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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흐름의 순서 (마10:16-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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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흐름의 순서 (마10:16-23)

주하인 2010. 1. 23. 11:19

제 10 장 ( Chapter 10, Matthew )

 

 

 

세상의 어리석음과

육신의 허무함과

물질 세계의 혼탁함과

모든 어지러운 유혹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이리

녹아나길 원한다

오늘

그 눈녹듯 함을 전하는

전령사 되길 원한다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미움을 받는 것.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을 지 모르나

나에게는

아픔이 크게 느껴진다. ㅜ.ㅜ;

어떨 땐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있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참고 참다가 한번 씩 '왈칵'하고 분노로 터져나올 때도 있었다 ㅜ.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는 급한 성질의 원형도 있고

옳다고 생각하면 '확 ' 내지르는 면도 많아

두가지 면이 내 속에 공존하다가

어떤 때는 충돌을 일으키며 그것이 갈등으로

날 힘들게 할 때가 없지 않았다 .

 

 이런 면은

전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전도의 그 필연적 당위성.

말씀을 준행하면 올 기쁨에 대한 기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대한 가슴 떨리는 동참의 느낌..

많은 이유로 해서

진료실 석상에서

아는 분들에 대하여

'턱턱'하고 전하기도 한 반면에

또 한편으로 정말 필요할 때는

아무런 소리 못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도 있었다.

오랫동안 전도의 '전'자도 꺼내지 아니하고

그냥 내 속에 묻어 버리고 가만히 잊어 먹고 지내는

수개월도 있었다.

 그 바탕에는

어쩌면 전도나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이

'최우선의 내 삶의 목표'가 되기 보다는

내가 살아가는 데 에너지가 되는 '평안' , '평강'의 안정감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히 순종하는 ,

즉 순서가 아직도 '내 기쁨'이 우선이 되거나

최소한 '하나님 '과 동 석에 놓고 살아간 이유가 없지 않나 싶다.

 그러나, 그럼에도

주위에 열정적인 전도자들 중에서

진실한 동기의 그것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의지나 자아의 앞섬을 많이 보아와서

그런 위험성에 대한 경계심도 없지 않아 있어왔다. .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나님 말씀이 가장 앞서갈 수 있던가?

하나님의 뜻이 가장 우선이 될 수가 있던가?

 이게 실은 가장 근원적인 물음이 된다.

즉, 순서 문제다.  

 내 자아의 앞섬.

내 교묘한 명분을 내세운 내 자아 성취의 욕구와

주님의 뜻 사이의 균형.

 자아의 만족이 없다면

어떤 인간이 행동을 하는 '동기'가 유발이 될 수 있을까?

어느 정도까지는

주님은 우리의 어리석은 자아의 동기를 허용하신다.

우리의 자아가 충족이 된 후에야 '부인'이 될 수 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삼년 열심히 따라 다니던 그 공생애 중도

그들은 충만한 자아를 즐겼다.

결국은 '자아 부인'을 통하여

베드로와 몇몇 사도는 자기 십자가를 지었다.

 이 모든 과정에는

'성령'의 오순절 강림 후에 가능하였다.

이 순서.

순서가 내 안에서

자리를 옳게 잡으면

그것은 그야말로 힘있는 삶이 된다 .

이 허무한 삶.

산다는 것의 허무함.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함을 무의식적으로 느낌이

현대의 모든

먹고 사는 문제를 벗어난 자들의 공통된 마음이다.

그 허무함은

삶이 주님의 뜻 아니고는 의미가 없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느끼고 있음에도 그리 살지 못함은

사단의 장난이다.

원죄의 흔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

일상에서 주님을 사모하는 자들

천국의 백성이 될 자들은

이 순서를 옳게 잡아야 한다.

그것은 모두 '성령'으로 가능하다.

 

 

 오늘

친구의 장인이 '논산'에서 별세하셨다고 연락이 왔다.

오랫만에 친구들 볼 마음이 설레었다.

그러면서 말씀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이거다.

' 친구들 만나서 무엇하는가? 

이전처럼 만나서 기쁘고 즐겁고

그냥 이야기만 하다가 오는가?

 하나님을 전도해야 하는 것 아니던가?'

부담스럽다.

말씀가운데 성령으로 말할 것을 생각나게 해주신다고 했는데

걱정할 것은 없지 않던가?

 망신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뚜렷지는 않지만

내 속에서 흐르는 것 같다.

말 잘못하면 '송곳'으로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낄 수도 있는데..?

하지만 얼마 전 부터 서서히

다시금 내 속에서 드는 부담들이

'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을 증거하고

뜻대로 사는 것'이다라는 생각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것은 당위성이지

자연스러운 흐름은 아니었다.

 자아충족성 강박적 생각에

하나님 말씀이 있으니 명분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말이다.

아.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흐름 속에 자연스레이 나오는

인격의 변화라기 보다는 결심에 지나지 않았을 가능성.. 이야기다.

쉽게 지칠 수 있는..

지금도 돌아보면 겂이 난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구절 가운데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성령으로 생각나게 하리라' 하신다 .

문제는 위에서 계속 써 내려 온 것처럼

내 속의 문제다.

이제는 조금은 흐름이 자유롭다 .

내 인생관이 조금은 더

주님의 말씀 안에서 흐른다.

 결심 만이 남았다.

그리고 내 입을 열것도

그 말을 하게 하는 대상도

듣는 자의 어이없어 하는 미움의 질타성 표현도

내 속에서 그것들을 말씀으로 녹여내어 받아들이게 함도

모두 주님이 해결하실 것이다.

 

 순서다.

난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하여

논산에 간다.

거기에서 만나는 친구와의 우정은

주님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즐겨질 것이다.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순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제

제 영혼에 흐름이

조금은 잡혀 가고 있습니다.

제 자아보다

주님의 뜻이 조금은 앞서기 시작하는 듯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미움을 받을 지 모를 상황에 도착하면

식은 땀이 나려 합니다.

주여.

타협하지 말고 당당하게 전하게 하소서.

할 수 있는 상황이면..

내 내려 갔다가 오는 이유와 명분이

전도이게 하소서.

만나는 누구든 그리하게 하소서.

덜아프게 하시고

덜 힘들게 하시고

성령으로 인도받으심 체험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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