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내 영혼 흐름의 순서 (마10:16-23) 본문
제 10 장 ( Chapter 10, Matthew )
세상의 어리석음과
육신의 허무함과
물질 세계의 혼탁함과
모든 어지러운 유혹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이리
녹아나길 원한다
난
오늘
그 눈녹듯 함을 전하는
전령사 되길 원한다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미움을 받는 것.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을 지 모르나
나에게는
아픔이 크게 느껴진다. ㅜ.ㅜ;
어떨 땐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있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참고 참다가 한번 씩 '왈칵'하고 분노로 터져나올 때도 있었다 ㅜ.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는 급한 성질의 원형도 있고
옳다고 생각하면 '확 ' 내지르는 면도 많아
두가지 면이 내 속에 공존하다가
어떤 때는 충돌을 일으키며 그것이 갈등으로
날 힘들게 할 때가 없지 않았다 .
이런 면은
전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전도의 그 필연적 당위성.
말씀을 준행하면 올 기쁨에 대한 기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대한 가슴 떨리는 동참의 느낌..
많은 이유로 해서
진료실 석상에서
아는 분들에 대하여
'턱턱'하고 전하기도 한 반면에
또 한편으로 정말 필요할 때는
아무런 소리 못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도 있었다.
오랫동안 전도의 '전'자도 꺼내지 아니하고
그냥 내 속에 묻어 버리고 가만히 잊어 먹고 지내는
수개월도 있었다.
그 바탕에는
어쩌면 전도나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이
'최우선의 내 삶의 목표'가 되기 보다는
내가 살아가는 데 에너지가 되는 '평안' , '평강'의 안정감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히 순종하는 ,
즉 순서가 아직도 '내 기쁨'이 우선이 되거나
최소한 '하나님 '과 동 석에 놓고 살아간 이유가 없지 않나 싶다.
그러나, 그럼에도
주위에 열정적인 전도자들 중에서
진실한 동기의 그것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의지나 자아의 앞섬을 많이 보아와서
그런 위험성에 대한 경계심도 없지 않아 있어왔다. .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나님 말씀이 가장 앞서갈 수 있던가?
하나님의 뜻이 가장 우선이 될 수가 있던가?
이게 실은 가장 근원적인 물음이 된다.
즉, 순서 문제다.
내 자아의 앞섬.
내 교묘한 명분을 내세운 내 자아 성취의 욕구와
주님의 뜻 사이의 균형.
자아의 만족이 없다면
어떤 인간이 행동을 하는 '동기'가 유발이 될 수 있을까?
어느 정도까지는
주님은 우리의 어리석은 자아의 동기를 허용하신다.
우리의 자아가 충족이 된 후에야 '부인'이 될 수 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삼년 열심히 따라 다니던 그 공생애 중도
그들은 충만한 자아를 즐겼다.
결국은 '자아 부인'을 통하여
베드로와 몇몇 사도는 자기 십자가를 지었다.
이 모든 과정에는
'성령'의 오순절 강림 후에 가능하였다.
이 순서.
순서가 내 안에서
자리를 옳게 잡으면
그것은 그야말로 힘있는 삶이 된다 .
이 허무한 삶.
산다는 것의 허무함.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함을 무의식적으로 느낌이
현대의 모든
먹고 사는 문제를 벗어난 자들의 공통된 마음이다.
그 허무함은
삶이 주님의 뜻 아니고는 의미가 없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느끼고 있음에도 그리 살지 못함은
사단의 장난이다.
원죄의 흔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
일상에서 주님을 사모하는 자들
천국의 백성이 될 자들은
이 순서를 옳게 잡아야 한다.
그것은 모두 '성령'으로 가능하다.
오늘
친구의 장인이 '논산'에서 별세하셨다고 연락이 왔다.
오랫만에 친구들 볼 마음이 설레었다.
그러면서 말씀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이거다.
' 친구들 만나서 무엇하는가?
이전처럼 만나서 기쁘고 즐겁고
그냥 이야기만 하다가 오는가?
하나님을 전도해야 하는 것 아니던가?'
부담스럽다.
말씀가운데 성령으로 말할 것을 생각나게 해주신다고 했는데
걱정할 것은 없지 않던가?
망신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뚜렷지는 않지만
내 속에서 흐르는 것 같다.
말 잘못하면 '송곳'으로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낄 수도 있는데..?
하지만 얼마 전 부터 서서히
다시금 내 속에서 드는 부담들이
'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을 증거하고
뜻대로 사는 것'이다라는 생각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것은 당위성이지
자연스러운 흐름은 아니었다.
자아충족성 강박적 생각에
하나님 말씀이 있으니 명분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말이다.
아.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흐름 속에 자연스레이 나오는
인격의 변화라기 보다는 결심에 지나지 않았을 가능성.. 이야기다.
쉽게 지칠 수 있는..
지금도 돌아보면 겂이 난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구절 가운데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성령으로 생각나게 하리라' 하신다 .
문제는 위에서 계속 써 내려 온 것처럼
내 속의 문제다.
이제는 조금은 흐름이 자유롭다 .
내 인생관이 조금은 더
주님의 말씀 안에서 흐른다.
결심 만이 남았다.
그리고 내 입을 열것도
그 말을 하게 하는 대상도
듣는 자의 어이없어 하는 미움의 질타성 표현도
내 속에서 그것들을 말씀으로 녹여내어 받아들이게 함도
모두 주님이 해결하실 것이다.
순서다.
난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하여
논산에 간다.
거기에서 만나는 친구와의 우정은
주님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즐겨질 것이다.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순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제
제 영혼에 흐름이
조금은 잡혀 가고 있습니다.
제 자아보다
주님의 뜻이 조금은 앞서기 시작하는 듯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미움을 받을 지 모를 상황에 도착하면
식은 땀이 나려 합니다.
주여.
타협하지 말고 당당하게 전하게 하소서.
할 수 있는 상황이면..
내 내려 갔다가 오는 이유와 명분이
전도이게 하소서.
만나는 누구든 그리하게 하소서.
덜아프게 하시고
덜 힘들게 하시고
성령으로 인도받으심 체험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하인아 늘 회개하라(마11:20-30) (0) | 2010.01.28 |
---|---|
나에게는 ( 마11:1-6 ) (0) | 2010.01.26 |
거저 거저(마10:1-15 ) (0) | 2010.01.22 |
소경은 확실히 눈뜨길 원했다 (마 9:27-37 ) (0) | 2010.01.21 |
내 손도 잡아 주소서( 마9:14-26) (0) | 2010.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