도 없이 천국에 갔다는 이야기일까? 다시 말해서 엄격히 말하자면, 천국과 낙원은 동일시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천국,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은 매우 광역적인 의미를 포함한다. 다만 이곳에서는 궁극적이고 종말적인 개념의 천국을 말한다.

낙원은 성경적인 의미로 볼 때에 중간상태의 개념으로 볼수 있다.


바울은 고후 12장 4절에서처럼 낙원에 갔다 온적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심판없이 천국에 갔다가 다시 올 수는 없다. 구약에도 낙원은 세번 묘사된다

느2;8의 삼림. 전2;5의 동산. 아4;13의 과수원 이며 에덴동산을 가르킨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낙원을 죽은자의 영혼이 최후의 심판까지 대기하는 중간적인 상태의 개념으로 보고 있으며 그러나 최종심판에 영향을 주는 회개의 기회가 없다.

카톨릭은 천국. 연옥. 선조림보. 유아림보. 지옥이라는 5가지 개념으로 중간개념을 설명하며 연옥은 영세를 받았으나 공덕이 부족하여 천국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이 소정의 정화기간이 되면 천국으로 옮기는 곳으로 믿으며 이것은 본인과 친지와 가족의 기도와 간구도 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중세의 면죄부 사건을 일으키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선조림보란 지옥의 가장자리를 말하며 유아림보는 유아영세를 받지 못한 유아들이 형벌이나 행복이 없이 지내는 처소를 말하며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


하나님 나라(천국)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영역적인 개념을 뜻하며 자신의 몸. 교회. 낙원. 지상의 왕국도 하나님의 나라의 일부이다.

눅14;17에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말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과 그의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재한것을 동일한 것으로 보거나 (마11;28 눅11;20) 겨자씨의 성장 (마13;31) 혹은 밭에 뿌려진 씨앗 (막4;3-20)으로 볼때는 하나님의 나라는 내면적이고 영적인 실체를 말하고 있지만, 종말적으로는 장차 임하는 심판적인 하나님의 왕국으로 표현된다.

하나님나라, 천국은 다음과 같이 크게 세가지 개념으로 분류되어진다.


첫째는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실제적인 신정정치의 왕국.

둘째는 미래적이고 영적인, 종말적 개념의 실체.

세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순종하는 개인적인 성도로 구성되는 내면적인 의미


즉 우리가 죽어서 가는 낙원도 천국이며,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성도들로 정의된 내면적인 영역도 천국이다. 또 우리가 궁극적으로 영생을 누리게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완성된 천국이 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예수님은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하늘의 하나님 나라의 영역은 에수님과 함께 이 땅에 도래하였으며,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왼성되어 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영역이며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다.

천국은 현재적이며 진행적이며 확대되어지며, 종말적으로 완성되어지며 그 통치영역을 더욱 확장하며 진행될 것이다.

영역적이며 개념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모든 영역적인 의미를 포괄한다고 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종말적인 개념의 장소로 생각하는 곳도 물론 천국이다. 천국에 대한 내면적인 의미만을 강조함으로 인하여, 종말적이며 궁극적인 개념을 부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어떤 사람은 천국과 하나님나라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

    니라“(마19:23-24)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는데,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하였으며,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라는 설명과 함께,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움을 다시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마태에게 천국과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가 다르다는 설명은 전혀 논리적이지 못하다.


(마태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누가13: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위의 두 성경구절은 하나님나라와 천국이 호환되어짐을 말한다.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에서 볼 때에 아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있는 곳이 천국이며 하나님나라이며,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에 있었다는 것이 되어진다.


또 변화산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변화산 사건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준 것은 그들이 "죽기 전에" 보여준 하나님 나라와 그 왕권이다.


마태: 죽기 전에 예수님이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가 있다.(마16:28)

마가: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가 있다(막9:1)

누가: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자가 있다.(눅9:27)


모세와 엘리야는 이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여주었고, 죽어야만 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의 왕국을 "죽기 전에" 보여주었으며 "죽기 전에" 미리 주님이 왕권을 갖고 오는 것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정통신학이 말하는 낙원과 천국을 보자....


#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은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는다"(눅16:25) 라고 했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은 부자가 가기를 아주 갈망하는 아주 안락한 곳에서 - 분명히 지옥불이 타오르는 곳이 아닌 - 의식을 가지고 거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부활 전이기 때문에 나사로도 구약의 성도와 같이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신자 들도 죽은 후에 바로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겼다고 보는 것이 옳은 듯하다. (웨인그루뎀의 조직신학, 중, 520쪽)


# 대다수의 사람들은 천당을 이 세상에서도 누리고, 또한 미래에도 영원히 있게될 하나의 상태로 생각 한다. 그러나 성경은 천당이 <하나의 장소>임을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은 <거할 곳이 많은 아버지의 집>인 것이다. 신자들은 그 안에 있고 불신자들은 그 밖에 있게 될 것이다. 의인들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뿐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받게 될 것이다.(루이스 벌콥, 기독교 신학개론, 379쪽)


물론 천당이란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죽어서 가는 궁극적이며 종말적인 천국은 하나의 장소적 개념이라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 따라서 영생은 반드시 있다. 성경은 영생을 구원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나라>에 간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영생이 우리가 믿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우리가 죽으면 육체는 소멸된다. 그러나 영혼은 죽지않고 남아 있다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다시 육체와 함께 부활하게 된다.(교리도 재미있다. 신성종 전 충현교회, 158-159쪽)


그러나 우리는 신학을 참고할 수는 있지만, 신학이라는 학문을 진리로 믿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이것이 중요하다.


-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4:13)


-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있는 자는 들으라(마13:43)


-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12:7)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여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갈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받으실지니이다."(욥1:20-21)


-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12:23-24)


-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2-24)


-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8-10)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116:15)


-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전15:19)


-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0-21)


-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30)


-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10:30)


-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계6:9)


-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 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계20:4)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직접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2-6)




[목록보이기]를 클릭하시면 아래 여섯곡을 더 들을 수 있답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갈보리 십자가에
그가 찔림은
얼마나 아프셨나
십자가의 길
갈보리산 위에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