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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세상아 마음대로 돌아가 보아라( 눅 1:57-66 ) 본문

신약 QT

그래, 세상아 마음대로 돌아가 보아라( 눅 1:57-66 )

주하인 2008. 1. 5. 10:56

 

 

 

제 1 장 ( Chapter 1, Luke )
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  팔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  그 모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  저희가 가로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  그 부친께 형용하여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63.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러라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셔

'때가 되면

말을 할 수 있을 거라 하셔서.. '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고

드디어

그 약속한 시간이

다 온 줄 알았다.

 아들이 출생했기에 그렇다.,

더구나

걱정했던 사태는

벌어지지도 않았다.

늙은 아내가

애기도 잘 낳았다.

아들은 튼튼하다.

 그런데도

입은 열어도

말은 나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모인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축복하지만

사가랴의 벙어리임은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다.

 나가서 마중도 하고

그들의 잔치 분위기에

같이 어울려

이 얘기 저얘기

오랜 묵은 이야기를 터놓고 이야기도 하고 싶지만

말이 나와야 말이지.

답답하기 그지없다.

 

 축복의 증거는 분명코 눈 앞에 있고

아내 엘리사벳은

아이를 안고

연신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그 증거를 누리고 있지만

말이 나오지를 않는다.

 

 이럴 때 어찌 해야 하는가?

찾아온 친척들을 찾아 다니며

이리 저리 몸짓 발짓을 하면서라도

설명을 하고

이해를 구하고

오셔서 반갑다고 인사도 하고 할까?

 

 모습이 이쁘지를 않다.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 앞

기쁨의 모임이 한창인데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싶을 듯하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야 맞을 듯 싶다.

 

그래

가만히 있자.

가만히..

 

주님의 축복은

가만히 혼자 만 누리자.

남들의 관심과 이해를 좇을 아무 이유가 없다.

그냥

주님이 알아서 해 주시겠지..

때가 되면

또 알아서 기적을 베푸시겠지.

그냥

그냥

기다리자.

 

마음을 다잡아 먹고

가만히 자신 안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 보기도 하고

아내의 기쁨으로 빛이 나는 그 얼굴을 바라 보기도 하고

이 상상하기 힘든 기적인

자식을 보게 된 놀라움을 만끽하기도 하고

멀리 보이는

산 기슭에 흔들리는

나무의 잎사귀를 스쳐가는

바람의 흔적을

느끼기도 하고

그러다가

불현듯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 지면

그냥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눈을 감고

두손 들어

가슴에 얹어

우리 주님이 함께 하셨던

그 때의 그 기억을 되살리고

다시금

그 두손을 높이 들어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고

하늘 향해

주님.. 하며

약하게 소리내어 외쳐 보기도 하자.

소리는 나지는 않겠지만

우리 주님은 들으시겠지.

전지하신 그 분이

때가 되어

그 분의 시간이 되면

막혔던 이 혀를 풀어 주시겠지.

 갑자기

들어 기도하던 두 손을 스쳐 지나가는

살랑이는 바람이

싱그럽게 느껴진다. .

마음이 뜨거워 진다.

눈에는 눈물이 돈다.

웬지 모를

촉촉한 감동이

안구 뒷쪽으로 부터

따스한 습기를 동반하며

한줌 눈물 방울이 되어

꿇어진 무릎 위에

툭~

하고 떨어진다.

 아......

외쳐 소리 지르고 싶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곧이어

이 감동은

코로 밀려간다.

흡기와 호기의 적절한 힘 조절을 불러오며

들릴 듯 말듯

그의 코는

바이브레이션을 일으킨다.

낮은 콧노래가

흥얼흥얼

들릴 듯 말듯

낮게 깔린다.

 새로운 생명이

이 집에 들어온

또 하루의 밤이

이렇게 저물어 간다.

 

 변화없는 날이

여드레까지 지나간다.

사가랸

담담하다.

사람들이 몰려온다.

아이의 할례를 위해서다.

아이의 이름을 짓기 위해 의견이 분주하게 오간다.

전통에 따라 '사가랴'로 짓기로

중론이 모아져가지만

엘리사벳의 단호한 반대가 잇다른다.

'요한'

하나님이 주신 이름을 주장한다.

관습과 풍속을

반하는 강한 주장.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반응에 꺄우둥 하면서

드디어

벙어리인 사가랴에게로

결정을 돌린다.

 

이제

때가 왔다.

 이제 끝일 듯

축복의 증거인 요한의

건강한 출생과 아내의 출산으로

말문이 풀리려는 당연한

증거로 삼으려 했다가

실망한 사가랴가

주님의 시기가 아님을 이해하고

사람의 이해와 위로를 마다하고

' 주님과의 조용한 만남의 시간 '을 가지며

지내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그 날이 온 것을

직감했다.

 '요한'이라는 이름

그 이름은

하나님이 주신 이름이다.

기다리니

그 이름이 불려진다.

사람들이 찾아와

요한의 이름을

요한으로 짓기를 확정지어달라 한다.

 

주님의 원리다.

 

기다리는 것이다.

내려놓음이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초조하고 불안하고 안절 부절 못하고

특별히 응답이라 생각될 즈음에

자신의 자아를 최고조로 발휘하여

많은 불화를 일으킬 위험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자중하고

기다리며

사가랴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것이다.

 이 기다림은

때로는 굉장한 고통이다.

남들 축제 분위기 때

골방에 갇혀

외톨이로 지낸다고 상상을 하는 것은

그 자체 만으로도 고통이다.

더구나,

사가랴의 그 축제는

인생에 누가 있어

그런 축복을 받을 수 있는가 싶을 정도로

대단한 것 아닌가?

그럼에도 기다릴 수 있는

그의 진중함.

그의 하나님에 촛점을 맞춤은

가히 귀하다 할 수 밖에 없다.

 

 배우고 싶은 것이 이것이다.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

주님과의 온전한 동행.

 

그 표현이 거짓이 아니고

또한 과장이 아님은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라는 구절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혀가 풀린다. '

얼마나 시원할 것인가?

얼마나 통쾌할 것인가?

 소리라도 한번

'야호'하고 먼저 질렀으면 좋을 것을..

그는,

하나님을 찬송을 먼저 한다.

 그 팔일의 기다림이

그에게 결코 고통 만은 아니었음을

찬송이 먼저 나온 것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주하인

여러 묶임이 있다.

 ...

' P.' ....

가끔은 그 묶임이

세상에 살면서 겪는 '지옥'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누가 이해하겠는가?

그걸 이해 받으려

그걸 이해 하지 못한다고

사람들을 향해 몸부림도 쳐보고

야단도 해보았지만

결론은 '아니다'다.

사가랴가

축복을 받으면서

묶였다.

혀가.. .

이 어이 없는 양극의 갈등이

가장 선하신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자식을 주신다고 하시면서

이루어 졌다.

 

 그리고는

사가랴는

10개월의 임신 기간 동안

그리고도

8일 동안

찬양하며 지냈다.

그 영혼으로 ...

그 감성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묶여 보았던 사람으로..

 

 윗 사진의 글이

올해의 성경구절이다.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

 사가랴가 아들을 보고

기뻐했을 감동을 주는 구절이다.

그럼에도

변화가 없다

나도 그렇다.

이전과는 많이 다르지만

아직도 무거울 때가 있다.

혀는 아직도 묶여 있는 듯 싶다.

남들은 축복의 시간을 누리는 듯 싶고

깔깔대고

신나게 모여서 놀고

세상의 축복을 잘 누리고

편하게 살고 있지만

난, 아주 가끔은

외진 골방에 혼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허허로움을 즐길 때가 있다.

이럴 때

눈물 한방울

묘한 촉촉함과 함께 떨어질 때가 있기도 하다.

그럴 때

영감이 어린 깊은 찬양이 내 속을 흔들며

내 성대의

가녀린 흔들림을 동반하며

내 입을 통해서 나올 때

슬픔과 외로움과 안타까움은

어느새

기쁨과 전율로 바뀌는 경험을

아주 조금 하기도 한다.

 

그래..

이제 나도 얼마 남지 않았다.

혀가 풀릴 날.

묶인 내 상황이 풀어질 때가..

그때까지

세상아

마음대로 돌아가라.

난 주님을

조금 만 더 기다리겠다.

그렇게 되면

내 묶임은 풀리겠고

난 찬양을 높이 높이 불러 올리리라.

내 찬양은

주님의 보좌에 상달할 것이고

주님은 내 노래를 들으시며

또 한번 이러실 것이다.

    "마3:1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때까지

조금 만 더

조금 만 더

기다리리라.

주님 만은 들으실 게 분명한

내 혼자 만의 찬양을 올리면서..

 

 

적용

 

1. 성경 여섯장 읽었다.

 은혜와 더불어 말씀을 깊게 주신다.

 

2.  아내와 축복의 시간을 미리 축하하겠다.

 영화라도 한편 보러 가야지.

 

3. 내일의 찬양을 기쁨으로 준비한다.

 사가랴의 찬양을 생각하며..

 

4. 조금 더 인내한다.

 주님의 확실한 소리가 들릴 때까지..

 '요한'이라는 이름이 들먹여질 때

사가랴는 머리 속이 '꿍'하고 소리가 들렸을 것 같다.

 그때까지,

주님의 징조가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기다림은

주님이 원하시는 좋은 품성이다.

 

5. 불쌍한 자를 돌아 본다.

 기뻐하는 자를 같이 기뻐하겠다.

 

6. 자식들을 위해서 중보한다.

 늘 주님의 손이 돌보시길..

 

 

기도

 

주님

오늘은 사가랴의 마음을 묵상하다가

속이 울컥하려 합니다.

숨겨진 진실이

꿰어 맞추어 나오는 듯

실타리가 풀리듯

참으로 답답한 묵상의 시간이

쉽게 마무리 지어져 갑니다.

늦은 시간,

퇴근을 늦추며

기도하고

주님 앞에 서려는

잠시의 노력을 기뻐하심이 분명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앞에만 서기를 원합니다.

세상은 돌아가라 하겠습니다.

주님 앞에 있겠습니다.

때로는 바보같이 느껴지고

실제로 바보라 손가락질 받아도

주님이 가르치실 때까지는

몸부림치지 않겠습니다.

대신

조용한 시간을

주님의 뜻대로

머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세상은 부리나케 돌아가도

주님 안에서

먼 산의 나무 결이

바람에 움직이는 것을 보고

감동을 하고

스치고 지나가는 한줄기 기류가

주님을 향해 올려진

내 두손을 간지름을

잠시 기도를 멈추고서라도

감격의 느낌으로 느끼겠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이 평강의 쉼을

주님의 시간까지

기다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여

바라옵기는

주님의 나에 대하여 원하심을

내가 주님을 위하여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깊게 가르침을 주시길 소원합니다.

힘있는 삶이 곧

내 앞에 펼쳐지기를 기대합니다.

혀가 묶인 것이 풀리듯

나의 묶임도

주님의 때가 되면

스르르 풀려 나가

내 삶은

죽을 때까지

주님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찬송을 부르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내 혈관을 흐르는 피가

붉은 보혈이길 원합니다.

내 내 쉬고 들이시는 숨이

주님의 향기이길 원합니다.

주여

감사하고 귀하신 하나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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