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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 놓음과 성령(눅 2:21-39 ) 본문

신약 QT

내려 놓음과 성령(눅 2:21-39 )

주하인 2008. 1. 8. 12:33

 

성령이 임하시면

어디에 가서라도

어디에 있어도

무슨 일이라도

언제까지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이 어리석은

내 속의 벽은

언제까지

주님의 역사를

틀어막을 것인가?

주여,

저에게

힘있는 삶을 허락하소서

주여

저에게

끝까지 기다릴 수 있는

기쁨의 인내를 허락하소서.

성령이 위에 계신

감동의 주님을

늘 느끼게 하소서.,

 

 

 

 

제 2 장 ( Chapter 2, Luke )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NIV "dismiss in peace" 평화 가운데

     일시에 놓아주시다.)   

 

 이용우 선교사님의 책

'내려놓음'이란 글을 읽고

나 뿐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요번에 '더 내려 놓음'이란 책이 있다.

어제까지 그걸 읽었다.

역시 감동스럽다.

 균형잡힌

영성이 뛰어나시며

실행가이시기도 한

인텔리 출신 선교사.

글도 잘쓰시니

얼마나 귀한가?

 그런데

그 분이

내려놓음이란 것에 대하여

우려 섞인 글을 써 놓으신 것을 보았다.

내려 놓음이란

기존에 하던 것을

다 포기하란 이야기가 아니라는것이다.

오히려

주님의 뜻이시면 사역을 더 맡을 수도 있는 것을 포함한다는 이야기다.

처절히 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헷갈리는 게

'무소유'가 전부 옳고

모두 던지고 세속을 벗어나서

수도를 하는 게 다 옳은 것 같은

유혹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기독교와 불교나 다른 자기 수양의 종교라 일컬어지는 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불교나 타 종교에서는

자기를 비우기 위하여

극도의 자기 절제를 강조하고

철저한 무소유를 미덕으로 하나

기독교는

우리를 비우는 대신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채우는 게 그 원리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령이 위에 계셔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이해가 가지 않는가?

그 분이 나만의 수도생활을 원하시면

수도 생활에

그 분이 일상에서 전도를 하며

사업장을 터전으로 하는 삶을 원하시면

그렇게

선교를 원하시면 선교를 ...

교회에서 일을 하길 원하시면

일을...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비움이 필요하다.

오직 주님의 성령이 임하시기 위한

우리 영혼의 빈 공간.

이게 '내려 놓음'이다.

문제는

이 내려 놓음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을

내 자아 대신

내 속에 가득 채우기 위하여서는 어찌해야 하는가다.

 또한

그걸 막는 것은 무엇인가?
역시 '내 것'을 포기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그것이다.

 나도 그렇다.

내가 원하는 몇몇가지는 절대 포기 못한다.

내가 그리는 약간의 미래는

- 많은 부분 , 생각 하지 않고 주님께 맡기려 노력하지만 -

내가 잘할 수 있고

내 현재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을 생각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기에

아직 주님의 말씀을

힘있게 듣지 못하고 있다.

성령이 시키시는 게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부럽다.

시므온님이...

이선교사님이..

그외에

훌륭한 믿음의 선배님들이...

 

하지만

모든 전제를 그렇게 하고

내 테두리안에서

주님이 운용하시도록 하는 것은

내려 놓음이 아니다.

당장 내일 현 직장을 그 만 두고

다른 곳으로 가라라는 소리가 들릴 까봐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게 내려 놓음을 막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정글 안의

이 다약 아이들도

많이 컸을 것이다.

그래도

눈 만큼은

아직도 예쁠 것만 같다.

 

 

 오늘

묵상에서

두 사람이 나온다.

' 시므온과 안나'

두 분 다

나이가 많아

한 분은 죽기를 기다리는 중이시고

한 분은 과부된지 84년 되신 분들이다.

 

이 분들은

성전에서 생활하셨다.

아주 오래 기다리면서..

무엇을 기다렸는가?

 

 구원자 예수님.

 

그들이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기약없이 기다린 것 만은 사실이다.

그 시간은 얼마나 힘들고 지루했을 것인가?

그럼에도

그들이 그들의 삶을

아무 비전도 없고 - 성령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 보라 ,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  성령의 감동으로..라 나오지 않는가?- 힘든 나날일 텐데

어찌 그런 어려움을 감내 했을까?

 그들은

주님 앞에서

그런 소임을 받았다.

시므온 같은 경우는 '주님이 오실때 까지 죽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기다린다.' ...이리 되어 있다.

 

 날 가져다 대입해 보았다.

주님이 날 보고

성전에서 거하시며

'주님 오실 날을 죽을 때까지 기다려라.

 그래서 주님오실 때까지는 죽지는 않을 것이다. ' 이러시면

난 금방 '예' 할 수 있을 것인가?

거기에는

'자식들을 장가는 보내고

대학은 마쳐야겠지요?

대출금은요?

일년에 한 두차례 여행은 .. ' 등의 수많은 조건들이

선뜻 허락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므온님은 그냥 기다렸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분은 많은 것을 내려 놓았을 것이다.

그 내려놓음은

그럼에도

자신의 의로 이루어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  성령의 감동으로..

성령이 철저히 그를 감쌌음에 가능한 이야기다.

그가 철저히

하나님을 향해

온 영혼을 집중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성령이 충만하면

세상의 어떤 것도 부럽지 않을

통렬한 기쁨이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우리 기도하는 자들은

은혜의 시간을 안다.

그러기에 그 기쁨을 잊지 못하여

주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따르려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더 내려 놓음'이란 책에

이 선교사님의 간증이 잔뜩 실려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 분이

그 곳에서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곳곳에서 읽혀지며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흔적을 느끼고 보고 듣는

행운을 가지는 자에 대한 부러움이 없지 않아 든다.

 이 성령 충만한 분들.............

 

이제

막바지에 다다라

주님 예수님을 뵙고

그 분의

아기적 육체를

직접 안아든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는

시므온의

고백을 듣고 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참으로 감동스럽다.

이것은

성령의 임하시는 체험을 한 사람들

주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한 경험이 있는 자들

적은 것이지만 주님 앞에 내려놓음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은 경험이 있는 자들 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격렬한 감동의 표현이다.

 

 하지만

묘한 느낌이 읽혀진다.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NIV "dismiss in peace" 평화 가운데 놓아주시다.)   

 이제 시므온은

자신의 사명을 끝내는 즈음에 있다.

그 심사를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에 함축시켜 탄성을 발하고 있다.

이것을

그대로 읽으면

이제

'내 달려갈 갈길을 다 마치고'라 표현한 사도 바울의

그 후련함도 읽혀지기도 하지만

영어의 표현을 보면

약간 다른 뉘앙스로 읽혀진다.

'dismiss'

버려지다.

온전히 치워버리다... 이런 부정적인 느낌이 많다.

거기에 평화라는 단어를 섞으면

조금 달라지긴 한다.

 '평화롭게 온전히 치워지는 내 상태...'

조금은

탄식하는 듯함이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이제 목표를 잃었으니 허탈하다는 마음이 슬그머니 비친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주님을 영접하고

어느 정도까지는 주님은 우리의 어리광성 뗑강을 웃으시고 보고 계신다.

시간이 지나면

그 분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성장은

내 멋대로 가 아니고

아버지이신 주님과 늘 상의가 되는 안에서

가정교육 잘 받고 커 가기를 바라신다.

그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내 멋대로 잘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늘 주님께 여쭈어 보아야 한다.

여쭙지 않고 일저지른 다음 주님께 조르는 것은

레위 토막 살인 사건 후의 이스라엘 지파랑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묻기 위해서는

우리의 욕심을 버릴 각오를 해야한다.

주님은 가장 선하시고

가장 귀한 것을 주신다는 믿음 하에

모든 것을 순종할 마음으로

늘 주님 앞에 아뢰어야 한다.

그러면

성령이 충만해지고

늘 성령이 우리 위에 있게 되고

성령의 감동으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오늘

시므온과 안나의

오랜 기간의 기다림을 보고 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그들 자신을 내어 놓았다.

세상은 돌아가도

그들은 성전에서 그대로 있었다.

그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기에 그랬다.

그러고 나서는

그들은

주님을 안아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적용

 

1. 성경 여섯 장 읽겠다.

 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2. 기다린다.

 오래 기다리는 게 주님의 원리다.

모든 걸 서두를 이유는 전혀 없다.

 

3. 내 생각으로 제한하는 것이 없는 지 돌아 본다.

 P. 와 주님의 뜻을 어떻게 극복하겠는가?

 그걸 여쭈어 보겠다.

 주님이 도와주시고

 이걸 가지고 어떻게 하실 것이고

 이것과 사역의 관계는 어떨 것인지..

 아니면

 그냥 시므온처럼

 그 자리에서 끝없이 주님이 원하시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버팅기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4. 내 원함과 주님의 원함을 어떻게 조율하는가?

 기도 뿐이 없다.

 

5. 온전한 내려 놓음에 대하여 묵상하겠다.

 시므온도  아쉬움을 표한다.

 틈이 나면

 자아가 튀어나오는 것이 인간이다.

 자기 부인이란 무엇인가?

 온전한 자기 부인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도

 

주님

나에게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열심히 달려오던 것들도

시간이 되면 여지없이 흐려지고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흐물흐물

삶이 힘이 없어지는 게

부족한 저 올시다.

주여.

변함없는 힘을 주소서.

주님 앞에

주님을 위해

주님 때문에

오직 주님으로

흔들리지 않는

힘있는 믿음을 원합니다.

제 머리 속의 생각이 아니고요.

 

오늘

시므온과 안나님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오직 성령님으로 인하여

주님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저도 그리하게 하소서.

어 떤 일을 저에게 주실 지

어떤 일을 계속해 나갈지

흔들리지 않는

소명의식을 허락하시어

주님 예수님 뵐 때까지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허락하소서.

그리 하기 위해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내려 놓을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가질 것은 가지게 하소서.

고칠 것은 고치게 하시고

새로운 것은 새롭게 넣어 주소서.

주여

이 모든 것

주님이 도우셔야만 가능합니다.

주여

힘을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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