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부활하신 주님 예수님의 체온 ( 눅 24:1-12 ) 본문
제 24 장 ( Chapter 24, Luke )
(펌)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새벽 네시에 일어나서
안양 종합 운동장에 나가
부활절 연합예배의 헌금 찬송을 부르고 왔다.
안식후 첫날 새벽에 말이다.
그 첫날 새벽에
집에 돌아와
불빛 아래에 집어 들은 큐티 첫 구절이
안식후 첫날 새벽에..다.
난,
묵상집을 집어 들어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했지만
여자들은
향품을 준비하고
무덤가로 모였다.
난,
부활하신 주님을
내 나름의 죽은 신앙으로
향품으로 단장하고
무덤 속에 묻고
제사만 되풀이 하려는
그런 어이없는 행위를 되풀이 하지는 않았던가?
정말?
주님은
나에겐
살아계시고 현존하셔서
공감하고 만져주시고 터치하시고 의논에 응해주시는
그런 살아계신 믿음이던가?
아니면
종교제례 행위의 습관으로 기도 드리고
예배 드린 후 일상의 것은
세상의 사람들과 하등 다름없는 계획과 고민과 열심으로
똑같이 살고 있지는 않던가?
여인들은
신실한 자들이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끓어 넘치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부활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그분의 말씀을 인정하지 못했다.
부활이란
그렇다면
어떠한 개념인가?
수도없이 부활 부활 부활하고 들어왔고
아침 연합예배의
그 수많은 목사님 들의
부활 선언에도 불구하고
왜 감동은 그리 크지 않은가?
무엇이 부활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는 것은
전능하기가 이루말할 수 없는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 큰일도 아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부활이 뭐 그리 큰일이고
큰 의미라서
부활신앙을 말하는가?
부활을 믿는 다면 어찌 해야 하는가?
감동도 없이
머리 속의 이해하고 노력하려는 의지만 가지고?
첫 사랑, 성령의 충만함으로 체험되어진
아려했던 그 기억 만으로 증거의 흔적을 삼아야 하는가?
아니면
나이들어 머리 벗겨지고 하얀색 머리털로 뒤덮이며
이마에는 주름으로 가득찬
경험 많으신 노인 목사님들을 위한
celebration으로서로 만 의미가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붉은 천으로 온통 깔린 운동장의 무대를 밟고
실크로드 단복에
부활을 상징하는 자줏빛 보타이와 허리장식을 두르고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 찬양 몇 곡 부르며
사람들의 박수의 열기를
기쁜 마음으로 기억의 한켠에 접어 둔 다음에
몇년 몇월 며칠의 부활절날의 기억으로 첩을 만들어 둔다음
그것으로 의미를 접어 두는 정도로 끝나야 하는가?
여인들이 향품을 들고 무덤가에 모여드는 것처럼?
......
나에게
정말
과연
부활의 의미는 어떻게 받아 들으길 바라시는 가?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난
혹시 예수님의 시체를 찾아 헤메이지는 않던가?
예수의 시체는 무엇인가?
시체란
움직이지 않는 생명력 없는 육신을 말한다.
난
예수님을 무엇으로 인지 해왔는가?
그냥
영적 감정적 안정감을 주시는
위안의 도구로 밖에 생각치 않고 있는 것은 아니던가?
그러기에
내 속에서 선한 생각이 나오고
흔들림이 적어지면
나도 모르게 게을러 지던 것을 되풀이 해오진 않았던가?
남에게도 그것만 강조하지는 않지 않던가?
아니면
무엇인가?
난 내가 규정지어놓은
믿음의 틀에
남과,
주님마져 집어 넣어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너무 터부시 하고 있지는 않지 않았나?
그러한 것이
나에게 어떤 것들이 있었는가?
왜 근심해야 하는가?
알면서도 왜 근심하는가?
부활은
기독교의 본질이고
본질은 '평강'임에도
왜 근심하는가?
정말 올바른 믿음인가?
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서두에서
안식 첫날 새벽 이야기는
나의 그 시간을 정확히 맞추심을 말했고
그것은 개인적인 의미로
다가왔다.
부활은
찬란해야 한다.
찬란한 옷을 입은
천사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부활의 시간에
나에게 다가올 것이다.
오늘이 부활주일이다.
해마다 그랬지만
그러나,
부활이 그렇듯
Ecstasy는 아니지 않은가?
부활절의 의미는 모르는가?
안다.
예수님의 피흘려 죽으신 몸으로
지성소에 피뿌린 제물을 상징하시고
지성소에서 세마포 옷을 갈아입고
뜰로 내려오는
대 제사장의
축복을 나눠주는 보혜사의 의미. ...
부활이 없으면
구속의 사역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
잘안다.
잘 앎에도
마치
생일 날
생일 자체를 즐기지만
아들이 내 아들로 난 것이
그리 경이롭지 못하게 느껴지는 것 같이,
부활도
단지 인식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산 자
죽은 자
산 믿음
죽은 믿음
산믿음은 무엇이고
죽은 믿음은 무엇인가?
고민하고 근심하는 것이 없고
기쁘기만 한 감정적 안정이
무조건 산 믿음인가?
구원파의 교리처럼 '죄책감'을 없애주고
잘못된 내적치유의 기법처럼
감정적 편안함이 부활의 증거인가?
살아있는 믿음은
주님과 동행하는 체험이 늘어나
늘 살아서 역사하시는
생존하는 하나님을 느끼는
코람데오의 신앙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감정적 편안함 뿐 아니라
외부적으로도
주님의 향기를 내뿜을 수 있는 인격적 도야를 증상으로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은사 만으로 대화하듯이 하는 것은
또
부활 신앙의 증거로 보기에는 위험성이 다분하다.
영적 세력에는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사단도 많으니까...
그렇다면
이러한 어려운 조건으로
어찌 산 믿음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살아있는 믿음의 증거는 이리 되어야 할 것이다.
말씀이 꿀같이 달아야 하고
말씀이 응답의 기준이 되어야 하고
어떠한 판단에도 주님께 여쭈어 보고 진행이 되어 야하며
남에 대하여 불필요하거나 불쾌한 반응을 유발되지 않는 선한 행실이 나와야 하고
무엇보다
그의 내면에 기쁨이 선결 조건이 되어야 한다.
운행하는 행실에 거침이 없어야 하고
겸손이나 희락등
성령의 열매가 그의 인격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주님을 이야기 할 때마다
가슴에 놀라운 평화가 동반되어야 한다.
이것이
살아 있는 믿음의 전제 조건이며
부활신앙의 올바른 방향이다.
11.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부활은
하셨으되
부활의 신앙은
누구에게나 임하는 것은 아니다.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도
부활하신 하나님, 예수님의 증거는
간접적으로 보았으되
그 일을 기이히 여길 뿐이었다.
마치 우리처럼...
날마다 말씀으로 인도받고
말씀의 체험을 하고
십자가 원리와
성령의 사죄은총의 원리에 대하여
부활에 대하여
철저히도 앎에도 불구하고
삶에 힘이 없고
무기력 한 우리다.
세상의 것은
관심에서 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늘
뒤를 쳐다보고
군침만 흘리는 닭쫓던 개 같은
무지한 미련한 부족한 신앙인의 모습이다.
사지의 힘을 완전히 빼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천국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아직도
어깨에서 멍에를 떼어내고 있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이다.
가끔은
주님의 은혜로 놀라운 평화를 이루면
또한
속에서 무지가 올라와
알게 모르게 이웃에 교만의 해악을 끼치고
거만과 포악과 아집의
더러운 악취를
슬슬 이웃에게 뿜어대는
공해 배출 공장 같은 자가 바로 나다.
베드로 일행을 보라.
이처럼 놀라운 부활을 보고도
막연히
부활했을 듯한 신앙을 취하고는
힘없이
다시 디베랴 어부의 생활로 결국 내려 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부활신앙에 대하여
주님은 어찌 말씀하시는가?
부활은 하셨으되
그 부활 신앙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활은
찬란한 옷을 입은 천사가 축복할 대단한 영광이다.
부활은
단지 celebration만 하고 말 가벼운 일이 아니다.
부활은
베드로들이 그랬듯이
주님에 대한 사랑의 의지를 놓치지만 않는다면
결국은 우리의 믿음에도 놀랍게 꽃피울 수 있는 것이다.
부활신앙의 끝은
예수님과 비슷한 성화를 이룸을 뜻한다.
부활은
우리가 죽도록 붙들어야할
대 축복의 개념이다.
부활은
이것이 없으면
천국으로 갈 기회가 없는 엄청난 보물이다.
부활은
곧 나에게도 다가올 '숙명'의 느낌이다.
아니
지금도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그 축복 속에 살고있다.
하지만
모든 일상의 전부가 그 부활의 신앙으로 가득차야 한다.
.............
기도
주님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부활에 대하여
조금은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부활은
그게 마치 공기가 없으면 죽듯이
부활이 없으셨다면 우린 지옥 백성으로 살 수 밖에 없을
귀한 진리임을 앎에도
우리 일상에
그리 찬란한 의미를 비추지는 못함도 또한 사실입니다.
이제
부활이
저 개인적으로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일상의 삶에 들어가면
어쩌면
머리속의 상징적 의미로 밖에 치부될 위험성이 많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주여
부활은
실제로 폭죽이 터지듯
찬란한 옷을 입은 천사가 나타나서 알려주듯
그리도 대단한 실제적 의미가 있음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저의 부족한 것을 아시는 주님.
아직도
어두운 부분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시는 주님.
그들이 절 죽은 믿음,
예수님의 시체만을 찾는 믿음으로
주저 앉히려 하지만
주여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이제는 새 사람
새 믿음이 되게 하소서.
금방은 아닐 줄 압니다.
베드로가 그랬듯이
간접적인 증거를 눈 앞에 보면서도
꺄우둥하는 그 어리석음은
인류 본연의 죄악성 탓인 줄 알고
저도 휴우 하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대 사도가 되었고
사도의 행전을 장식하는 초미의 대 사도가 되듯
저도
개인적으로 부활의 신앙으로 거듭날 기회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하게 하소서.
싱겁고
힘없고
차갑고
무기력하고
논리적 수준에서 머무는 신앙이 아니고
주님
살아계셔서
저와 동행하시고
늘 말씀으로 치리하시고
거듭 새 생활로 바꾸시고
알게 모르게 일상의 아픔과 힘듦을 고치시고
축복을 주시고
인도하시고
허깅해주시고
꿈으로 찾아오시고
관계를 만들어 주시고
보듬어 주시는
살아계신
예수님의 체온을 느끼고 사는
믿음의 소유 자가 늘 되게 하소서.
도와주소서.
부활의 신앙을 크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만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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