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내 원하는 것과 원할 것(시104:19-35) 본문
제 104 장 ( Chapter 104, Psalm )
난
내 삶의 여러가지 분야에서
이 처럼
탄탄대로이길 원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굴곡을 원하시면
그리 따라갈
곧은 마음을 원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하나가 되어
내 원할 것이
내 원하는 것이 되게 하소서
28.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주님의 만드신 '원리'를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없다.
그 안에서 해가뜨면 일어나거나 자고
달이 뜨면 자거나 움직인다.
하나님의 자연은 자연스럽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주님의 성령을 받아
늘 새로워 져야 한다.
이 땅에서 욕심으로 더러워진 마음과 육신을
주님의 성령으로 그래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새로워 질 수 밖에 없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인간의 사사로운 욕심이나 원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원리를 넘어서 취하려는
헛된 욕심을 내려 놓는다는 것이다.
주심이나 안주심 조차 주님의 원리에 맡기는 것이다.
주시면 풍족히 주시겠고
안주시면 그것을 통하여 누리는 영적 만족감이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그게 새로운 것이다.
이 지면의 삶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성령'으로만 이해가 가능한 삶이 다.
33.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그때,
내 평생을 통하여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 살아 있는 생존의 동안에
내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라는 고백이
탄성처럼 터져 나오게 될 것이다.
34.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
나.
정말 주님께 드릴 선한 것이 별로 없다.
선교..도 제대로 못하고
구제도..그냥 그냥 가장 기본 밑바닥으로 하고
전도..도 더 열정적으로 못하고
선한 영향을 주위에 미침은 .. 거의 제로다.
그럼에도
나 주님 앞에 이리 얼굴 들고 뻔뻔히 ^^; 사는 것은
'아주 아주 죄송한 분량'이지만
아침 마다 큐티를 하려 몸부림 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세요.. 주님'
기쁘다.
내 마음을 표현 해주시는 구절 같아서 기쁘다.
난..
내 삶은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할 삶이다.
찬송하고 살아야 한다.
사는 것은
수도없는 희노애락의 회오리 속에 거하는 것이다.
그 감성의 회오리의 근본은
이제와 돌아보니
거의 대 부분 내 마음이 근원이었다.
자극은 외부에서 올지 몰라도
그 자극을 받아 스트레스로 느낌도,
아무렇지 않음도
오히려 은밀한 쾌감으로 받음도
모두 '내 속'에 원인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원함이 어떤 것'인가를 정확히 아는 것이 정말 중요했다.
세상이 발달해서인가?
' 자신이 원하는 것' 들은 너무나도들 잘안다.
원하는 대로 사는게 지금의 포스트모더니즘 세상이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산다고 그 마음에 평안이 있을까?
아니다.
혼란 투성이다.
그렇게 마음대로 살다가 서로서로에게 막장으로 대하게 되고
결국 그 영혼은 깊숙히 더러워져
그 곤고함을 견디지 못하고 각종 더러운 영적 병들이 생긴다.
'포악', '우울' , '횡포', '무의미'..'자살' ..
그러면 어째야 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어차피 '원죄'로 인하여 더러워져
세상의 하나님이 만드신 원리에서 벗어나 있기에
지금과 같은 문제들이 생겨난 바,
그 안에서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바대로 산다는 것은 위험하고
바라는 바대로 살지 못함은 시들시들거려지고 속상하고 짜증나고 힘없는 삶이 되기 쉽상이다.
그렇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어차피 현대인의 삶은 그것이다.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자들도 세상을 허겁허겁 살지라도
그영혼의 곤고함은 그들도 느끼고 있다.
누구나 다 그렇다.
그렇다면 이 '원하는 것'과 그렇지 못하는 것들과의 괴리는 어찌 해결해야 하던가?
그렇지 못한 것이 '내가 원할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우선,
모든 게 '내 문제 '였음을 인식해야 한다.
자극은 밖에서 있지만 실은 내 속의 문제로 그리 됨을 인정해야 한다.
내 속은 왜 그리되었는가?
상처.. 성장환경.. 유전적 이유가 원죄에 겹쳐진 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원할 것'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원리는 오늘 시편 구절을 통해서 나온대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에 맞추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으로 맞추어지는 것.
그게 '내가 원할 것'이다.
그런데 '원하는 것과 원할 것'의 차이를 알고
원할 것을 내 원하는 것으로 바꾸어야 하는 당위성을 안다고 해도
그것을 어찌 좁힐 수 있단 말인가?
며칠 전 묵상에서 ' 의료기 업자'가 괘씸한 것을 깊이 묵상하니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칭송', 떠 받침' 이었다.
그러나, '더 바라는 것'은
'주님 말씀대로 따름'이고 '겸손'함이고 '아무렇지 않음'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의 괴리'는 날 답답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려했다.
하지만, 말씀을 더욱 묵상함은 날 자유로이 한다.
기도는 내 영혼을 뻥 뚫리게 한다.
그렇다.
원함과 원할 것을 깨닫는 것 조차도 성장이다.
그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것은 더욱 성화의 길이다.
어찌 행해도 원할 것이 내 원하는 것이 되었다면 '완전 성화'다.
그 길을 향해야 함은 주님의 뜻이시다.
그리되어야 오늘 말씀하시는 '주님의 원리'안에 자유로움이다.
그 자유로움은 '천국'의 삶을 이야기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길을 향하는 우리의 삶의 태도는
'매일 묵상'이 되어야 한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묵상함을 주님이 기뻐이 여기시는 것을 확실히 체험하여야 하고
그로 인하여 생기는 영적인 기쁨으로
주님을 송축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 길이 주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것이다.
나.
오늘 더욱 기뻐 한다.
연휴 중 많이 나태했지만 말씀 묵상을 계속하려 애썻다.
연휴 끝나고 주님이 그 묵상함을 기뻐하신다 하신다.
이제 나.
내가 원하여야 할 것은
주님 말씀 안에 씌여 있고
내가 아직까지 벗어버리지 못하는 세상의 원함을
조금씩 묵상 가운데 벗어버리고 있다.
조금 있으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내 원할 것을 넘어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적용
1. 매사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한다.
2.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내 과거의 흔적'인지
진심으로 주님도 원하는 것이신지 맞추어 보는 노력을 한다.
3. 두 사이의 괴리는 '말씀'을 선택함으로 내려 놓는다.
억울함과 손해남 등의 어이없는 감상은
존중하되 내려 놓는다.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어 새로운 내가 창조됨(30절)을 기대한다.
4. 말씀 묵상..
(34.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 )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 신다.
주님이 내 묵상을 가상히 여기실 것을 기대하며
여호와로 즐거워할 유일한 길임을 깨닫는다.
가상히 여기실 것이다.
가상히 여기시라고 고백하는 자부심을 느끼길 원한다.
어떤 상황에도 주님으로 만 기뻐한다.
즐거워한다.
그 기본이 말씀 묵상이다.
5. 성경 세장 읽겠다
기도
주님.
오늘 말씀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창조의 손길을 다시 한번 그려 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 질서를 존중하며
기뻐히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생물들과 주님을 기뻐하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원리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원죄로 인하여
지금 그 원리에서 너무나도 벗어나 있고
그 안에서 다시 주님 안으로 회귀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제 모습을 다시한번 투영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원하는 것과 원할 것을 확연히 깨닫게 하시고
원할 것이 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되기 위해
주님의 말씀 묵상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음을
다시한번 확인시키심으로
저로 지금까지의 삶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칭찬으로 등두드려 주시는 것 만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이제 다시한번
말씀의 내용을 통하여 기도합니다.
주님
제 말씀 묵상을 가상히 여겨주십시요.
제가 주님을 찬송드리는 삶을 살겠나이다.
감사합니다.
제 자식들 그리하게 하시고
제 아내 그리하게 하시고
제 가족 그리하게 하시고
모든 이곳을 들리시는 블로거들 그리하게 하시고
세상의 모든 믿는 자들 그리하게 하시어
세상이 주님 나라의 삶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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