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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뜻이라 착각하는 성급함(눅 23:1-12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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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뜻이라 착각하는 성급함(눅 23:1-12 )

주하인 2008. 3. 19. 11:48

제 23 장 ( Chapter 23, Luke )

 어두울 때 일수록

주님의 십자가를

더욱 집중할 수 있게 하소서.

 

 


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다수가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다.


  

2.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고소하는 사실이

사실이긴 하다.

 주님의 뜻과

반대로 해석하니 문제지만..

자신의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과 다르니

가장 귀한 하나님의 뜻이 죄로 비쳐진다.

 

 
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예수님도 시인하신다.

그 일은 했다.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소수가 옳을 수도 있다.

그 소수가 나쁜 자 일 수도 있다.
 


5.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자신의 논리에 철저히 맞추어 해석했다.

자신의 논리.

편견.

집착.

아집.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헤롯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기뻐했다.

심히..

 그러나,

그는 주님을 만나되

주님의 이적을 기대했다.

주님의 생명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는

세상을 재미나 소일 거리로 본다.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주님은

대답할 가치를 못 느끼신다.

 

배울 모습이다.

어리석은 일에는

권면하되

말을 섞지 마라.

그냥 뒤로 물러나

가만히 있자.

무시하지 말고... .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그래

힘써 고소해라.

모든 게

주님의 뜻이시다.

십자가를 지시게 하기 위한..

 너희의 미련함도

너희 들의 잔인함도

또,

너희 들의 경박함도

너희 들의 무리의 핍박도

주님의 뜻이다.

비록 승리하는 듯하여도

주님의 눈으로 보면

예정된 스케쥴일 뿐이다.

엑스트라 들이여.

 

 

 
 큰 아들이 군대에 들어갔다.

잘 인내하고 이해하던 마음이

어느 순간인가

잔소리를 하게되었다.

그리고 나서는

난 당황했다.

 주님 앞에서 그리도 열심히 달려와서

이제는 자식에 대하여

올바른 아버지의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

착각했던 모양이다.

 환자는 많이 늘었다.

지난 주 부터 정신없이 바빠서

묵상도 게을리 하게 되고

말씀을 열심히 사모하지 못했다.

그래서 인가...

속이 쉽게 뒤틀려 올라오려 한다.

아이가 들어가고

내 속을 자꾸 들여다 보았다.

아직도

다 큰 아이를 통제하려는 모양이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하고

기대 수준을 슬쩍 높이어 놓아

맞지 않으니 속이 흔들리는 것이다.

그때

내 속에서 올라오는 판단들은

일견 다 맞다.

아이는 걱정 덩어리다.

답답하다.

속상하다.

그 판단의 상당한 기준이

보편적 세상의 사람들의 기준에 비슷한 내용들이다.

'지금 쯤 장래에 대하여 열심히..

 일찌기 들어와 동생과 오붓한 대화를 ..

 부모님께 친절한 ...

 ..........................'

 

 무리들은

자신 들의 논리에 따라

철저히 주님 예수님의 행동을 분석했다.

 그 논지의 근거로 제시하는

그 분 예수님의 행실은 하나도 거짓이 없다.

그 행동에 대한 판단이

주님의 뜻과

정 반대 인 것이 문제다.

그러나,

그들

무리와 헤롯의 비판의 심성에는

전혀 다른 논리가 숨어 있는 듯하나

온전히 같다.

무리들은

아집과 독선, 편견.. 이 있지만

헤롯은

철저한 재미 위주의 그것이다.

기본 바탕은 달라도  동일한 것은

그들은

'자신 들'의 이익 -정서적이든, 현실적이든,..- 을 위해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일 뿐이다.

 반면

예수님은

철저히 세상을 위한 당신의 희생의 차이이다.

이것이 이처럼 큰 차이를 보인다.

 

 아들을

내 기준에 맞추어

절제하고 짜르고

고치려 하고

그 안에 거하기를 원하는 것은

겉으로는 맞는 듯하다.

하지만

그게 꼭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내 기준에는 그럴 듯하지만

자식의 입장에 바꾸어 보면

그 시대의 아이들의 정서에 비추어 보면

또 그럴 수도 있다.

장래에 대한 과도한 욕심이나

현실의 비교 등에 맞추어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이 아이를 치리하신다는 개념을 두고

멀리 보면

아닐 수도 있다.

지 나름대로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모습으로 변할지

내가 또 어찌 아는가?

 

주님은

내 속을 다시금 들여다 보길 원하신다.

그게

무리의 다수의 의견과는

조금의 상치될 지 모르지만

주님 안에서

그들의 정서적 안녕을 위해

그들의 행복을 위해

내려 놓음도

또한 큰 교육적 '선'일 수도 있다.

 

아이를 위하여

나의 넓어진 시야를 위하여

주님 안에서

남들을 위하여

잠시 기도하고 내려 놓을 것이다.

 

 

적용

 

1. 아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2. 그 아들을 이해할 능력을 위하여 기도한다.

 

3. 내려 놓음을 묵상한다.

 

4. 성경 여섯 장 읽겠다.

 

5. 내 주위를 위하여 기도한다.

 특별히 가까운 자들을 위하여..

 

 

기도

 

주님

옳다고 생각되는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옳다고 생각하지만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아니

잊지 않게 하소서.

옳다고

다른 많은 자들도 그리 생각한다고

그게 옳을 것이라

단정짓는 악습을 버리게 하소서.

주님의 뜻이라고

밀어버리는 성급함을

이제는 버리게 하소서.

어떤 판단이 일 때

주님께 한번 더 무릎 조아릴 수 있는

의지를 허락하소서.

안된다고 생각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게 하소서.

주여

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확실히 알고 나가는

성장된 믿음을 허락하소서.

조신하게 하소서.

 아이의 앞날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주여

인도하소서.

주여

불빛의 따스함만 사모하지 않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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